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합(UN) ’2021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95국 중 50위. ‘행복 후진국’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안과 우울에 허덕이는 한국 사람들에게 촌철살인 ‘팩트 폭격’ 날리는 푸른 눈의 젊은이가 화제다.
밥 먹듯 자책하는 이들을 향해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 싫어도 평생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요? 나 자신이에요.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불평 가득한 직장인에겐 정곡을 찌른다. “지금 회사를 선택한 사람이 누군가요. ‘나’입니다. 불평, 불만은 자기 보호 메커니즘이에요. 능력 부족을 인정하기 싫어서 일 탓, 상사 탓하는 것 아닌가요.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니 스스로 불쌍히 여기며 징징대는 것 아닌가요.”
가슴 뜨끔해지는 날카로운 말을 쏟아낸다. 그것도 유창한 한국말로! ‘의식 성장 코치’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독일인 알렉스 룽구(34).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구독자만 23만명이 넘는다. 최근 직접 한국어로 쓴 책(‘의미 있는 삶을 위하여’)은 자기계발서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색목인(色目人) 인생 스승’이란 애칭이 나올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왜 그의 말에 사람들이 위로받는 걸까.
한국인 아내 일 때문에 전남 무안과 서울을 오가며 지내는 그를 최근 서울 덕수궁에서 만났다. 구한말 서양 신사가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듯, 봄날의 고궁으로 클래식 슈트를 입은 그가 걸어 들어왔다.
◇韓 회사서 전략 짜다 인생 조력자로
-의식 성장 코치가 정확히 뭔가.
“코치라고 하면 인생의 정답을 알려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맞는 길을 발견하게끔 도와주고, 인생의 장애물을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지 가르쳐 주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조력자) 역할을 한다.”
-외국인이 한국말로 자아 성장을 가르친다는 것이 신기하다. 언제부터 이 일을 했나.
“대학(함부르크대 한국학·경영학 전공) 졸업 후 독일의 벤처 캐피털 회사에서 잠깐 근무했다. 2013년 한국으로 건너와 독일계 회사인 ‘푸마’ 한국 지사에서 일했다. 전략 기획 담당으로 업무 보고 시스템을 만들었다.”
-지금 일과는 무관하지 않나.
“당시 회사 전체의 보고 프로세스를 살펴봐야 했다. 한국인 동료와 대화할 기회가 많았는데 다들 무기력에 빠져 있더라. 나 역시 회사에선 인정받았는데 공허함이 밀려왔다. 원인이 궁금했다. 현미경으로 벌레 들여다보듯 내 마음을 구석구석 탐색하고 해부했다. 각종 서적을 뒤지면서 ‘코칭’을 스스로에게 적용해 봤다. 그러다 깨달았다. 불안, 강박을 만드는 현행범은 바로 나 자신이란 걸. 이 깨달음을 나누고 싶어 ‘(라이프) 코치’의 길을 걷게 됐다.” 한국코치협회 코치 인증을 받고, 로버트 프리츠·피터 랄스턴 등 미국 자기 계발 전문가의 가르침을 받았다.
-인생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 것 아닌가.
“전공을 살려 한국에서 ‘마케팅 매니저’를 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인생 매니저’가 됐다(웃음).”
◇한국 시트콤, 인생을 바꾸다
-한국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고향은 독일의 소도시 라슈타트. 어렸을 때 일본 만화를 좋아해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열일곱 살 때 아리랑 TV를 통해 시트콤 ‘뉴논스톱’을 보고 문화 충격을 받았다. 가게에서 할인해 달라고 떼쓰다가 뜻대로 안 되니 바닥에 누워 버리다니! 독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거침없이 감정을 쏟아내는데 뭔가 가슴이 뻥 뚫리더라. 그때부터 한국에 빠졌다. 독일어로 된 한국어 교재가 딱 하나밖에 없던 시절이다. 역사 수업이 너무 지루했는데 그 시간마다 몰래 한국어 단어를 외웠다. 친구들은 역사 선생님 덕에 내가 한국어를 마스터한 거니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웃음).”
고교 졸업 후 입대를 연기하고 2005년 서울대 어학당에서 5개월간 한국어를 배웠다. 함부르크대 재학 중 한국국제교류재단 장학금을 받아 다시 서강대 어학당에 왔다.
