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전 대사는 "돈 안 벌려도 내가 내고 싶은 책 마음대로 내며 살고 있다"면서 "외교관 시 모은 돈을 다 깎아먹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벽마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집은 어두컴컴했다. 책 놓을 곳이 없어 화장실까지 책을 쌓았다. 전직 외교관이자 시인인 이동진(76) 전 대사의 집이다. 수천 권의 책들로 가득 찬 집의 한구석엔 직접 쓴 시집과 소설책, 번역서 120여 권을 모아놨다. 이 전 대사는 “책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방음이 돼서 바깥 소리가 안 들린다”며 웃었다. “여름엔 무지무지 시원해서 에어컨 틀 필요가 없고요. 책이 방음·방열도 해주니 보통 좋은 게 아니죠.”

이 전 대사는 관가에서 ‘여러 개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알려진 괴짜다.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성균관대 영문과, 서울대 법대까지 학부만 세 군데를 입학했다. 외교관·시인·소설가·번역가·출판사 대표까지 거쳐 온 직업도 여럿. 서울법대 시절, 박두진 시인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외무고시 합격 후엔 일본·이탈리아·바레인·네덜란드·벨기에 등을 거쳐 주나이지리아 대사를 역임했다.

30년 넘게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장미의 이름’은 1986년 이 전 대사가 번역한 우신사 버전과 이윤기 번역의 열린책들 버전으로 출간됐다가 우신사 출간본은 절판됐다. 한국화가 황창배는 이 전 대사의 시를 자신의 그림에 넣었고, 소설집 ‘우리가 사랑하는 죄인’은 KBS 미니시리즈로 제작됐다. 2000년 은퇴 후엔 해누리 출판사를 차렸다.

-도대체 직업이 몇 개인가요?

“30년 넘게 외교관 생활한 것 말곤 직업이라 할 수 없죠. 시나 소설은 원고료도 제대로 못 받았고, 순전히 취미 활동이라 직업이라 하기 어려워요(웃음).”

-취미라기엔 시집을 20권 넘게 냈던데요. 대학생 때 첫 시집을 낸 건가요.

“법대 다닐 때 박두진 시인 추천으로 내 시가 현대문학에 실리기 시작했어요. 당시엔 세 번 추천을 받아야 등단이 되는데, 연말이 될 때까지 소식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참지 못하고 자비로 책을 냈지요. 그게 첫 시집 ‘한의 숲’입니다. 그리고 박 시인 댁에 찾아가 책을 드렸죠.”

-당시엔 발칙한 일이었겠네요.

“‘왜 빨리 등단 안 시켜주느냐’는 뜻이었으니 반란이나 마찬가지였죠. 박두진 시인이 화가 나서 커피 한 잔 딱 놓고 떡도 하나 안 주시더라고(웃음). 그래도 그다음 해에 세 번째 시가 현대문학에 실렸습니다.”

-지금이야 자비 출판이 흔하지만 그땐 어려웠을 텐데요.

“당시엔 출판이 등록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어요. 암흑시대였죠. 출판사는 알음알음 소개받았는데, 돈이 문제였어요. 한정판 500부를 찍는데 40만원이 들었어요. 월급이 9000원 할 때였으니까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인 거죠. 그래서 책값도 1200원. 커피 한 잔 35~40원 할 시절에. 아무나 살 수 없는 책이었죠.”

-시 쓰는 법대생이었는데 어떻게 외교관이 되었나요.

“법대에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에요. 신학교 다니다 적성에 안 맞아 성균관대 영문과로 편입했는데, 먹고살기도 어려운 집안이라 도저히 등록금 낼 방법이 없어 다시 서울대로 갔죠. 서울대 등록금은 사립의 3분의 1이었으니. 그러다 친구들은 전부 사법시험 공부한다고 절에 가고, 캠퍼스에 사람이 없었어요. 사법시험만 시험이냐 싶어서 난 외무고시 시험을 봤죠. 두 달 공부해서 합격했어요.”

-외교관 생활은 일본에서 시작했더군요.

“지금은 일본이 선호 지역이라는데 그땐 아니었어요. 조총련계가 워낙 셌던 시절이라 술집에서 한국말도 못했어요. 일본에서 한국어 쓰면 조총련이 잡아간다고 반공 교육까지 시켰거든요. 그래서 하네다 공항에 내려서 아내랑 서로 영어로 대화했어요(웃음).”

