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키 큰 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들어섰다. 시간을 내어 전시를 안내해줘 감사하다고 말한다. 올해 국립현대미술관문화재단 후원회장이 되었으니,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건넨다. 겸손하고 유쾌한 제스처를 지닌 이 사람은 GS에너지 허용수 사장이다. 지금 덕수궁관에서 전시 중인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에 등장하는 시인 ‘김광균’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속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저렇게 대를 이어 김광균과 같은 일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김광균은 ‘와사등’을 쓴 시인으로 잘 알려졌지만,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다. 시인이자 사업가이기도 했던 그는 1930~1950년대 그 주변의 예술가 집단에서 유일하게 돈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중섭, 김환기, 최재덕 등 많은 화가의 일화에 등장,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준 인물로 기록돼 있다. 김광균이 70~80여 년 전 주변 예술가들에게 했던 일을, 그 외손자가 규모만 달리해서 지금 우리 미술관에 해주고 있는 것이다.
◇“시는 그림”…그림을 사랑한 시인 김광균
김광균(1914~1993)은 개성 사람이다. 12세에 부친을 여의고 육남매의 장남으로, 일찍 가장이 되었다. 개성상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취직 전선에 뛰어들었다. 군산의 경성고무회사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시를 썼다. 엄청난 지식의 깊이를 가진 그는 그 모든 지식을 다 독학으로 채웠다. 무역 사업을 했기에 영어도 잘했지만, 그것 역시 독학이었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1939년, 김광균이 스물다섯 살 때 발표한 시 ‘와사등’의 일부다. 여름의 긴 해가 나래를 접을 때, ‘비인 하늘'에 걸려 서 있는 가스등. 그의 시는 마치 그림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여, 이른바 ‘이미지즘’ 시라고 일컬어진다. 시가 ‘이미지’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뜻이다. 예전에 고등학교 시험 문제로 참 많이도 나왔다.
그는 실제로 “시를 그림처럼” 썼다. 항상 서양화집을 끼고 살았던 그는 그림을 무척 좋아해서 언제나 화가들과 어울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30년대 시는 음악이라기보다 회화이고자 했다.” 시는 운율과 리듬이 있는 음악인 것이 당연한데, 김광균은 시가 ‘회화’이기를 의식적으로 추구했던 것이다.
◇전쟁 통에 화가 챙긴 ‘사업가 시인’
군산에서 일하던 김광균이 서울로 발령이 나서 상경한 때가 1938년이었다. 이 무렵 김광균은 조선일보 기자를 하던 시인 김기림을 통해 여러 화가를 소개받았다. 김만형, 최재덕, 이쾌대, 유영국, 김환기, 이중섭 등이 그의 친구였다. 김광균은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모두가 피란 생활을 할 때도 건설실업주식회사를 운영하며 사무실을 두고 사업을 했다. 전쟁 통에 돈 없는 화가들이 그의 주변에 몰렸을 것은 자명하다. 그 무렵 찍은 김광균의 사진 뒤에는 김환기의 1951년작 ‘달밤’이 걸려 있다. 전쟁 통에도 부산에 있던 뉴서울다방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김환기. 그의 작품을 김광균이 또 사주었나 보다.
김광균과 김환기는 함께 후배 화가 이중섭을 살뜰히 챙기기도 했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만 성공하면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날 꿈에 부풀어 있던 이중섭을 도와준 선배가 이 둘이다. 전시 브로슈어도 만들어주고, 나란히 축사도 써주었다.
잘 안 팔리는 이중섭의 그림들도 사주었다. 김광균은 ‘황소(울부짖는 붉은 소)’에서부터 ‘흰 소’ ‘달과 까마귀’ 등 대표작을 다 사주었다. 김환기는 홍익대 학장을 하면서 ‘흰 소’를 홍익대 돈으로 사게 했다. 현재 그 소는 홍익대박물관 소장품이다. 당시 기준으로 제값을 주고 이중섭 그림을 산 이는 김광균, 김환기뿐이었다는 말이 있다. 이 작품들이 지금은 점당 50억원 정도 한다. 이중섭이 1956년 9월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장례 비용을 가장 많이 부담한 이도 김광균이었다.
