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역주행이다. 이번에도 걸그룹이다. 2011년 데뷔해 10년의 무명 생활 끝에 스타덤에 오른 4인조 걸그룹 ‘브레이브걸스’<사진>. 이 팀이 4년 전 발표한 곡 ‘롤린’은 이달 초부터 23일 현재까지 멜론 등 각종 디지털 음원 차트 1위를 석권 중이다. 데뷔 또는 발표 당시 묻혔던 가수나 노래가 뒤늦게 인기를 끄는 현상을 ‘역주행’이라 부른다. 브레이브걸스는 해병대 등 각종 군부대 위문 공연에서 ‘롤린’을 부르는 모습에 장병들이 열광하는 영상이 조회수 700만회를 넘기는 등 유튜브를 중심으로 화제가 되면서 역주행을 시작했다.
1990년대까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가요계가 대형 기획사 소속 아이돌 위주로 재편되면서 역주행은 드문 일이 됐다. 데뷔 전부터 팬덤을 거느리고 신곡을 내면 곧바로 차트 1위로 직행하는 순서를 밟았다. 그러나 유튜브와 소셜미디어 시대가 되면서 역주행이 돌아왔다. 브레이브걸스처럼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로 소문을 타면서 갑자기 큰 인기를 얻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이런 역주행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①여성
대부분 걸그룹이다. 역주행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 계기도 여자 아이돌 그룹이었다. 2015년 걸그룹 EXID의 노래 ‘위아래’가 차트 100위권 밖에서 있다가 한 달여 만에 1위를 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차트 역주행’이란 말이 나왔다. 이외에도 크레용팝, 여자친구, 오마이걸 등 대표적인 역주행 사례로 꼽히는 팀들은 어김없이 걸그룹이다.
유독 걸그룹이 역주행을 하는 이유는 팬덤의 차이 때문이다. 보이그룹 팬덤이 주로 10~20대 여성에 집중된 반면, 걸그룹 팬덤은 남녀 구성비가 비슷하거나 남자가 더 많고 연령대도 30~40대까지 폭넓다. 걸그룹이 한번 소문을 타기 시작하면 더 다양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뜻이다. 걸그룹과 보이그룹을 모두 제작한 경험이 있는 한 중소기획사 대표는 “행사나 축제에 보이그룹보다 걸그룹이 더 많이 섭외되는 것도 그만큼 대중성이 더 강하기 때문”이라며 “단적으로 브레이브걸스가 보이그룹이었다면 군부대 위문 공연에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소문을 타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②직캠
EXID, 크레용팝, 여자친구, 브레이브걸스 등 역주행한 걸그룹들은 모두 노래 자체로 인기를 얻은 게 아니다. 모두 지방 행사나 축제 등 실제 공연 모습을 팬들이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이른바 ‘직캠’ 영상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크레용팝이 독특한 의상과 안무로 주목을 받거나, 브레이브걸스의 공연 직캠에서 군 장병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재미 요소로 인기를 끄는 식이다. 게다가 직캠은 뮤직비디오나 방송 영상과 달리 여러 버전이 존재한다. 같은 공연이라도 수많은 팬들이 각자 찍어서 올리기 때문에 한 영상이 주목받으면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비슷한 직캠 영상이 연달아 추천 영상으로 뜬다. 여러 영상을 반복해 시청하면서 자연스럽게 호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브레이브걸스 소속사 관계자는 “워낙 오랫동안 군부대 위문 공연을 해온 데다 요즘엔 장병들도 다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있어서 유튜브에 공연 직캠이 수십 개 올라온 게 소문을 타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③근성
역주행 원조인 EXID 역시 데뷔 후 3년 넘는 무명 생활을 거쳤다. 그 기간 동안 주로 군부대 위문 공연 무대에 올랐다는 점에서 브레이브걸스와 비슷하다. 두 팀 다 스타덤에 오른 뒤 오랜 기간 동안 뚝심 있게 버틴 스토리 역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걸그룹 여자친구의 경우는 한 지방 공연에서 빗물로 미끄러운 무대에서 몇 번이나 넘어져 가면서도 끝까지 노래와 안무를 소화하는 모습이 찍힌 직캠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음악평론가 김작가씨는 “역주행한 걸그룹들을 관통하는 서사는 모두 중소 기획사 소속으로 별다른 지원 없이 본인의 실력만으로 성공했다는 이른바 ‘눈물 젖은 빵'으로 대표되는 성장 신화”라며 “10~20대 여성들이 그런 근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중들이 훨씬 쉽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기적 같은 역주행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