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정치인 아니고 생활인이에요, 생활인. ‘미스터 트롯’에 푹 빠져 살았다니까요, 호호!”
강금실(64) 변호사는 매주 화요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작은 한옥으로 출근한다. 그가 대표로 있는 재단법인 ‘지구와 사람’의 업무를 보기 위해서다. 2000년대 잠시 몸담았던 정치판을 떠난 뒤, 그는 생명과 지구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2013년에는 생명문화를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았고, 2015년부터는 생태문명을 모색하는 모임인 ‘지구와 사람’을 설립해 생명과 생태학, 지구법 등을 연구한다. 이 단체에는 현재 회원이 100여명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강 변호사는 대한민국 여성들 앞에 가로놓인 유리 천장을 뚫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스물네 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가 됐다. 여성 최초로 재경 지역 형사단독판사가 됐고, 2003년 법무장관 자리에 올랐다. 대한민국 검찰 인사를 책임졌고, 사법연수원 10기수 선배인 검찰총장을 지휘했다. 여성계 숙원이었던 호주제 폐지도 그가 법무장관이었을 때 이뤄졌다.
엄숙과 권위로 대표되는 자리에서 그는 많은 화제를 몰고 다녔다. 국회 법사위 회의장에서 “코미디야 코미디, 호호호!”라고 했다가 사과했고, 핑크빛 투피스 차림에 보랏빛 스카프를 두르고 나타나 이목을 끌었다. 큰 귀걸이에 짧은 치마 정장을 입은 법무장관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60줄에 다시 만난 그는 “내가 좀 자제해야 했던 것 같다. 너무 나간 게 아니었다 싶다”며 웃었다.
법무장관에서 내려온 뒤, 2006년 사상 첫 여성 서울시장에도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가 사실상 정치판을 떠났다. 강 전 장관은 “한 번도 내가 정치를 하고 싶어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정치라는 옷이 내 몸에 맞지 않았다”고 했다.
강 전 장관은 현재 4개의 단체를 이끌고 있다. 지구와 사람 외에 로펌(법무법인 원) 대표로 생업을 해결하고, 사단법인 ‘선’의 이사장으로 아동·청소년·청년을 상대로 한 법률 지원 등의 공익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해 3월부터는 강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도 일한다.
그는 왜 정치판을 떠나 생명 공부에 빠진 걸까. 지난 11일 청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온 강 전 장관은 여전히 유쾌하고 발랄했다. “아침에 화장하는 것을 잊고 출근했다. 내가 노년에 접어들었다고 꼭 써달라”며 웃던 그는, 인터뷰 초입부터 ‘미스터 트롯'을 극찬했다.
◇정치가 답답해 시작한 생태·지구 공부
-로펌도 운영하면서 생명 공부까지 하면 매일이 힘들지 않나.
“머리가 바쁘지, 몸은 거의 집에서 TV 보는 게 일이다. 최근까지는 TV조선 ‘미스터 트롯’에 푹 빠졌었다. ‘뽕숭아 학당’ ‘사랑의 콜센타’까지 전부 다 본다. ‘미스터 트롯'은 대단히 잘 만든 프로그램이다. 삶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꾼 프로다. 출연자들의 경쟁이 아니라 서로 감싸주는 우정을 보여줬다. 남성의 세대교체를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결승 진출자 6명이 보여준 남성상이 기존 ‘아저씨’로 대표되는 이미지와 전혀 다르지 않나. 가부장적이지 않고, 사교적이고, 예의 바르고, 겸손하고, 밝고, 열심히 산다. 톱6가 남성상을 멋지게 바꿔놨다.”
-어쩌다 생명 공부에 빠져들었나.
“인간이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 공부하고 있다. 한번 들어봐라. 지구 상의 생명체가 처음엔 단세포 생물에서 출현했는데, 노폐물을 엄청나게 발생시켜서 망하게 생겼다. 그때 식물들이 광합성을 하면서 돌파구가 마련돼 되살아났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다. 지구가 인류의 무분별한 개발로 망하게 생겼다. 지구 전체에서 사람이 차지했던 면적이 1900년대에는 14%였는데, 지금은 77%가 넘는다. 인구는 20억여 명에서 70억여 명까지 오는 데 50년밖에 안 걸렸다. ‘거대한 가속(Great Acceleration).’ 20세기 초중반, 지난 70년 사이에 세상이 너무나 바뀌었다. 고대·중세·근세 어디를 봐도 이런 적이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건지는 명확하다. 생태학은 산업 문명에 결함이 있다고 보는 거다. 그 결함이 나타난 것이 기후변화와 폐기물 문제다. 새로운 방식의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다.”
