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인제군보건소장이 된 허준용 고대구로병원 명예교수는 "대학병원에선 15만원쯤 내야 하는 검사들을 1500원에 해 드리니 산타클로스가 된 기분"이라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기자

“골다공증 주사인가? 그거 때문에 왔는데…. 우리 딸이 예약했다고 했어요.”

지난 18일, 강원도 인제군보건소. 75세 할머니가 딸이 예약해준 골다공증 검사를 받으러 왔다. 허준용(66) 보건소장이 평소 복용하는 약을 확인하며 처방전이 있느냐 묻자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이 안에 딸이 보내준 처방전이 있을 텐데….” 허 소장은 간호사와 함께 할머니의 휴대전화 속 처방전을 찾기 시작했다. “아, 지금도 관절 약을 드시고 계시는군요. 꼭 필요한 약만 복용하고 우유랑 두부를 많이 드시는 게 좋아요.”

인제군보건소 문 앞에는 ‘여성의학과 개소’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었다. 허준용 전 고려대 구로병원 산부인과 교수가 정년 퇴임하고 지난 3월 이곳 보건소장으로 취임하면서 보건소 개소 이래 처음으로 여성의학과가 생겼다. 허 소장은 고려대 구로병원 산부인과 과장, 대한산부인과학회 자궁내막증 연구회장 등을 지낸 산부인과계 권위자. 보건소장을 뽑는 개방형 직위 공모에 그가 지원하자 인제군은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암 조기 발견을 위한 최신 초음파 정밀 기기까지 지원했다.

허 소장은 등산을 하러 다니던 2005년부터 인제군 주민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동네 주민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 소장은 “처음엔 인제에 있는 병원에 갔다가 춘천 병원으로 옮기면서 시간을 지체하다 결국 돌아가셨다더라”며 안타까워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도시였다면 119가 와서 30분 내로 큰 병원 응급실에 데려갔을 거고 충분히 살 수 있었을 텐데 싶더라고요. 인제군의 응급의료 전달 체계가 취약하다는 걸 체감했죠.”

몇 년 전엔 함께 의료봉사하던 인제군 간호사가 자궁암 2기 진단을 받았다며 도움을 청했다. 허 소장은 “춘천의 큰 병원까지 검사받으러 가야 되니까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수술하기 어려운 상태까지 악화가 됐더라”면서 “가까운 보건소에서 조기에 암을 발견하면 쉽게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다가 퇴직 후에 인제군보건소장 공모를 보고 지원했다”고 말했다.

소장으로 온 지 두 달 반이 됐는데 “업무량이 초기보다 30%는 늘었다”고 한다. 코로나 선별 검사에 접종 업무까지 겹쳐서 보건소 직원들이 모두 지친 상태. 이날도 백신 접종을 기다리는 주민들을 안내하느라 오전이 다 갔다. “몇 주 전엔 확진자가 나타나서 보름 동안 쉬지도 못하고 일했어요.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하면 접종이 계속될 수도 있는데 인력 충원이 절실합니다.”

18일 허준용 인제군보건소장이 여성의학과 진료실에서 환자와 상담하고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의료 취약지로 내려가는 의사들

국내 의료계를 이끌어온 명의들이 은퇴 후 지역사회 보건소장으로 내려가 눈길을 끈다. 앞서 지난 2월엔 국내 위암 치료의 권위자인 권성준 전 한양대병원장이 강원도 양양군 보건소장으로 임용됐다. 이어서 인제군에서도 산부인과 허준용 교수를 뽑더니, 홍천군에서도 의사 면허 소지자·경력자를 대상으로 보건소장 공모에 나섰다.