-영상을 보면 ‘더빙 아닌가’란 댓글이 있을 정도로 한국어 능력이 놀랍다는 반응이 많더라. 비결이 뭔가.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이 외국어 공부엔 안 통한다고 본다. 백 번 찍어야 소용없다. 날카롭게 간 도끼로 한 번 제대로 찍어 넘어가게 해야 한다. 큰 원칙을 알고 거기에 맞춰 작은 것을 채워야 한다는 얘기다. 독일어, 불어, 영어, 루마니아어 등 여러 언어를 할 수 있어 ‘형태소론’에 익숙하다. 여기에 근거해 한국어를 배우니 어렵지 않았다. 제일 좋은 외국어 선생님은 사전이다. 예를 들어 ‘completely’라는 단어가 나오면 인터넷 사전으로 검색한다. ‘온전히’ ‘오롯이’ ‘완전히’ 등 여러 단어가 나오면 하나씩 뉘앙스 차이를 들여다본다.”
◇고생·인정 중독… 한국인이 힘들다
2016년 의식성장 학교 ‘하이어셀프’를 세워 6년째 이끌고 있다. 지금까지 300~400여명을 상담했다. 유튜브에 올린 영상 140여개의 총 조회 수는 1600만 회가 넘는다.
-당신 말에 왜 사람들이 귀 기울일까.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이 장점이라고 본다. 아무래도 모국어인 독일어가 직설적인 언어라 거품 없이,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게 말해 좋아하는 것도 같다.”
-외국인, 특히 백인이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건 아닐까.
“신기해서 호기심으로 들어보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다. 하지만 꾸준히 온다는 건 콘텐츠에 진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 아닐까.”
-사람들 고민을 들어 보니 공통점이 있던가.
“문화적으로 ‘고생 중독’ ‘노력 고통’에 시달리는 것 같다. 뭔가 힘들어야 가치가 있다고 믿는 강박이다. 고생했다고 반드시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닌데 자신을 힘들게 채찍질하며 몰아붙이다가 지쳐 포기하곤 한다. 비효율적인 삶의 방식처럼 보인다.”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피해의식이 많다. 그러니 인정 중독에 빠지기 쉽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연인에게 잘 보이려고 계속 카톡하면서 애정을 갈구하듯, 동료나 친구 사이에서도 인정받으려고 기를 쓴다. 가면을 쓰고 멋있는 척하며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렇게 해서 인정을 받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면을 벗고 진짜 나를 드러내야 한다.”
-자존감을 기르라는 얘기 같은데.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인가. 나 자신이다. 가장 잘 알아야 할 사람이 바로 나란 얘기다. 자기 감정에 깊이 들어가 내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관찰해야 한다.”
-내면을 마주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구체적 방법을 추천한다면.
“소개팅을 30분씩 세 번 했다고 상대를 알 수 있을까, 온전한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 몇 년 지나야 겨우 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꾸준히 만나야 하는데 막상 자신과의 대화 시간이 매우 부족하다. ‘관찰 일기’를 추천한다. 소개팅하듯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며 나를 알아가는 것이다. 단, 복근 운동을 사흘 했다고 근육이 생기지 않듯 깨달음엔 시간이 걸린다.”
-나를 관찰하는 게 왜 중요한가.
“‘나'를 ‘소금’이라고 치고, 공동체적 관점에서 ‘삶’이라는 ‘수프’를 만든다고 생각하자. 맛있는 수프를 만들려면 소금을 언제 얼마나 넣느냐가 중요하다. 너무 많이 넣어도 너무 적게 넣어도 안 된다. 즉, 자만에 빠져 나를 너무 드러내도, 쑥스러워 나를 너무 숨겨도 안 된다. 자기 관찰을 통해 내가 지닌 짠맛의 강도는 어느 정도인지, 내가 소금이면서 후추인 척 사는 건 아닌지 봐야 한다.”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에 신경 쓰지 ‘무엇을 하기 위한 자유(freedom to)’는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로부터 일시적 도피가 우선이니 다시 문제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인생의 요요 현상’을 반복하게 된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독일 병정처럼 빈틈없어 보이는 그가 늘 가지고 다닌다는 스토아학파 기념 동전을 보여줬다. 한 면엔 ‘최고선(Summum Bonum)’이란 글자가, 다른 면엔 ‘올바른 일을 하라,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는 “20대의 내가 선택한 ‘올바른 일’은 한국에 오는 것이었다”며 “직관에 따라 단순하게 살수록 삶은 부드럽게 흐르더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