일제강점기는 혹독했으나 문학과 예술은 꽃피었다. 20세기 초반 온 세계가 사상 철학 문예 생활방식까지 빠른 속도로 변화하며 문화적 충격을 흡수하고 튕겨내야 했던 역동의 시대였다. 나라 잃은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 지성인들은 유토피아적 안식처를 찾아 문학과 예술의 가치에 헌신했다. 시와 그림, 소설과 철학에 두루 능한 ‘경성의 천재들’이 태어났다. 이상과 구본웅, 백석과 정현웅, 김기림과 이여성, 이태준과 김용준, 구상과 이중섭 등 천재들은 서로 우정을 나누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암흑기 르네상스를 일궈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경성 시대의 문학과 예술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교과서에서 그들의 이름과 삶을 단편적으로 들었을 뿐이다. 조선일보와 함께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를 히트시킨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이 그 시대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성 천재들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사랑을 근현대 명작들과 더불어 만끽할 수 있는 ‘천일야화’다.

구본웅이 1935년 발표한 ‘친구의 초상’. 이상의 얼굴로 붉은 눈자위 등 병색이 짙은 시인의 모습을 표현했다.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승만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 까치집 머리, 털북숭이 수염의 이상과 작은 키에 질질 끌리는 외투를 입은 구본웅의 기묘한 조화가 곡마단 행차에 비유됐다.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구본웅의 ‘인형이 있는 정물’(1937).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에 걸려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상(왼쪽), 박태원(가운데), 김소운이 함께 찍은 사진.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시인 조병화가 그린 1950년대 명동다방 지도.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 작품은 5년 전 홍익대 미대 입시 면접 문제로 나왔다.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화가 구본웅이 친구인 이상 시인을 그린 작품이다. 어릴 때부터 나를 따라 미술관을 자주 다녔던 조카는 시험에서 작가와 작품 제목을 서슴없이 말했는데, 면접관들은 이 작품이 뭔지 정확히 말한 학생은 오늘 처음이었다며 그 자리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내 조카는 물론 합격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이 ‘유명한’ 작품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작가 ‘구본웅’에 대해서, 그리고 구본웅과 시인 이상의 우정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구본웅은 1906년 서울에서 천도교인(손병희 교주의 비서)이자 잡지 ‘개벽’ 편집장을 지낸 출판인이며, 사업가이고 재력가였던 구자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구본웅은 동네 젖동냥으로 컸는데, 세 살 때 유모가 아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척추 장애인(일명 꼽추)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구전(口傳)은 의학적 신빙성이 낮다. 아마도 선천적 척추 질환이 세 살 이후 발현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산후통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부친 구자혁은 새 아내를 맞았는데, 그가 바로 ‘변동림'의 언니였다. 나중에 이상의 아내가 되고, 또한 이상이 죽고 난 후 이름을 ‘김향안’으로 고쳐 김환기와 재혼하는 그 변동림 말이다.

◇이상과 구본웅의 동병상련

구본웅은 친어머니가 안 계셨고, 이상은 백부의 손에 컸으니 같은 동네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이 둘이 금방 친해진 것은 ‘동병상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둘 다 매우 똑똑하여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이상은 명문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진학한 반면, 구본웅은 ‘신체적 결함’을 이유로 경성고등보통학교로의 입학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구본웅은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로 ‘화가’가 되어도, 무엇을 해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얻어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구본웅이 일본 대학에서 미술 이론을,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미술 실기를 공부하고, 이과전, 독립전 등 당대 일본의 재야 그룹전에 당당히 이름을 알린 후 귀국했을 때가 1933년이다. 그리고 이상이 도쿄로 떠나는 1936년까지, 그 짧은 3년간의 시기에 이 둘은 늘 함께 붙어 다녔다. “텁수룩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에 숱한 수염이 뻗친 이상”과 “꼽추인 데다가 땅에 끌리는 인바네스를 입은 구본웅”이 함께 거리를 거닐면 곡마단이 온 줄 알고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후에 행인 이승만(월탄 박종화의 유명한 역사 소설을 거의 모조리 그린 삽화가)이 이들의 모습을 추억하며 삽화를 그리기도 했으니까.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리다

이 시기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이상의 자전적 단편소설 <봉별기>에 따르면, 1933년 3월 이상은 처음 각혈을 했다. 그 후 총독부 기수직 자리를 그만두고 배천 온천으로 요양 갔을 때, 소설 속에서 그를 찾아왔던 ‘화가 K’가 바로 구본웅이다. 이 둘은 여기서 기생 금홍이를 만났고, 서울로 돌아와서 이상은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렸다.

