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서울. 여대 기숙사에 피투성이의 남자가 뛰어든다. 시대를 위해 싸우는 운동권 학생이라고 확신한 여주인공은 감시와 위기 속에서 그를 감추고 치료해준다. 어느새 사랑에 빠진 그가 무장간첩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20부작 드라마 한 편이 시놉시스 몇 줄 때문에 방영하기도 전에 좌초 위기에 빠졌다. JTBC에서 올해 방영 예정으로 촬영 중이던 드라마 ‘설강화’ 얘기다. 걸그룹 ‘블랙핑크’의 멤버 지수가 여자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해외의 K팝 팬덤 사이에서도 큰 기대를 모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 때문에 문제가 터졌다. 지난달 말 인터넷에 드라마 대강의 줄거리와 인물 설정을 소개한 시놉시스가 공개되면서다.
배우 정해인이 맡은 남자 주인공은 ‘명문대에 재학 중인 운동권 학생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북한에서 보낸 간첩’. 여자 주인공을 사이에 두고 그와 삼각관계를 이룰 또다른 남자 주인공은 ‘안전기획부 1팀장으로 어떤 상황에도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인물’이란 설정이었다. 이게 공개된 내용의 전부였지만, 친(親)여권 성향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여론이 들끓었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운동권을 모욕하고, 독재정권 하수인이었던 안기부를 미화한다는 이유였다. 1주일 동안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 설강화를 비판하는 글만 1만건 이상 올라왔다. 지난달 26일 올라온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는 드라마 설강화 제작을 중지시켜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10일 만에 19만여명이 동의했다. 같은 날 SBS ‘조선구마사’가 역사 왜곡 논란으로 방영 2회 만에 막을 내리는 사태가 터졌다. 다음 날엔 설강화 제작 협찬사 중 하나가 협찬을 철회했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방송사는 “설강화는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고 안기부와 간첩을 미화하는 드라마가 아니다”라며 “‘남파 간첩이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안기부를 미화했다’는 등의 지적은 제작 의도와 무관하다”고 공식 해명했다.
간첩 혐의 뒤집어썼던 이들에게 상처?
‘설강화’가 단 몇 줄의 설정만으로 방영 무산 위기에 처한 것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의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19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은 물론, 그 운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들마저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고 목숨까지 잃은 경우가 많았다. 드라마에서 운동권 학생이 사실 남파 간첩이었다는 내용이 방영되면 당시 간첩 혐의를 뒤집어 썼던 민주화 운동사를 왜곡하게 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지수가 맡은 여주인공 이름이 ‘영초’라는 것 역시 비판의 표적이 됐다. 1970년대 고려대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여성운동가 천영초씨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천씨는 1979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체포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인물이다. 그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영초언니’라는 책을 내면서 세간에 알려졌는데, ‘설강화’의 여주인공 이름을 영초라고 지으면서 남파 간첩과 사랑에 빠지는 역할로 만드는 것이 지나치다는 논리다. 드라마 제작사 측은 “여주인공 이름은 천영초 선생님과 무관하지만 선생님 이름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나온 만큼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낭만파 영웅 VS 내로남불 위선자
과거 영화나 드라마에선 운동권 캐릭터들이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게 일종의 ‘클리셰’(진부한 설정)였다. 특히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586 세력이 주축이 된 문재인 정부하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2017년 12월 개봉한 영화 ’1987′이 단적인 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다루는 이 영화는 제작에 난항을 겪다가 배우 강동원이 이한열 역할에 캐스팅되면서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는 일화로 잘 알려졌다. 상영 당시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 운동권 출신 여당 정치인들이 영화를 관람하며 흥행에 힘을 실어줬다. 작년 케이블 tvN에서 방영한 멜로드라마 ‘화양연화’ 역시 운동권 출신 명문대생을 남자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아이돌그룹 ‘갓세븐’ 멤버 진영과 배우 유지태가 함께 연기한 이 인물은 대의에 헌신하면서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낭만적 캐릭터로 그려졌다. 영화 ‘오래된 정원’의 지진희나 영화 ‘그해, 여름’의 이병헌 등이 연기한 운동권 역시 비슷한 모습이었다.