강원도 양양·인제는 대표적인 의료 취약 지역으로 꼽힌다. 지난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는 평균 2.08명. 전국 시·군·구 250곳 중 1위인 서울 종로구는 16.29명에 달했고 대구 중구(14.66명), 부산 서구(12.67명)도 10명이 넘었다. 반면 강원 양양군은 0.47명, 강원 인제군은 0.67명으로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1명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허 소장은 “대학병원에서 진료할 때보다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의사로선 최고 수준까지 갔으니 나름대로 자부심은 있었지만, 마트에서 물건 사듯이 의료 용역을 사고파는 듯한 병원이 삭막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땐 환자 한 명당 2~3분씩 봐도 시간이 모자랐는데, 여기선 20~30분씩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대화도 나눌 수 있고요.” 그는 요즘 충북 영동군의 시골 의사였던 아버지가 자주 떠오른다고도 했다. “젊었을 땐 병원 차려주는 친구네 아버지가 그렇게 부러웠거든요(웃음). 나이 들고 나서야 산골에서 가져온 감자, 고구마로 치료비를 대신 받던 우리 아버지가 의사로서 괜찮은 인생을 사셨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경남 함양군에서도 지난 3월 건국대 충주병원 산부인과장, 진료부장을 거쳐 병원장까지 지낸 정두용(67) 의사를 보건소 전문의로 영입했다. 정 의사는 매주 화·수·목 오후면 보건소 ‘메디컬버스’를 타고 의료 혜택이 닿지 않는 동네를 찾아가 진료한다. 정 의사는 “보통 버스로 30분 걸리는 오지 마을에 가서 어르신들 아픈 곳이나 걱정거리를 들어주고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농촌에서 밭일을 많이 하시니까 허리나 어깨, 무릎 아프신 분이 많아서 간단한 물리치료를 해 드리고요. 고혈압·당뇨 있는 분들은 갈 때마다 혈압·혈당 체크도 하고요.”

메디컬버스를 타지 않는 날은 산모들도 진료한다. “큰 병원에 가려면 진주나 대구까지 나가야 하는데 최소 한 시간에서 두 시간까지 걸리거든요. 헛걸음하지 않게 초음파 검사와 간단한 진료는 여기서 하고 안심시켜 드리기도 하죠. 추가 진료가 필요한 경우에만 큰 병원 가라고 말씀드리고요.” 그는 “처음엔 함양 내려간다고 하니까 황당하다는 반응도 있었는데, 등산도 좋아하고 이곳 공기도 맑아서 노후 생활 하기에 좋다”고 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나 인생의 목표가 다르겠죠. 하지만 보통 의사들은 그동안 사회에서 많은 혜택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제 받은 걸 주위 사람들한테 나눠주는 것도 노후를 보내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원보건소장으로 취임 후 방문 간호사와 함께 진료를 나간 이종철 전 삼성의료원장. /창원보건소

◇“사회에서 받은 혜택 나누겠다”

대한의사협회에서도 부족한 공공의료 인력을 채우기 위해 은퇴한 의사들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전국 60세 이상 의사협회 회원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 2328명 중 ‘은퇴 후 보건소·보건지소·지방의료원 등 공공기관에서 근무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의사는 58.1%였다. 희망 근무 지역은 서울과 경기가 22.7%, 18.1%로 다수였지만 ‘지역은 상관없다’는 답도 16%였다.

이종철(72) 전 삼성의료원장은 은퇴 후 고향인 경남 창원으로 내려가 2018년 창원보건소장으로 재취업했다. 퇴직한 다음 해 미국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이 소장은 “홀로 사는 노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 민간 의료에서 소외된 계층에도 의료 혜택이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웠다”면서 “우리나라 지방 보건소를 공공의료의 좋은 모델로 만들어보고 싶어서 보건학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지역 대학병원과 요양병원 의사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보건소 치매안심센터에 나와 진료를 볼 수 있도록 민간·공공 의료 간 협업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보건소의 치매안심센터가 환자를 등록하고 관리만 할 게 아니라 1차 의료기관으로서 초기 단계에서 도움 주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의사들도 막상 나와보면 좋아해요. 대학병원에서 매번 중증 환자만 보다가, 보건소에서 경증일 때 병을 찾아내고 도움을 줘서 환자가 나아지면 또 다른 보람을 느끼죠.”

이종철 소장은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은퇴 후 민간 병원에 가면 돈을 더 벌지 않느냐 물었더니 “그렇게 돈 벌어서 뭐하게요?”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 마지막에 죽을 때 그 돈 다 싸들고 갈 거예요? 저는 ‘봉사’라고도 생각 안 합니다. 그동안 사회에서 받은 게 너무 많은데, 나이 들어서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맡은 건 감사한 일이죠.” 이 소장은 지역 간 의료 격차에 대해 “군 복무를 대체하는 공중보건의 제도도 취지는 좋았지만, 지역 보건소 의료시설이 열악해 우수 인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진료 여건부터 개선하고 합리적 대우를 해준다면 지방에서 근무하려는 의사들도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