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공된 성당의 관리자로, 혹은 성당 의자나 운반하는 사람으로 자기 소임을 다했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이미 그 순간부터 패배자다. 지어나갈 성당을 가슴 속에 품은 이는 이미 승리자다. 사랑이 승리를 낳는다…. 지능은 사랑을 위해 봉사할 때에야 비로소 그 가치가 빛난다.” -생텍쥐페리 ‘전시 조종사' 중.
프랑스의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는 엄혹한 시대를 살다 간 사람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기 조종사였다. 전쟁이 끝나기 1년 전 어느 날, 그는 정찰 비행을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 유명한 ‘어린 왕자'를 출간한 지 1년 남짓 지난 때였다. 위 문장이 실린 ‘전시 조종사’를 출간한 지 2년 반이 지난 때였다. 생텍쥐페리는 시체조차 우리에게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문장은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산다는 것이 전쟁 같다는 비유가 성립하는 한, 그의 문장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에세이스트 스가 아쓰코(須賀敦子·1929~1998)는 말년에 나직하게 회고한다. 인생의 몇몇 국면에서 어찌할 바 몰랐을 때, ‘전시 조종사’의 저 문장이야말로 자신을 떠받쳐주었다고. 인간은 대체로 휘청이며 살기 마련인데, 저 문장은 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길래 스가 아쓰코를 지탱해 줄 수 있었을까. 어떻게 20세기의 한 예민한 인간으로 하여금 생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을까.
생텍쥐페리는 저 글에서 먼저 누가 패배자인지를 정의한다. 남들이 성당을 완성하기 기다린 뒤, 관리나 하려 드는 이야말로 패배자다. 의자를 들고 앉을 자리나 확보하려 드는 이야말로 패배자다. 인생에서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은 자가 패배자다. 무엇인가 걸었다가 실패한 사람은 패배자가 아니다. 아무것도 걸지 않은 자가 패배자다. 무임승차자가 패배자다. 결과적으로 아무리 많은 이익을 계산해 얻었어도, 무임승차자는 패배자다.
성당 안에서 거저 앉을 자리를 얻었는데 왜 패배자인가? 힘들이지 않고 이익을 얻었는데 왜 패배했다고 하는가? 이익을 계산하거나 추구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익의 최대화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라. 그러나 답하라.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이익의 추구란 말인가? 이익을 정교하게 계산해내는 지능만 가지고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실제 ‘전시 조종사’의 저 구절 앞뒤로, 인간이 가진 이성과 지능의 한계에 대한 사색이 실려 있다.
아무리 열심히 손익을 따져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생텍쥐페리에 따르면, 오직 ‘사랑’만이 삶의 목적이라는 어려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이익을 계산하는 지능은 그 사랑에 봉사할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성당 안에서 앉을 자리를 거저 확보하려 드는 이는 패배했다. 그는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무엇이고,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인간이 알 수 있을 리야. 사랑은 이익의 계산을 넘어선 곳에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인간은 모른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향한 통로다. 그것이 바로 대성당이다. 그 통로를 대성당이라고 불러도 좋고, 사원이라고 불러도 좋고, 절이라고 불러도 좋고, 성소라고 불러도 좋다. 혹은 ‘가람’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일본의 불문학자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1892~1981)는 ‘전시 조종사’의 저 구절을 “다 지어진 가람 안의 당지기나 의자 대여 담당자를 하려는 사람은 이미 그 순간부터 패배자다”라고 번역했다.
대성당은 어디에 있는가? 대성당은 밀실에 있지 않고 광장에 있다. 오늘날 대성당은 마천루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성당이 한창 지어지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절에 대성당은 다른 큰 건물이 없는 광장의 한복판에서 그 초월적인 위용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대성당에 가야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대성당을 지을 수 있는가? 대성당은 커다랗기에 혼자 지을 수 없다. 대성당은 함께 지어야 하기에 공적인 건물이다. 사랑을 향한 통로는 함께 지어야 한다. 대성당은 커다랗기에 단시간에 지을 수 없다.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해서 1882년에 짓기 시작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아직도 짓고 있는 중이다. 대개 사람들은 대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기 마련이기에, 자기 역할을 미룰 수 없다. 모두 함께 지어나갈 대성당을 당장 가슴 속에 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가슴속 대성당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가?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1938~1988)는 소설 ‘대성당’에서 말한다. 대성당을 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맹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대성당을 그리지 못한다고. ‘대성당’에서 맹인은 자신을 환대하지 않던 눈뜬 이에게 묻는다. “뭔가 믿는 게 있나요?” 눈뜬 이는 대답한다. “딱히 믿는 것은 없어요. 사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그래서 가끔 힘드네요. 제 말 아시겠어요?” 그러고는 대성당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한다. 맹인은 눈뜨고 있는 사람의 손을 쥐고 함께 종이에 성당을 그려나간다. 눈을 뜨면 삶의 수단이 보일지 몰라도 삶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보기 위해서는 묵상해야 하고, 묵상할 때는 눈을 감는다.
대성당을 그린 사람들은 험한 시간을 통과해 간 이들이었다. 생텍쥐페리와 스가 아쓰코와 레이먼드 카버는 일찍 가족을 잃거나, 가난에 시달리거나, 알코올 중독에서 허우적대거나, 비참한 전쟁을 겪거나, 시대의 광기를 목도한 사람이었다. 모두 ‘더러운 리얼리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더러운 리얼리즘의 대가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 ‘깃털’에서 이웃이 안고 있는 아기가 정말 못생겼다고 불평하는 부부를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돌아와 섹스에 열중하는 부부를 묘사한다. 그러나 결국 카버는 대성당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생텍쥐페리와 스가 아쓰코와 레이먼드 카버는 더러운 현실을 보았기 ‘때문에’ 대성당을 가슴에 품는다. 혹은 더러운 현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성당을 가슴에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