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가 때아닌 연인 조종설, 이른바 ‘가스라이팅’ 논란에 휩싸였다. 서른한 살 동갑내기 배우 서예지와 김정현이 그 의혹의 당사자다.
김정현은 2018년 MBC 드라마 ‘시간’에 출연했다가 불성실한 태도 논란 끝에 중도 하차했다. 그런데 당시 김정현과 교제하던 서예지가 김정현에게 가스라이팅을 했다는 의혹이 최근 제기됐다. 둘이 연애 당시 나눴던 카톡 대화에서 서예지는 김정현에게 ‘(대본에서) 스킨십을 다 빼라’ ‘여자 스태프에게 인사하지 말라’ 등 이해하기 어려운 요구를 반복하고, 김정현은 이를 수긍한다. 실제 김정현 요구로 드라마 대본이 바뀌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서예지 측은 ‘단순한 연인 간 싸움’이라고 해명했지만, 광고 업체들이 서예지와 계약을 해지하는 등 파장이 거세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상대방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이로써 타인을 통제하는 행위를 말한다. 일각에선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동년 여성이 남성을 가스라이팅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나온다. 서예지는 정말 김정현을 ‘가스라이팅’한 걸까.
◇“가스라이팅, 남녀 문제 아니야”
전문가들은 남성이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한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가스라이팅의 핵심은 상대방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 세뇌하고 조종(manipulation)하는 것”이라면서 “신체적·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이 2018년 실시한 데이트 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데이트 관계에서 연인에게 신체·언어·정서적 폭력을 경험한 경우는 여성(55.4%)과 남성(54.5%)이 비슷하게 나타났다. 경찰청 조사에서도 데이트 폭력을 경험한 남성이 상당수 있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9년 8월까지 발생한 데이트 폭력 피해자 4만4064명 중 남성 비율은 28.2%(1만2430명)였다. 여성(3만1634명·71.8%)에 비하면 낮은 수치이지만, 남성도 데이트 폭력 피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가스라이팅이 연인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나해란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가스라이팅은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 상사와 부하 등 모든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부모가 시험 성적을 빌미로 자식에게 ‘너는 살 가치가 없다’고 지속해서 세뇌하는 경우도 가스라이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 교수는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상대방을 자신의 통제 안에 두려는 심리가 강할 때 주로 발생하는데, 이 경우 가해자는 경계선 인격 장애(감정 기복이 심한 성격 장애)를 앓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김도연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 소장은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의 행동을 통제하는 데서 시작해 통상 2개월 전후에는 언어 폭력으로 발전하고, 심한 경우 신체 폭력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가해자가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넌 맞아도 된다'고 지속적으로 세뇌하는 경우 피해자는 이에 반항할 생각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스라이팅을 통해 남자 친구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사례도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검찰은 지난 2019년 남자 친구를 신체적·정신적으로 학대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혐의로 한국 국적 여성 A(23)씨를 기소했다. A씨는 우울증을 겪던 남자 친구 B(22·사망 당시)씨를 가스라이팅해 극단적인 선택을 종용한 혐의를 받았다. 외신에 따르면 A씨는 B씨에게 ‘그냥 죽어라’ ‘네가 사라지는 게 세상에 더 이롭다’ 등 내용이 담긴 문자메시지를 두 달 동안 4만7000통이나 보냈다. 또 휴대전화 위치 추적 앱을 이용해 남자 친구를 감시하거나, 신체적으로 학대하기도 했다. 결국 B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예지-김정현 관계는 가스라이팅일까
서예지와 김정현의 관계를 가스라이팅이라 볼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카톡 대화 전문을 확인하지 못해 단언하긴 어렵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얘기한다.
김도연 소장은 서예지와 김정현의 대화 중 다음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나로 인해 자긴 행복하지. 날 그러니 더 행복하게 만들어'(서예지). 이 대목은 서예지가 김정현에게 드라마 대본을 ‘로맨스 없게 수정하라’고 지시한 다음에 나온다. 김 소장은 “이는 데이트 폭력 초기에 흔히 나타나는 행동 통제 현상의 일종”이라면서 “상대방의 사적인 관계까지 통제하면서,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이러는 거야’라고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동귀 교수는 “가스라이팅 초기에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이 관계가 지속될 경우 피해자의 인격과 사회관계가 완전히 파탄 나게 된다”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