-주 나이지리아 대사를 역임할 때 아프리카 여행기를 쓰셨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근무는 어땠나요.

“풍토병이 굉장히 위험하죠. 악성 습진 같은 피부병에 걸려 최근까지 고생했어요. 온몸에 비늘이 생긴 듯 가렵고. 재외공관장 초청 만찬을 가면 대통령이랑 악수해야 하는데 정말 곤란하더라고요. 손등까지 피부병이 다 덮여 있으니. 멀쩡한 손가락 몇 개만 내밀어서 악수했죠.”

-그럼 총 몇 개 언어를 구사하는 건가요.

“영어랑 일본어는 불편함 없이 쓰고요. 신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기 때문에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는 쉽게 익혔어요. 칠십 넘어서는 중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 연세에?

“표현이 굉장히 풍부해서 시를 쓰기에 참 좋은 언어더라고요. 또 고전의 중국어와 현대 중국어가 워낙 달라서 현대 중국어만 배운 사람은 고전을 읽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 ‘장미의 이름’은 어떻게 번역하게 된 건가요.

“바레인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할 때인데, ‘장미의 이름’ 영어판을 읽고 ‘이 책이다’ 싶었죠. 당시 알고 지내던 출판사 사장에게 번역료 안 받아도 되니까 출판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나중엔 ‘장미의 이름’을 놓고 두 출판사가 서로 출판하겠다고 싸움이 붙기도 했고.”

-결국 이윤기 번역본만 살아남았습니다.

“섭섭했지만 할 수 없죠. 그전까진 판권이 없어도 번역할 수 있었지만,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지식재산권협정이 발효되고부터는 판권을 사야 출판할 수 있었으니까. 소설 안에 아랍어, 프로방스어, 독일어가 섞여 있어서 번역하느라 고생 엄청 했는데.”

-또 어떤 책들을 번역했나요.

“‘반지의 제왕'. 당시엔 ‘꼬마 호비트의 모험’과 ‘마술 반지’라는 제목으로 나왔죠. 성바오로출판사라고 수녀님들이 하는 출판사에서 저한테 번역을 의뢰하길래 제가 신신당부했어요. 외국에 가서라도 번역을 계속할 테니 지식재산권협정이 발효되기 전에 이 판권을 잡아라. 그렇지만 결국 다른 출판사에 뺏겼죠.”

그는 지난해 등단 50주년을 맞아 ‘얼빠진 세상’과 ‘얼빠진 시대’라는 풍자 시집을 출간했다. ‘개 같은 대통령들' ’개만도 못한 대통령들’ ‘개보다 더한 대통령들’이라는 시가 연이어 실렸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대통령들을 가리지 않고 비판했다. “개처럼 생긴 지도자들을 보고 모두 웃는다./허리를 잡고 웃어댄다./그런 지도자를 모시는 자기 자신이/개만도 못하다는 사실에 절망하기 때문이다.”

-표현이 상당히 직설적인데 반응은 어땠나요.

“화제가 되면 시집이 엄청나게 팔릴 거라 기대했는데 일주일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어 실망했죠(웃음). 대통령들이 구체적으로 누군지 쓰지 않아서 그런가.”

-지금 대통령으로 다시 시를 쓴다면요?

“글쎄요. 상대할 가치가 없어서….”

-시집 말고는 고전을 많이 번역했더라고요.

“톨스토이가 쓴 복음서를 번역했고요. 성경 읽을 때 도움 될 만한 고대 문서들을 모아 ‘제2의 성서’라는 책도 냈어요. 성경이 교과서라면 ‘제2의 성서’는 참고서 같은 책이죠. 출판사를 해보니 좋은 책 내고 싶은 사람은 돈이 없고, 돈 있는 사람은 좋은 책에 관심이 없더군요.”

-좋은 책의 기준이 있나요.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책. 베스트셀러는 나한테 의미가 없어요. 많은 사람이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고.”

-은퇴 후 인생을 고민하는 분들께 조언하신다면.

“각자에게 운명의 길이 있다고 믿어요. 저는 어쩌다 외교관의 길로 잘못 들어섰죠. 지금 누가 100평짜리 집을 지어준대도 내겐 책에 둘러싸인 이 집이 딱 좋아요. 각자 자기한테 맞는 길 찾아가면 그게 천국이고 행복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