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추신수 선수가 팀 후배 투수 이태양에게 고급 손목시계를 선물했다. 추신수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사용해 남다른 의미가 있는 등번호 17번을 이태양이 양보해준 데 대한 감사 표시였다. 추신수가 오래 활동한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등번호를 양보한 선수에게 선물을 하는 관례가 있다고 한다.
추신수가 선물한 시계는 스위스 브랜드 로저 드뷔(Roger Dubuis)의 ‘엑스칼리버 에센셜’ 모델로, 가격이 무려 2170만원이다. 하지만 명품 시계 중에서는 ‘저렴한’ 편에 속한다. 그리고 이 시계를 만드는 로저 드뷔는 인터넷에 떠도는 ‘시계 등급·서열·계급도’에서 ‘S등급’ ‘1등급’ 등으로 불리는 최상위 등급에 끼지 못하고 그 아래인 ‘2등급’으로 분류된다. 고급 시계의 대명사로 통하는 롤렉스(Rolex)는 2등급에 매우 근접한 3등급에 속한다.
시계 전문가들은 “인터넷상의 시계 서열·등급·계급 등은 개인이 재미로 분류했을 뿐 공식적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면서도 “세계 시계업계에서 통용되는 시계 브랜드의 위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했다. 로저 드뷔는 왜 최고 등급에 속하지 못할까. 어떤 브랜드가 시계 서열의 꼭짓점을 차지하는 걸까.
시계 브랜드의 위상을 결정하는 핵심 가치는 ‘역사성’과 ‘기술력’으로 압축된다. 시계 계급도에서 최상위급을 차지하며 ‘톱5’ ‘오(5)대장’이라 불리는 다섯 개 브랜드가 있다.
스위스 파텍 필립(Patek Philippe)·바셰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브레게(Breguet)·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와 독일 아 랑에 운트 죄네(A. Lange & Söhne)이다. 모두 역사가 100년이 훌쩍 넘는다. 5개 브랜드 중 가장 오래된 바셰론 콘스탄틴은 266년 전인 1755년 설립됐다. 조선 영조 31년으로, 소론(少論) 일파가 노론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이 일어난 해다. 가장 역사가 짧은 오데마 피게도 1875년 세워졌으니 올해로 146년 됐다.
오래됐다고만 해서 최고 시계 브랜드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시계 칼럼니스트 김창규씨는 “시계사에 이정표를 세운 기술적 혁신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톱5 중에서도 최고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파텍 필립은 독립 분침 개발(1846년), 30·31일을 자동으로 맞춰주는 퍼페추얼 캘린더(1889년), 종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미니트 리피터 개발(1893년), 스톱워치 기능인 더블크로노그래프 개발(1902년) 등 시계 분야에서 최초 기록을 여럿 가지고 있다.
1775년 설립된 브레게는 중력으로 인한 오차를 수정하는 기능인 투르비용(tourbillon)을 1801년 발명하는 등 톱5에 속한 브랜드 모두 기계식 시계 진화와 발전을 가져온 기술을 꾸준히 개발해왔다. 보석, 핸드백도 만드는 명품 브랜드 까르띠에(Cartier)는 많은 이들이 전문 시계 업체가 아니라고 잘못 알고 있지만 현대적 의미의 손목시계를 최초로 만들었다.
역사가 짧더라도 엄청난 기술력과 이를 통한 혁신을 이뤄내면 위상이 높아진다. 추신수가 선물한 로저 드뷔와 리차드 밀(Richard Mille)이 대표적이다. 로저 드뷔가 1995년, 리차드 밀이 1999년에 설립됐으니 명품 시계업계에서는 ‘어린아이’다. 하지만 엄청난 기술력을 앞세워 빠르게 위상을 높이고 있다. 리차드 밀은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이 손목에 차고 시합하는 시계로 유명하다.
“테니스나 골프처럼 인간의 한계까지 팔을 휘두르는 스포츠에서 선수가 실제 착용하고 플레이 할 수 있는 기계식 손목시계는 없었습니다. 고장 나니까요. 리차드 밀은 시계 내부에 기둥을 박고 금속 와이어로 무브먼트(movement·시계가 작동하도록 하는 중추적 장치)를 매달아 띄우는 고도의 기술로 극복했죠. 시계에 사용하지 않던 티타늄 등 특수 금속을 사용해 무게를 엄청나게 줄였고요. 나달이 착용하는 시계는 30~40g밖에 나가지 않아요. 그래서 4억~5억원 하는 거예요.”(김창규)
신생 브랜드라도 노력하면 최상위 등급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을까. 월간 럭셔리 윤정은 편집장은 “시계 등급·서열 특히 최상위층의 톱5는 변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며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역사는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톱5가 기술 개발을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고요.” 시계 계급은 인도 카스트제도처럼 공고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