◇시인이 사랑한 두 천재…이중섭·최재덕
여러 화가 중에서도 김광균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이는 이중섭과 더불어 최재덕(1916~?)이 아니었을까 싶다. 김광균은 “천사같이 순수하고 최고의 기량을 가진 화가 두 명이 이중섭과 최재덕인데, 이북 출신 이중섭이 남으로 내려왔고, 이남 출신 최재덕이 북으로 올라갔으니, 결국 쌤쌤이다(똑같아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광균 생존 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당시 계간미술 기자)이 직접 들은 말이다.
김광균은 최재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경주 박물관 추녀 밑 제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지나는 바람 같은 미소를 띤 부처님이 최재덕인 것 같다… 그의 그림은 행복한 색채로 덮인 나이브한(순수한) 풍경이 많다. 가을 추수 때 시골로 내려가 그린 들판의 ‘원두막’ ‘포도’ ‘한강의 포플러 나무’ ‘금붕어’ 등 대단히 독창적이고 부드러운 형상이 서려 있는 서정을 나는 이중섭과 맞먹는 것으로 생각한다. 두 사람 다 천사가 이 세상을 잠깐 다녀간 것이다.” (계간미술 1982년 9월호)
김광균이 언급한 이 작품들이 나는 하도 궁금해서, 하나하나 모조리 찾아 나갔다. 재작년에 ‘원두막’을 찾아 전시한 적이 있고, 올해는 ‘포도’ ‘한강의 포플러 나무’ ‘금붕어’를 찾아 전시하고 있다. 이 작품들이 최재덕이 월북하기 전, 그러니까 1940년대에 그린 것이라니!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감각적인 작품들이다.
‘한강의 포플러 나무’를 보자. 화가는 먼저 화면 전면에 과감하게 포플러 나무를 가득 그려 넣고, 그 사이사이에 중경과 원경, 즉 한강과 하늘을 채워 넣었다. 일반적인 유화가 원경에서부터 그려 나가면서 근경의 사물을 덧붙여 올리는 것과는 반대 방식이다. 그럼으로써 작품은 훨씬 더 평면적, 장식적 효과를 띠게 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포플러 잎사귀가 햇살에 부딪히는 순간을 포착한 듯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화면 왼쪽 아래 한강에서 노니는 배와 물 그림자 표현 또한 절묘하다. 푸른 계열 색감의 풍부한 변주는 지극히 아름답다. 정말 “그림이 시와 같이” 서정적이다. 이번 전시에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와서 보고 가장 감탄한 작품이기도 하다.
최재덕은 자신의 사인으로 ‘소’를 즐겨 그렸다. ‘최재덕’이라는 한글 글씨를 분해해서 소 모양이 되게 했다. ‘덕’이라는 글자가 소의 다리 모양을 만드는 식이다. 이 소 ‘마크’를 그저 재밌는 요소로만 볼 일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소’는 조선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본인들이 무지하게 싫어하던 은유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왜 소를 그렸느냐고 따지고 들면, “이건 소가 아니라 내 이름이다”라고 말할 참으로, 최재덕은 자신의 사인을 아예 소로 만들어버린 것이었을까? 물어볼 길은 없지만, 어쩐지 짠하다.
◇북으로 간 최재덕
김광균은 1957년 세 번째 시집 발표 후 거의 사업에 전념했다. 그리고 말년에 다시 시를 썼다. 젊은 시절의 한껏 멋들어간 그런 시가 아니라, 그저 담백하고 따뜻하고 회고적인 시들이었다. 자녀, 손자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차녀(GS에너지 허용수 사장의 이모)는 전통 매듭 무형문화재인 김은영(간송 전형필의 며느리) 여사다. 그녀는 김광균을 회고하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원이 있다면, 딱 한 번만, 아버지 특유의 그 유머(아재 개그)를 들으며 대화를 나누고 싶다.” 김광균은 참으로 모두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이였던 것 같다.
최재덕은 자신의 모든 작품을 친구 김광균과 김영재(의사)에게 넘기고 월북했다. 이후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언제 사망했는지조차 모른다. 북에서 남으로 온 천사(이중섭)도, 남에서 북으로 간 천사(최재덕)도 살아생전 현실 세계에서는 고생뿐이었던 것 같다. 이들이 부디 하늘에서는 그림이나 마음껏 그리며 행복하기를.
※이 글에 소개된 작품 중 일부는 5월 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