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가게 직원 폭행 혐의를 받는 주한 벨기에 대사 부인을 향한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한남동 의류 매장에서 직원의 뺨을 때린 혐의로 벨기에 대사 부인 A씨를 입건했다고 지난 15일 밝혔다. A씨는 계산하지 않고 매장 옷을 입고 나갔다고 착각한 직원에게 화가 나 직원을 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인 직원은 당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폭행을 당했을 때는 A씨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당당해 보이고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고 했다.
벨기에 대사 부인이 손찌검까지 하고도 당당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외교관과 그 가족은 면책특권 대상이기 때문에 혐의가 인정돼도 형사처벌이 어렵기 때문이다.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파견된 외교사절과 그 가족은 체포나 구금을 당하지 않고 형사재판 관할권으로부터 면제된다. 이 때문에 외교사절과 가족의 범죄는 대부분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된다.
그러나 사건 이후 A씨가 옷가게에서 신발을 신은 채 흰 바지를 입는 상식 밖의 행동이 공개되고, 벨기에 대사관이 성의 없는 ‘반말 사과문’까지 올리면서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면책특권을 이유로 사적 영역에서의 일탈까지 눈감아줘야 하는지 논란이 불거졌다. 벨기에 대사 부인을 우리나라 혹은 자국인 벨기에에서라도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국내에서 처벌하려면?
우선 국내법에 따라 처벌하려면, 벨기에 정부에서 면책특권을 포기하면 된다. 빈 협약 32조에선 외교관을 보낸 파견국은 “재판 관할권의 면제를 포기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면책특권은 양국 간 우호를 증진하고 외교관 업무 수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지 개인의 사적 영역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면서 “빈 협약 41조의 국내 법령 준수 의무와도 상충하기 때문에 만약 벨기에 대사 부인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벨기에에 면책특권 포기를 요구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외교관의 면책특권은 국가의 주요 권리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외교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주한 외교사절 관련 사건·사고 중 파견국이 면책특권을 포기해 처벌로 이어진 사례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외교부는 상대국에 면책특권 포기를 요구할 순 없느냐는 질문에 “외교관의 특권 면제는 파견국의 권리로, 면책특권 포기 또한 파견국의 판단에 따른다”고 답했다.
불과 얼마 전, 뉴질랜드에서 우리나라 정부에 면책특권 포기를 요구했으나 거절한 전례도 있다. 지난해 뉴질랜드 법원은 2017년 주뉴질랜드 한국 대사관에 근무할 당시 남자 직원을 수차례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한국 외교관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직접 항의하기도 했다. 뉴질랜드 측은 공관과 직원 조사를 위한 면책특권 포기를 요청했으나,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은 “면책특권은 주권 국가가 갖고 있는 핵심 권리다. 면책특권 포기는 엄중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벨기에 부인의 폭행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순 있다. 빈 협약에 따르면 외교관과 그 가족이 공적 직무 이외로 행한 직업적·상업적 활동에 관한 민사 소송은 면제를 받지 못한다. 승재현 연구위원은 “민사 소송이 가능할 순 있지만 소송 비용과 재판 기간, 강제 집행의 어려움을 고려하면 합의를 통해 사과와 충분한 배상을 받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면책특권, 이러라고 만든 게 아닌데...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실이 외교부에 요청해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6년부터 2021년 3월까지 주한 외국공관원 사건·사고 발생 건수는 총 69건이었다. 연도별로는 2016년 16건, 2017년 11건, 2018년 14건, 2019년 13건, 2020년 11건, 2021년 3월까지 4건으로 한 달에 한 번꼴로 일어나고 있다.
이 중 대부분은 교통사고나 소액 절도 등이며 강력범죄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올해 초에도 주한 파키스탄 대사관 직원들이 이태원의 한 마트에서 모자·초콜릿 등을 몰래 훔쳐갔다 경찰에 잡힌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외교부는 “보통은 해당 공관 대사를 초치해 외교적 항의를 전달하는 등 사안별·단계별로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다”면서 “다수의 경우엔 본국으로부터 조기 소환돼 자국 법령에 따라 조치된다”고 했다.
해외에서도 외교관이나 그 가족이 일으킨 범죄로 면책특권이 도마에 오른 경우가 종종 있다. 2019년에는 앤 사쿨러스 미국 외교관 부인이 영국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자국으로 도망가 영국 국민의 공분을 샀다. 사쿨러스는 SUV를 몰고 역주행하다 오토바이에 탄 10대 청년을 치어 숨지게 했다. 영국 검찰은 미국 정부에 범죄인 인도 요청을 했지만, 미 국무부는 공군 기지 직원과 가족에게 부여되는 양국 협정상의 면책특권을 내세워 논란이 됐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외교 면책특권을 이런 목적으로 이용하는 건 옳지 않다”면서 “사쿨러스는 영국으로 돌아와 이 나라의 법 절차에 따르라”고 강력히 대응했다. 합의 끝에 양국은 앞으로 영국 내 미 공군 기지 직원의 가족이 형사 기소될 경우 면책특권을 부여하지 않기로 협정을 개정했다. 유가족이 미 연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사쿨러스 부인은 미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빈 협약에 규정된 면책특권을 수정할 순 없을까. 루마니아 대사를 지낸 임한택 한국외대 LD학부 교수는 “빈 협약의 재판 관할권 면제는 외교관이나 그 가족이 피해를 받았을 때를 가정한 것이지, 가해자일 경우에 면책특권을 이용하는 건 남용이며 협약상의 맹점이라고 본다”면서 “하지만 전 세계 192국이 가입해 있는 다자협약을 고치는 건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 했다.
벨기에 대사 측은 26일 외교부에 전화해 부인 A씨가 조만간 경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을 것이라 알려왔다. 임 교수는 “법적 처벌보다는 수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관계와 피해자가 원하는 사과나 충분한 보상을 상대국에 전달해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면서 “벨기에 측에서도 국가 이미지에 막대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요구를 전한다면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