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몇 명이나 왔냐고요? 공쳤죠. 요즘 누가 귀금속을 삽니까.”

지난 2일, 서울 종로3가 귀금속 거리의 한 매장. 굳게 잠긴 매장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홀로 가게를 지키고 있던 박순찬(56)씨가 나타났다. 예약이 없어 문을 잠가놨다는 박씨는 “예전에는 하루에 열 개 이상 팔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손님을 한 명도 못 받는 날이 더 많다”면서 “평일에는 아예 문을 닫는 매장도 있다”고 했다.

지난 2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귀금속 상가 상인들이 텅 빈 매대를 지키고 있다. /이한솔 영상미디어 기자

이날 찾은 종로 귀금속 거리는 고요했다. 독립 매장과 집단 상가 할 것 없이 점원 수가 손님보다 훨씬 많았다. 소규모 매장 30여 곳이 모인 한 집단 상가에선 60대로 보이는 남성 두 명만이 물건을 보고 있었다. 다른 종업원들은 휴대전화를 보거나, 옆 매장 직원과 수다를 떨었다. 거리 곳곳에 붙은 ‘임대’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귀금속 매장 500여 곳이 몰린 최대 규모 집단 상가 ‘단성골드 주얼리센터’도 사정은 같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감정사 최경주(57)씨는 “신혼부부가 가장 많이 찾는 이곳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라면서 “‘임대' 표시만 안 붙였지, 상가를 내놓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귀금속 매장 2000여 곳이 밀집한 종로3가 일대는 한때 ‘국내 최대의 귀금속 유통 단지’라 불렸다. 2000년대 초반까지 전국 귀금속 가공품의 80%가 이곳에서 유통됐다. 그러나 인구 감소와 예물 간소화 추세로 최근 수년간 불황을 겪었다. 지난해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사망 선고’와도 같았다. 이곳에서 40년간 소매업을 했다는 한 60대 상인은 “IMF, 2008년 경제 위기도 겪었지만 지금처럼 어려운 적은 없었다. 코로나 직전 대비 체감 매출은 30% 수준”이라고 했다.

귀금속 산업 연구 기관인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예물용 주얼리 시장 규모는 1조1056억 원으로, 조사가 시작된 2010년 이래 가장 작았다. 연구소는 2년에 한 번씩 예물 시장 조사를 진행하는데, 지난해 시장 규모는 2018년(1조2197억 원) 대비 9.4% 줄어든 수치다. 연구소에 따르면 예물 시장 규모는 2012년(1조6049억 원) 정점을 찍고 지속해서 내림세다.

지난 1월 서울 서초구 신세계 강남백화점 샤넬 매장에서 사람들이 대기 순번을 받으려고 줄 선 모습. /김지호 기자


◇골드바 뜨고, 예물 금 진다

반면 투자용 금을 유통하는 업계는 역대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환금성이 좋은 골드바, 금 증권계좌 등에 돈이 몰리는 것이다. 금융권, 산업체 등에 실물 금을 유통하는 민간 업체 한국금거래소의 올해 1월 매출액은 2330억 원. 전년 대비 330% 늘어난 수치이자, 창사 이래 최대 월 매출이다. 송종길 한국금거래소 전무는 “지난해 유통한 금 23.3톤 중 60% 이상이 골드바 등 투자용 상품이었고, 장신구용 금은 5% 내외에 불과했다”면서 “‘금은 일단 구매하면 가치가 오른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투자용 금에 대한 수요가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오는 6월 출산을 앞둔 정다혜(33)씨는 지난달 결혼기념일을 맞아 남편과 배 속의 아이를 위해 3.75g(1돈) 골드바 2개를 구매했다. 정씨는 “금값이 10개월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는 뉴스를 보고 ‘금테크’ 겸 결혼 기념 선물로 골드바를 샀다”면서 “막상 구매해보니 투자 가치가 높은 것 같아 앞으로 한 달에 하나씩 꾸준히 모을 계획”이라고 했다.

골드바가 유망한 투자 수단으로 주목받다 보니 아예 예물·예단을 골드바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1월 결혼한 윤모(30)씨는 결혼반지 대신 남편과 100g(약 26.7돈) 골드바 두 개를 나눠 가졌다. 윤씨는 “먼저 결혼한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결혼반지는 장롱에만 넣어둔다고 하더라”면서 “골드바는 급전이 필요할 때 되팔 수도 있는 만큼 예물은 간략히 하고 대신 골드바에 투자했다”고 했다.

한국거래소(KRX)가 운영하는 금시장도 매년 성장하고 있다. 한국거래소 금시장을 통하면 금을 주식처럼 현물 없이 사고팔 수 있다. 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KRX 금시장에서 거래된 금 수량은 2만6201kg으로, 전년(1만713kg) 대비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지난해 거래 규모는 처음 금시장이 개설된 2014년(1055kg)보다 20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개인 투자자들의 영향이 컸다. 지난해 개인 투자자는 KRX 금시장에서 전년 대비 2.5배 많은 4230억 원어치 금을 순매수했다. 은행·증권사 등 기관이 사들인 양(480억 원)보다 9배 많다. 한국거래소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확대로 인해 안전 자산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금을 귀금속이 아닌 투자 수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확대했다”고 분석했다.

김시월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실용성에 민감한 젊은 세대는 금을 장신구라고 생각하기보다 투자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최근 부동산과 주식이 동반 폭등하면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젊은 세대가 금으로 몰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 홀로 잘나가는 명품 귀금속

예물용 금 시장 중 유일하게 성장 중인 분야는 명품 분야다. 올해 말 결혼을 앞둔 여모(27)씨는 얼마 전 예비 남편과의 결혼반지를 ‘불가리’에서 맞췄다. 18K 소재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 한 쌍을 구매하는 데 500만 원 정도 썼다.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를 종로 귀금속 거리에선 30% 정도 싼 가격에 맞출 수 있지만, 여씨는 “종로는 직접 몇 시간씩 돌며 상담을 받아야 하는 데다 공정에 대한 정보도 알기 어렵다”며 “마음 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명품 브랜드를 택했다”고 했다.

주요 명품 브랜드들은 코로나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잇따라 제품 가격을 올리고 있다. 주얼리 브랜드 ‘불가리’는 지난 1일 주요 제품 가격을 5% 내외로 인상했다. 지난해 4월과 7월 두 차례 가격을 올린 후 7개월 만이다. 다른 보석 브랜드 티파니앤코도 이번 달 중 가격을 인상할 계획이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웨딩 고객의 백화점 객단가(1인당 평균 매출)는 전년 대비 20%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