물론 1980년대 운동권의 이중적 모습을 꼬집은 작품도 없지 않다. 드라마 ‘모래시계’가 대표적이다. 여기선 독재정권의 폭력에 반대하는 운동권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주인공(박상원)을 핍박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의 뺨을 때리는 등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걸 꼬집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최근 인터넷에서 이 장면만 편집해서 ’586 운동권을 잘 표현한 모습'이라는 제목이란 게시물로 만들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학생 김영인(22)씨는 “우리 세대에겐 586 세대는 정의로운 운동권보다는 내로남불이란 말이 어울리는 ‘꼰대’ 이미지가 강하다”며 “과거의 공로도 있겠지만 586세대의 현재는 ‘모래시계’에서 묘사한 모습에 더 가까운 것 같다”고 말했다.
친문 커뮤니티가 비판 여론 주도
방영도 안 된 드라마가 위기에 빠진 것은 결국 ‘역사왜곡 드라마’란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조선구마사 조기 종영 후 tvN ‘철인왕후’도 인터넷상의 드라마 다시보기를 삭제했다. 두 드라마 모두 조선시대 배경인데 시대에 맞지 않는 소품이나 의상 등을 쓴 것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 ‘설강화’ 논란과 닮은 점은 이런 역사 왜곡 문제를 제기하는 비판 여론의 중심에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다는 점이다. ‘조선구마사’와 ‘철인왕후’가 루리웹, 보배드림 등 2030 남성 이용자가 많은 곳에서 문제제기를 했다면, ‘설강화’ 비판은 클리앙 등 소위 ‘친문(親文)’ 커뮤니티가 주도하고 있다. 클리앙에는 ‘설강화’ 제작 중단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링크를 올리면서 ‘청원에 동참해달라’는 게시글이 매일 5~6건씩 올라오고 있다. 또 다른 친문 커뮤니티 대표주자 ‘여성시대’는 아예 JTBC 앞에서 ‘설강화’ 방영 중지를 촉구하는 트럭 시위를 하겠다며 모금 활동 중이다.
이렇게 친문 커뮤니티가 발 벗고 나선 건 ‘운동권인 줄 알았는데 남파 간첩’이란 드라마 설정이 현 집권세력 핵심인 586세대 운동권을 겨냥한 것이란 의심 때문이다. 1980년대 운동권 지도부 중에는 북한 주체사상에 경도된 이른바 ‘주사파’가 많았다. 일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이들 대부분은 정치권에 들어간 후에도 친북 성향을 공공연히 드러내 비판을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실세 중 하나인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런 경우다. 임 전 실장은 1989년 임수경씨의 밀입북을 주도한 혐의로 5년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정계 입문 후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인권법 제정 반대 등에 목소리를 높이는 등 정치 행보 때문에 아직도 일각에선 ‘임종석은 북한 간첩’이라는 식의 의혹을 제기할 정도다. ‘설강화’ 설정이 공개됐을 때도 관련 기사마다 “임종석 얘기 아니냐”는 식의 댓글이 수십 건씩 달렸다. 이런 배경이 친문 커뮤니티를 자극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방영이 됐던 ‘조선구마사’나 ‘철인왕후’와 달리 구체적인 드라마 내용도 보지 않고 설정 몇 줄만으로 제작 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특히 국내외 블랙핑크 팬클럽을 중심으로 “드라마를 아예 보지도 않고 방영 자체를 철회하라는 요구는 드라마를 기다리는 시청자들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처사”라며 방영 촉구 집회 등을 기획 중이다. 게다가 이 논란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일단 드라마 방영을 기다리겠다는 입장이다. 사업회는 “드라마는 창작물이라 사실관계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더 보장해야 할 필요가 더 크기 때문에 JTBC 측에 공식적으로 드라마 내용 수정 등의 요구를 할 계획은 없다”며 “다만 방송사에 ‘민주화 운동을 폄훼할 우려가 있다는 국민들 우려가 있으니 유념해달라’는 취지의 공문만 발송했고 방송사로부터 각별히 유념하겠다는 답신을 받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