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

조지 레이코프가 제자와 같이 쓴 책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에 따르면, 가정에는 두 가지 모델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가 절대 권위를 가지고 선악 기준을 정하는 ‘엄격한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자녀들과 합의해서 가치 기준을 정하는 ‘자애로운 가정’이다. 엄격한 가정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말한다. “세상은 정글이고, 너는 힘을 길러야 해. 그래야 저 바깥의 악당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어.” 자애로운 가정의 아버지도 말한다. “너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다 사회 탓이기 때문이란다.” 여기서 엄격한 가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수’다. 이들은 특정인이 잘되고 안되고는 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자애로운 가정, 즉 ‘진보’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특정인의 성공을 좌우하며, 개인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늦은 밤 집에 있는데, 며칠 굶은 듯한 이가 초인종을 누른다. “배가 고파요. 밥 좀 주세요.” 보수인 집주인은 생각한다. ‘저 사람이 이 꼴이 된 것은 노력을 안 해서다. 내가 여기서 밥을 주면 저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밥을 얻어먹고 다닐 거야. 내가 거절하는 게 오히려 저 사람을 돕는 길이지.’ 그는 인터폰에 대고 말한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소!” 진보인 집주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저 사람은 뭔가를 열심히 해보려다 잘 안돼서 이런 신세가 된 거야. 그가 재기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해.’ 그는 문을 열어주고 그 사람에게 따뜻한 밥을 준다. 둘 중 어느 게 더 쉬울까? 당연히 전자다. 책 제목이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지금 이 나라를 장악한 세력은 분명히 진보이건만, 이들의 행동을 보면 진보로 사는 게 전혀 어려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보수보다 행복해 보인다. 그들은 모두에게 평등한 교육을 외치면서 자기 자식들은 다 특목고에 보내고, 혹시 좋은 대학에 갈 실력이 안 되면 스펙을 위조하기까지 한다. 졸업 후 외국 유학을 보내는 것도 필수인데, 젊은 시절부터 쭉 반미를 외친 분들답지 않게 주요 행선지가 미국이다. 이들은 재테크에도 능해서, 국민에게는 집을 못 사게 하면서 자신들은 폭등한 집값으로 수억~수십억 시세 차익을 얻는다. 심지어 금융 사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정권 측 인사들 이름이 거론되기도 한다. 자기 사람 챙기는 데도 뛰어나, 비리로 점철된 인물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장·차관 등 고위 공직에 임명한다. 레이코프가 이 정권의 행태를 봤다면 ‘나도 진보로 살고 싶다'는 책을 쓰지 않았을까? 이 혼란은 문 정권 인사들이 레이코프가 말하는 진보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생긴다. 그렇다고 이들을 보수라 부를 수도 없는 게,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억압하고 근근이 유지되어 온 사회 시스템을 전혀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제3의 길’이다. 앤서니 기든스라는 학자가 창안한 이 말은 1990년대 영국에서 집권에 성공한 노동당이 자신들 특기인 복지를 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만 추구하면 경제성장이 안 되니, 신자유주의 이념을 일부 받아들이겠다는 노선이다. 보수와 진보의 장점을 두루 취한다는 뜻. 하지만 문 정권은 한국 진보의 고질적 병폐인 ‘무능'과 한국 보수의 문제점이었던 ‘비리'라는, 양측의 단점만을 딴 노선을 걷고 있다. 이들에게 ‘제3의 길'이란 말을 썼다간 팔순을 넘긴 기든스 교수가 화병으로 쓰러질지 모르는지라, 난 문 정권 인사들의 행태를 ‘K정치’라 표현하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문 정권이 추구하는 K정치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사례1. 횡단보도를 건너던 사람이 신호를 무시한 채 달리던 차에 치였다.

보수: 운전자가 나쁘다. 신호를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진보: 횡단보도 사고를 부추기는 사회 시스템이 문제다. 횡단보도에 오기 한참 전에 차량이 멈추도록 신호등을 멀찌감치 세우고, 보행자를 보호하도록 신호가 바뀌는 순간 횡단보도에서 차단막이 튀어나오는 장치를 설치해야 한다.

K정치: 조건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가해 운전자가 보수인 경우에는 ‘천인공노할 범죄’이며, 가해자의 범행에 배후가 있다고 주장한다. 진보의 범행일 때는 ‘횡단보도가 애매한 위치에 있어서 사고가 유발됐다’ ‘이 사고로 충격을 받은 운전자가 실질적 피해자’라고 한다.

사례2.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신도시 개발 정보를 미리 빼돌려 땅을 샀다.

보수: 연루된 직원들을 처벌하고, LH 직원들에 대한 윤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진보: 땅에 주인이 있는 게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 뒤 필요한 이에게 나누어 주자.

K정치: 역시 조건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박근혜 정권인 경우 ‘현 정권의 도덕성 파탄이 제대로 드러난 사건’이라며 내각 총사퇴를 주장한다. 반면 자신이 집권당일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명박, 박근혜 때도 있던 일이다.” “해당 공무원들이 어느 정권에서 임용됐는지 따져봐야 한다.” “설마 개발되겠어 하며 땅을 샀는데 갑자기 신도시가 됐다.” 신내림을 받은 게 틀림없다.

기든스가 주창한 ‘제3의 길'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진보가 우클릭을 하다 보니 전통적 진보 지지층에게 욕을 먹어야 했고, 그렇다고 보수 측에서 이들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정권이 주창한 K정치는 임기 말임에도 레임덕이 없을 정도로 열광적 지지를 받고 있으니, 잘만 홍보한다면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을 것 같다. 전 세계 정치의 표준을 만들어가는 문 정권 여러분, 당신들이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