박태원이 조선일보 1939년 2월 22일 자에 쓰고 그린 ‘자작자화 유모어 콩트 제비’. 파산한 이상의 다방 경영 상태를 보여주는 삽화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헤멀쓱한 벽”에는 화가가 꿈이었던 시인 이상이 직접 그린 “황달 걸린 사람” 같은 우울한 누런빛의 <자화상>이 걸려 있거나, 그의 화우(畵友) 구본웅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이상의 옛 친구 문종혁에 의하면, 제비 다방에 걸린 구본웅의 작품은 “오른쪽에는 수양버들이 훈풍에 날리고 왼쪽에는 뒤로 돌아선 나녀(裸女) 하나가 서 있으며, 그 가운데로 검은 제비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힘차게 날아가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의 회고에 기댄다면,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에는 구본웅의 <인형이 있는 정물>이 걸렸다고도 한다. 당시 파리에서도 가장 ‘핫’했던 미술 잡지 ‘카이에 다르(Cahier d’Art)’가 목각 인형과 함께 콜라주 하듯 겹쳐 놓인 그 정물화 말이다.

◇에콜 드 파리? 에콜 드 경성!

다방 ‘제비’도 그저 다방이 아니었다. 미술관도 음악당도 거의 없던 시절, 경성의 다방은 때로 음악회가 열리고 미술 전시회도 열리는 장소였다. 축음기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고, ‘룸펜’ 지식인들은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의 연주에 대해서, 지금 막 명동에서 개봉된 르네 클레르의 영화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이상은 특히 미샤 엘만의 연주와 르네 클레르의 영화를 좋아했다). 마치 1920~1930년대,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이 몽파르나스의 허름한 카페와 술집에서 ‘에콜 드 파리’를 형성한 것처럼. 경성도 나름 그에 못지않았다. 1930~40년대 경성에 자리 잡았던 수많은 다방은, 후에 시인 조병화가 그린 명동 다방 지도에서 보듯이 1950년대에도 이름과 장소를 달리하여 계속되었고, 오늘날 스타벅스 천국인 서울의 원조격이다.

그러나 이들의 ‘꿈의 장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소설가 박태원은 이상이 죽고 나서 “슬픈 동무” 이상을 회고하며, “마담(금홍이)도 사라지고, 나나오라 축음기도 팔아먹고” 거의 파산에 직면한 다방 제비의 ‘웃픈’ 현실을 삽화로 남겼다. 그리고, 이 삽화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시기(1935년), 구본웅은 여전히 각혈을 하며 성치 않은 몸으로 고뇌에 잠긴 우울한 친구 이상의 창백한 인상을, 검은 바탕에 강렬한 빨간색을 가미해 그려 놓았던 것이다.

◇그림도 잘 그린 이상과 박태원

박태원은 누구보다 이상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처음 조선중앙일보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연재했을 때 이상으로 하여금 삽화를 그리게 하는 ‘조건’을 붙였다는 회고가 있을 정도다. 이상과 박태원은 놀랄 만큼 미술에도 재능이 있었던 문인으로서, 그들이 남긴 삽화는 심지어 입체주의와 다다, 초현실주의를 넘나든다.

구본웅과 이상, 그리고 박태원의 합작품이 그 유명한 구인회의 회보 <시와 소설>(1936년 3월)이다. 구본웅의 부친은 경영이 어려워진 ‘기독교 창문사’를 인수해 ‘주식회사 창문사’를 열었는데, 구본웅이 출판사 겸 인쇄소인 창문사의 지배인이었다. 이상은 다방 일도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경제적으로 극심한 곤경에 처했을 때 구본웅의 창문사에 취직해 있었다.(이 무렵 이상은 변동림과 결혼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시와 소설> 창간호를 만든다. 창간호에 박태원은, 기이한 제비 다방의 주인장 이상을 소재로 하여, 소설 전체가 한 문장으로 구성된 단편 소설 ‘방란장 주인’을 썼다. 구본웅은 창문사에서 이 초라하지만, 역사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잡지를 발행해 주었으며, 잡지 삽화를 도맡아 그렸다. 이상은 이 잡지의 첫머리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

◇박태원과 봉준호, 구본웅과 강수진

이 시대 ‘현대인’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이상이 1936년 10월 도쿄로 갔다가, 이듬해 4월 불령선인으로 몰려 구치소 생활을 겪은 후 제일 먼저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원래 허약했던 구본웅은 한국전쟁 중인 1953년 거의 영양실조와 폐렴으로 새어머니와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47세의 생을 마감했다. 박태원은 월북했다. 영화를 좋아해서 어린 딸을 늘 영화관에 데리고 다니던 박태원이 가족들만 남쪽에 남겨둔 채로. 그는 북한에서 1956년 한 차례 숙청되었다가 후에 재기했다. 노년에는 실명을 해서 앞이 안 보이는 와중에도, 불굴의 의지로 대하 역사소설을 주로 썼다. 아버지 박태원과 함께 영화관을 다니던 딸, 그리고 그 딸의 아들은 후에 남한에서 성장해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된다. ‘기생충’으로 지난해 아카데미상 4관왕을 석권한 봉준호 감독 말이다. 구본웅의 외손녀도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발레리나 강수진으로, 현재 국립발레단 단장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천일야화’처럼 끝이 없다. 1930~1940년대 경성을 누볐던, ‘곡마단’ 소리나 듣던 천재 예술가들의 이야기.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생산물들. 그것은 지금의 우리들 유전자에 어떻게든 기억되고 있는,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할 문화유산이다. 슬프고 찬란한 유산. 그래서 연재는 계속된다.

※이 글에 소개된 작품은 5월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에서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