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흑인 대학과 협력해 전국에 학습 허브 100여 곳을 설립하는 등 인종차별 해소를 위해 1억달러(약 1100억원)를 투자하겠다.”

지난 1월 새해 벽두부터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발표한 건 애플카(car)도, 신형 아이폰도 아닌 ‘ESG’ 경영 방안이었다. ESG는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앞 글자를 딴 말로, 기업의 비(非)재무적 성과를 평가하는 지표다. 최근 전 세계 글로벌 그룹 리더들의 발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국내 상황도 다르지 않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최근 인스타그램에 “4월 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이마트 성수점과 주변에서 플로깅을 실천했다”며 글과 사진을 올렸다. 플로깅(Plogging)은 줍다(Pick up)와 조깅(Jogging)을 합친 단어로 주변을 산책하거나 조깅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환경보호 활동이다. 정 부회장은 “요즘 화두인 ESG 경영도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게 아니라 작은 실천을 모으는 일”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 SK텔레콤 등 SK그룹 계열사 8곳은 올해 초 한국 최초로 ‘RE100′에 가입했다. 재생에너지 100%를 뜻하는 RE100은 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만들어진 전력으로 조달하겠다는 것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20일에도 ‘아시아판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보아오포럼에서 “ESG는 ‘있으면 좋은’ 선택이 아니라 최소 요구 조건이자 기업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했다.

기업들은 ESG위원회 등 사내 전담기구도 앞다퉈 설치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3월 국내 게임사 중 처음으로 ‘ESG위원회’를 신설하고, 2인자인 윤송이 최고전략책임자(CSO)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도대체 ESG가 뭐길래, 팀쿡부터 최태원·정용진·윤송이까지 앞다퉈 뛰어드는 걸까.

◇17년 전 탄생한 ESG, 왜 지금 급부상했나

ESG는 2004년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이 전 세계 50여 명의 CEO에게 보낸 편지에서 출발했다. 당시 아난 사무총장은 ‘지속 가능한 투자를 위한 지침을 개발해 달라’고 했고, 여기에 응답한 CEO들이 만든 기준이 ‘ESG’로 발전했다. 과거에는 기업을 평가할 때 해당 기업이 환경을 오염시키든, 아동 노동자를 착취하든 개의치 않았다. 얼마나 돈을 잘 버는지를 최우선으로 살폈다. ESG는 다르다. 기업이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고,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지까지 고려해 투자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착한 기업’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17년 전 나온 개념이 왜 지금에서야 급부상한 것일까.

빅데이터·AI 기반 ESG 평가기관인 지속가능발전소 윤덕찬 대표는 “ESG를 잘하는 회사에 돈이 몰리는 것이 결정적”이라며 “파리기후협약에서 정한 온실가스 감축 등의 목표기한(2030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유럽연합(EU) 등 각국이 기업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 ESG를 잘하는 회사에 돈이 몰리도록 금융 규제를 바꾸고 있다”고 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 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의 가치관도 영향을 미쳤다. MZ세대는 제품이 뛰어난 기업이라 해도, 회장이 직원에게 갑질을 하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면 불매운동을 벌인다.

윤 대표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 등 ESG를 중요 투자 기준으로 삼는 투자사도 크게 늘었다”며 “특히 코로나 상황에서 ESG를 기준으로 한 투자가 기존 시장보다 더 수익이 나면서, ‘ESG가 방향이 착할 뿐 아니라 수익까지 나는구나’를 보여줬다”고 했다.

이런 세계적 흐름에 따라 국내 기업들도 ‘기업 경영에 ESG를 추구하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지난 16일 포스코강판은 24년 만에 미얀마 군부 기업인 미얀마경제지주사(MEHL)와의 합작회사 관계를 종료했다. 네덜란드 공적연금(APG) 등 여러 투자 단체에서 이 관계를 통해 미얀마 군부 정권에 자금이 흘러들어 간다고 보고 우려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사회공헌으로 ‘ESG 세탁’?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 ‘ESG’라고 소개하는 내용을 가만히 보면 왠지 낯익다. ‘청소년 대상 금융 교육, 어린이 교통안전 캠페인, 중고 물품 기부, 이재민 지원···.’ ESG만 떼고 보면 과거 사회 공헌 활동에서 이름만 바뀐 경우가 많다. 이른바 ‘ESG 세탁(washing)’이다.

윤 대표는 “ESG를 항목으로 따진다면 그중에 분명히 사회 공헌 활동도 있긴 하지만, 그 비율은 0.1% 정도일 것”이라며 “사회 공헌 부분이 있다고 ESG 경영이라고 하는 건 그야말로 ESG를 오용한 것”이라고 했다.

사회 공헌 활동을 많이 하더라도 해당 기업 CEO가 갑질을 하거나 산업재해 등이 많이 발생한다면, 그 기업은 ESG 경영을 하는 게 아니다. 또 해당 사회 공헌 활동이 ESG 측면에서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연말 연탄 나눔 봉사의 경우 전통적인 사회 공헌 활동이지만, ESG 측면에서는 다를 수 있다. 온실가스와 대기오염 물질을 다량으로 배출하는 연탄은 환경적(E) 측면에서 옳지 않고, 만약 직원들이 강제로 봉사에 동원됐다면 사회적(S)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업이 자신들이 하는 사회 공헌 활동을 소개하면서, 마치 ESG 경영을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세탁’이라는 것이다.

준법경영 전문가인 조창훈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쓰레기 줍기도 좋지만 쓰레기가 나오지 않게 재활용 사업을 운영하거나, 쓰레기도 자원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게 ESG”라면서 “우후죽순 생기는 ESG위원회도 지속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다면 결국 외부 평가를 위한 형식적인 자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가짜 전문가 전성시대?

기업도 나름의 속사정이 있다. ESG가 눈에 보이는 지표가 아닌 데다, 기관마다 평가 방식도 달라 이를 구현하는데 애를 먹는다.

지난 2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업 10곳 중 3곳(29.7%) 가까이는 ‘ESG의 모호한 범위와 개념 때문에 경영전략을 수립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500대 기업 법무팀에 근무하는 A씨는 “지난해부터 CEO가 ESG를 강조하면서 팀별로 외부 전문가가 진행하는 강의도 듣고 있지만 ‘ESG가 뭐냐’고 물었을 때 선뜻 답할 수 있는 직원은 드물 것”이라고 했다.

현재 국내외에 ESG 관련 600여 개의 평가지표가 난립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평가기관마다 세부 항목·내용이 달라 동일 기업에 대해 다른 평가가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해외 ESG 지표는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 문화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를 국내에 그대로 들여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미국 등에서는 ESG를 평가할 때 ‘인종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한국은 이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다. 또 이른바 ‘재벌’ 등 지배구조에서도 외국과 차이가 있다.

최근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노린 ‘ESG 비즈니스’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ESG’를 검색하면 기업을 대상으로 ESG 강의를 한다거나, 컨설팅을 해준다는 글이 넘쳐난다. 조 교수는 “아직 국내에서 ESG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나 법 체계 등이 자리 잡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비즈니스(사업) 측면에서 뛰어들고 있다”며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가짜 전문가 전성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했다.

윤 대표는 “사회적으로 ESG에 관심이 많아진 건 좋은 일”이라면서도 “결국 기업이 외부 평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ESG를 왜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목적과 방향을 봐야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