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

마흔 살의 M&A 변호사 피터 배닝(로빈 윌리엄스 분). 사업이 한창 궤도에 오른 시점에 뜻밖의 일을 겪는다. 런던에서 아들과 딸이 납치당한 것이다. 고아였던 그를 거두어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준 웬디 할머니의 집 안 곳곳은 갈고리로 긁은 흔적이 가득하고, 벽에는 협박 편지가 칼로 꽂혀 있다. ‘피터 팬, 네 아이들을 찾고 싶다면 네버랜드로 와라.’

네버랜드에서 맞이한 첫 번째 저녁. 식탁 위에는 빈 그릇과 식기만 가득하다. 어리둥절한 피터에게 팅커벨이 규칙을 설명해준다. ‘상상해 봐, 그럼 진짜로 먹을 수 있어.’ 아이들은 피터가 없는 동안 리더가 된 루피오의 지시에 따라 기도를 하고 열심히 먹는 시늉을 하지만 여전히 그릇은 비어 있다. 피터의 상상은 달랐다. 크림을 한 숟가락 떠서 루피오의 얼굴에 날리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짠! 루피오는 크림을 뒤집어쓰고 갑자기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무에서 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음식을 가지고 ‘노는’ 상상을 통해 피터는 어린 시절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임스 매슈 배리의 소설 ‘피터 팬'을 원작으로 삼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1년 작 ‘후크'의 한 장면이다. 루피오에게 상상의 크림을 던질 때 피터는 더 이상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변호사 피터 배닝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피터 팬으로 돌아간 것이다.

네덜란드가 낳은 문화인류학의 대가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라는 현상에 주목했다. 놀이는 모든 문화의 근간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대표작 ‘호모 루덴스'를 펼쳐볼 때다.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내가 엄마 할게, 네가 아빠 해. 놀이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행위다. 스스로 역할과 규칙을 정한다. 또한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소꿉놀이가 끝나거나 놀이방을 나가면 나는 엄마가 아니고 너도 아빠가 아니다. 하지만 소꿉놀이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한없이 진지하게 엄마와 아빠가 되어 있다. 자유로운 규칙, 시공간의 한계, 진지한 몰입. 놀이를 만드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인류 문화의 근간에 깔려 있다는 놀라운 통찰이다.

놀이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다. 무언가를 흉내 내고 따라 하는 ‘모방유희’, 서로 견주고 다투는 ‘경쟁유희’가 그것이다. 모방유희는 종교, 예술, 창작의 원천이 된다. 경쟁유희는 전쟁, 스포츠, 법률, 심지어 철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토대에는 소피스트들의 말싸움과 언어유희가 깔려 있다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호모 루덴스'는 1938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은 21세기에 들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인터넷, 소셜미디어, 문화 산업의 발전 때문이다. 웹소설과 웹툰은 막대한 규모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의 영향력과 수입은 어지간한 연예인 부럽지 않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같은 대표적 K팝 그룹은 수출 기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미학자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에 따르면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피터 팬이 루피오의 얼굴에 크림을 던지면 텅 빈 테이블에 음식이 생기듯, 말 그대로 ‘상상력이 밥 먹여주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호모 루덴스의 놀이, 혹은 마법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매직 서클’ 내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치, 외교, 안보, 경제 등 다양한 분야는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의 영역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놀이와 상상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코로나 백신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다. 현재 국내에 들어온 화이자 백신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었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상대적으로 넉넉한 편이다. 그나마도 물량이 부족해 우리는 2월 25일까지 백신을 맞지 못하고 있었다. 졸지에 이란, 이집트, 터키, 브루나이, 베네수엘라, 우크라이나와 같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국민의 실망감이 차오르는 듯하자 갑자기 ‘K주사기’ 타령이 시작됐다. 국내에서 개발된 ‘최소 잔여형 주사기’를 이용하면 6인용 백신을 7명에게 주사할 수 있다는 “대박 사건”이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치약이 없어서 이빨을 못 닦는 집구석에 치약 짜주는 도구가 많다고 기뻐하는 꼴이었다. 옆 반 애들은 피자를 각자 두 조각씩 먹는데, 문재인 반장은 달랑 피자 한 판 사다놓고 잘 쪼개면 여섯 조각을 일곱 명이 먹을 수 있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2월 3일에는 백신 유통 모의 훈련을 한다며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시끌벅적한 행사를 하고 보도 자료를 뿌리는 촌극도 벌어졌다. 23일에는 백신접종센터 대테러 훈련도 있었다. 이미 세계 백여 국가에 백신이 유통되고 있다. 테러범도 그런 걸 목표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쇼 머스트 고 온(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이었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대통령이나 총리, 여왕 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앞장서서 백신을 맞았다. 비과학적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갔다. 대통령이 자기가 맞지도 않는 백신 접종을 ‘참관’하러 간 나라가 또 있을까. 결국 우리는 대통령이 ‘안티백서(Anti-Vaxxer, 백신 음모론자)’인 나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셈이다. ‘K방역’은 이렇게 끝났다.

문재인 정권은 백신 계약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원인을 정확히 밝히고 이해와 용서를 구해도 모자라다. 하지만 정부는 현실의 백신 부족을 상상력으로, 그것도 식상해진 ‘탁현민 쇼’로 때우고 있다. 국민은 피터 팬이 돌아오지 않은 네버랜드에서 억지로 맛있는 척 꾸역꾸역 먹는 시늉을 하던 어린이들 신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테이블에 백신이 넉넉하게 올라올 날은 과연 언제일까.

루피오는 ‘기도하고 밥을 먹는’ 상상을 아이들에게 강요했다. 재미가 없었고 밥그릇은 텅텅 비어 있었다. 피터가 루피오의 얼굴에 크림을 던지자 그제야 테이블은 진수성찬으로 가득 찼다. 정치는 현실이지만 때로는 ‘상상력의 예술’이 된다. 청와대의 ‘호모 루덴스’들을 향해 ‘놀고 있네’라며 통쾌하게 한 방 날려줄 피터 팬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