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다큐 콘텐츠가 ‘스파이시 치킨'이라면 제 다큐는 ‘슴슴한 된장국' 아닐까요?” 진모영 감독은 “‘님아‘ 시리즈를 통해 전 세계 시청자에게 한국 휴먼 다큐의 깊은 맛이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새신랑 새색시처럼 고운 빛깔 커플 한복을 맞춰 입고 손 꼭 잡고 다니던 아흔 노부부를 기억하는가. 봄이면 진달래꽃 꺾어 머리에 꽂아주고 겨울엔 눈싸움하는 천진난만한 할머니·할아버지. 2014년 개봉해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상 최고 흥행(관객 수 480만명)을 기록했던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이하 ‘님아, 그 강을…’)’ 이야기다.

7년 전 한국 관객의 가슴을 데운 감동 스토리가 홀씨처럼 퍼져 전 세계 관객을 찾아간다. 이 영화를 원작으로 넷플릭스에서 여섯 나라 버전으로 만든 확장판 ‘님아: 여섯 나라에서 만난 노부부 이야기’가 13일 190국에 공개된다. 한국 원작 다큐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되기는 처음. ‘님아, 그 강을…’ 감독이자 이번 시리즈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진모영(51) 감독을 만났다.

◇'님아 할머니'가 써준 제목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출연했던 강계열 할머니와 함께 한 진모영 감독. 지난해 할머니 생신 때 모습이다. 강 할머니는 여전히 정정하다. /진모영 감독 제공

“할머니 살아계시나요?” 진 감독을 보자마자 절로 나온 첫 질문이었다. ‘님아, 그 강을…’에 출연한 강계열(96) 할머니 안부였다. 영화 촬영 중 남편인 조병만 할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얼마나 정정하신지 몰라요. 이번에도 우리 ‘선상님’(진 감독을 이렇게 부른다) 영화 잘돼야 한다고 응원해 주셨답니다. 참, 이번에 할머니가 쓴 글씨가 한국판 타이틀로 나와요.”

–할머니가 제목을 쓰셨다고요?

“할머니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니 작품 어딘가에 할머니 흔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원래 할머니가 한글을 모르셨어요. 예전에 촬영 계약서 쓸 때 자녀분이 다른 종이에 할머니 이름을 써준 걸 보고 따라 그리셨지요.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횡성 읍내에 있는 막내딸 아파트로 들어가신 뒤로 노인대학에서 한글 배우는 재미에 푹 빠지셨답니다.”

–자주 만나뵙나요?

“할아버지 제사, 할머니 생신, 설, 추석. 1년에 네 번 찾아가요. 제 인생에 정말 중요한 분들이니까요.” 강 할머니 말고도 탈북 잠수부의 삶을 다룬 다큐 ‘올드 마린 보이’의 주인공 박명호(56)씨와도 호형호제하고 지낸다. “출연자는 진심을 담아 제 인생의 시간을 바쳐 맺은 인연입니다. 그 또한 ‘리얼’의 세계라고 생각하고 가벼이 버리지 않으려 해요.”

'님아, 그 강을...'에 출연했던 강계열 할머니가 넷플릭스 시리즈 한국판용 제목을 쓰는 모습. 오른쪽은 영상에 등장하는 강 할머니 글씨. /진모영 감독, 넷플릭스 제공

◇'다큐계의 옥자'

–넷플릭스와는 어떻게 일하게 됐나요.

“넷플릭스 LA 본사의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담당자가 ‘님아, 그 강을…’을 보고 자기 할머니를 떠올리며 무척 감동했대요. 2017년 가을에 연락이 와서 여러 나라 버전으로 시리즈를 만들고 싶다더군요. 봉준호 감독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옥자’를 만들어 화제가 됐을 무렵이었지만, 여전히 넷플릭스는 미지(未知)의 세계였어요. 넷플릭스 제작 시스템을 경험해 보고 한국 다큐 업계를 위해 활용하면 의미 있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낳은 자식이 세계로 뻗어가는 것도 의미 있다고 봤고요.”

–정확히 맡은 역할이 뭔가요.

“오리지널 창작자로서 시리즈의 본질을 정의하고, 전체적인 톤과 서사를 정했습니다. ‘쇼러너(showrunner)’라 불리는 총제작 실무 책임자와 협의해 국가별 감독 선정과 캐스팅 결정도 했고요. 김선아 PD가 컨설팅 프로듀서로 참여해 실무를 도왔습니다.”

2018년 프로젝트가 시작돼 2019년 1년 동안 여섯 나라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한센병 환자 남편(일본), 올리브 농사를 짓는 부부(스페인), 면화 농사를 하는 부부(인도), 메이플 시럽을 만드는 부부(미국), 동성 부부(브라질) 등이 등장한다. 진 감독이 직접 찍은 한국편에는 보길도에서 전복 양식하는 부부 이야기가 담겼다.

–출연자 선정 기준이 있었다면?

“우선, 50년 이상 오랜 세월 함께 산 사이 좋은 초혼 부부였어요. 둘째는 거의 온종일 서로 붙어 있는 커플. 같이 살아도 얼굴 볼 시간이 적으면 교감도 적으니까요. 마지막은 말로든, 행동으로든 많이 표현하는 부부였어요.”

–공통점이 보이던가요?

“문화, 인종을 뛰어넘어 행복한 부부를 살펴보니 남편들이 유머 있고 부드러웠어요.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부부간엔 강력한 가부장적 남성성이 작용합니다. 그 부분을 누그러뜨리고 교감을 이끌어 내는 연료가 ‘유머’와 ‘부드러움’이었어요.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해!’ 하고 버럭 화내는 부부라면 소통이고 뭐고 10초면 대화 끝 아닌가요(웃음)?”

–브라질편에는 동성 커플이 등장하던데.

“브라질편 감독이 제안했어요. 시대적인 흐름이고, 개인적으로 반대하지도 않기에 수용했습니다.”

–’다큐계의 옥자'인 셈인데, 넷플릭스와 일해보니 어떻던가요.

“창작자에게 최대한 자율권을 주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게 배려했어요. ‘제작비 줬으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기나 해’ 하는 식의 국내 콘텐츠 제작 관행과 전혀 다르더군요.”

–외주 제작사 PD를 하다가 신물을 느껴 영화로 옮겼다지요?

“10년 가까이 방송 외주 제작사 PD를 했습니다. 주 업무는 프로그램 기획, 관리, 납품 그리고 혼나기. 노동 강도가 엄청났는데 저작권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맥 빠졌습니다. 방송사에 부당한 편집권을 고치자고 하면 ‘너희가 뭔데?’ 하면서 업신여겼고요. 미련마저 없애주더군요.”

13일 개봉하는 ‘님아: 여섯 나라에서 만난 노부부’ 중 스페인편. /넷플릭스 제공

◇우리 삶 최전선의 화두는 ‘사랑’

–부부애를 주로 다루는 특별한 이유라도?

“개인적으로 이혼과 재혼을 경험하면서 겪은 내적 갈등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부가 사이 좋게 지내는 비결에 관심이 갔습니다. 지난날 겪은 ‘사랑과 전쟁’을 더는 반복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내면의 갈구가 카메라에 투영된 듯합니다.”

–해답을 얻었나요.

“행복한 부부 관계는 지나가는 나그네가 마을 어귀 서낭당에 돌멩이 하나씩 쌓아올려 만든 돌무더기 같은 것이더군요. 취객이 지나가다 차서 돌멩이 몇 개가 흩어질 때도 있지만,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진 않습니다. 큰 돌 몇 개로 급하게 만든 탑보다도 훨씬 튼튼해요. 사이 좋은 부부도 그래요. 살다 보면 안 좋은 일도 생기겠지만 그 시간을 극복해가며 더 단단해지지요. 백 송이 장미꽃과 이벤트로 일시적으로 쌓아올린 사랑을 긴 시간 두고 쌓아올린 돌무더기에 비할 수는 없겠지요?”

–요즘은 비혼주의자도 많습니다.

“제 영화는 부부를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가 도달해서 떨어지는 지점은 성별·결혼 유무를 떠나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인류가 끊임없이 천착해온 주제는 ‘어떻게 하면 완벽한 사랑을 통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에요. 만난 지 100일, 200일 세면서 사랑하는 젊은 친구들도 내 상대가 좋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삽니다. 여전히 우리 삶의 최전선에 있는 화두는 ‘사랑’입니다. 이번 시리즈는 전 세계인에게 보내는 ‘사랑 교과서’입니다.”

◇다큐 감독은 농사꾼이자 사냥꾼

–MSG(식품첨가물) 팍팍 뿌린 자극적인 ‘마라 맛’ 콘텐츠가 많아지고 있는데, 저자극 ‘순한 맛’에 가까운 작품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MSG를 안 친 것 같은가요? 저도 쳤습니다. ‘연출하지 않은 듯한 연출’을 했을 뿐. 자극적 첨가물이 아니라 버섯·멸치 같은 천연 조미료로 더 깊고 자연스러운 맛을 살린 셈이죠. ‘자연스러운 맛 첨가물’이랄까요?”

넷플릭스가 그를 선택한 것도 이 ‘슴슴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넷플릭스 다큐엔 독한 ‘하드보일드’ 콘텐츠가 대부분입니다. 사회 저항, 인류 재앙, 인권…. 잔잔한 휴먼 다큐는 드물어요. 다양한 콘텐츠를 갖추기 위해 제 작품을 선택했을 수 있어요.”

–‘올드 마린 보이’를 찍으면서 햇빛에 장시간 눈이 노출돼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다큐 감독의 삶은 어떤 것인가요.

“언젠가 작은 싹이 자라나 수확하기를 기다리는 농사꾼, 사냥감이 나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냥꾼과 비슷해요. 평균 3~5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도 진실한 작품을 내놓을 땐 뭔가 세상에 좋은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합니다.”

–휴먼 다큐의 매력이 뭔가요.

“배우가 아닌 평범한 주변 사람의 삶을 차분하게 응시하면서 지혜와 따스함을 배울 수 있다는 점. 그 재미를 넷플릭스 이용자들이 느꼈으면 합니다.”

‘님아’ 시리즈는 13일 오후 4시 190국 넷플릭스 이용자 2억여 명에게 공개된다. 넷플릭스 본사가 있는 미국 LA 시간 기준 0시에 맞춘 것이다. 진 감독은 작업실에서 지인들과 70분짜리 에피소드 6편을 연달아 보기로 했다. “평생 가장 긴 시사회”를 앞두고 그가 말했다. “고향 친구가 전화 와선 ‘컴퓨터로도 보고, 스마트폰으로도 보겠다. 회사 동료도 다 보게 해서 흥행시키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친구야 어쩐다냐. 넷플릭스는 시청한 이용자 수가 비공개란다. 허허!”

'님아: 여섯 나라에서 만난 노부부 이야기' 예고편 /넷플릭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