-돌파구가 있긴 한가.
“다른 생물과 달리 인간은 질문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질문을 하면서 가장 타당한 공동체 방식을 찾는다. 이를 위해 법과 정치가 있어야 하고, 도덕·윤리가 필요하다. 현재 지구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지구법이다. 지구법에서는 인간뿐 아니라 나무나 강과 같은 자연물도 법과 통치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주체로 본다. 나무와 강도 인간만큼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산업 문명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자는 거다. 황당한 얘기 같지만, 미국과 선진국에서는 민주주의를 좀 더 넓혀서 바이오크라시(정치생태학)를 연구한다. 인간이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말고,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하자는 것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왕거누이라는 강이 법적으로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됐다. 1870년대부터 마오리족은 자신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강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왔고, 뉴질랜드 정부가 강에 법적인 권리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왕거누이 강물을 낭비하거나 오염시키면 법적으로 부족민들을 공격한 것으로 간주해 처벌을 받는다.”
-‘지구와 사람'이란 단체는 무슨 일을 하나.
“처음 단체를 만들 땐 고민이 있었다. 완전하게 학술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아니고, 지식을 기초로 우리 생활을 좀 더 아름답게 가꿔보고 싶었다. 조금씩 길을 찾아가다 보면, 실천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지난 5년은 공부에 매진했다면, 지금부터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태학이나 지구법을 알리고 공유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음 달에는 내가 직접 4개 정도의 온라인 강의를 제작해 볼 생각이다. 얼마 전에 우리 언니한테 설명해 봤는데, 언니가 이해를 잘 못하더라. 그래서 전달 방식을 고민 중이다.”
-생명 공부에 빠진 강금실이 낯설다.
“정치를 하면서 체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13년간 판사로 일했고, 로펌 대표를 하다 법무장관, 서울시장 후보, 민주당 최고위원을 했다. 판사 할 때는 독재 정권 시절이라 심리적 갈등을 겪었고, 법무장관 할 때는 권력의 갈등을 체험하면서, 근본적으로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와 야, 보수와 진보 모두 근본적인 얘기를 안 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래 자유로운데, 공동체를 만들면 규율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허용되고 안 되는 건지, 어디까지 규율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한쪽은 무조건 자유를 주장하고, 한쪽은 무조건 안 된다는 식으로 논의가 진행됐다. 그런 게 답답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됐을 때 나는 국회 스스로 철회해야 한다고 기자들 앞에서 말했다. 법무장관은 정부의 법률 의견을 내는 자리인데,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국무위원들을 대표해 법적 의견을 밝히기 위해 기자들을 만난 거다. 그런데 야당에서는 정부 각료가 대통령 변호인이냐고 반발했다. 헌법재판에는 법무장관이 의견을 내게 돼 있다. 근본적인 토론 없이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이 무조건 된다 안 된다며 싸움만 했다. 그런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법무장관 되는 게 너무 무서웠다
강금실은 2003년 2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법무장관으로 일했다. 1년 5개월 동안 연공서열을 파괴한 인사를 단행해 반발을 사는 등 검찰과의 불협화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보수 정권에서 민정수석을 지낸 검찰 출신 변호사는 “검찰에 대해 잘 몰랐을 뿐, 비교적 괜찮았던 인물로 기억한다”고 했다. 재임 기간 중 호주제가 폐지됐고, 검사동일체(검사는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명령에 따라 전원이 일체가 되어 활동) 원칙을 삭제하는 등 개혁의 틀을 잡았다는 평가도 받았다.
-정치가 몸에 맞지 않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원래 정치할 마음이 없었다. 나는 공부는 좋아하는데, 실천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는 많이 안 움직이는 사람이다.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로부터도 출마 권유를 받았지만 사양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검찰 개혁이 시대 과제였고, 그것에 동의했다. 여성들을 고려한 점도 있었다. 참여정부는 국무위원 가운데 요직에 여성을 배려하겠다는 철학이 있었다. 시대적 숙제를 감당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했다. 그게 정치인이란 생각은 못 하고. 생각이 짧았던 거다.”
-첫 여성 법무장관이라 세상의 이목이 집중됐다.
“너무 무서웠다. 나는 팀을 꾸리지도 않고, 혼자서 법무부에 갔다. 거의 죽으러 가는 상황이었다. 사생활이 끝났다는 생각, 감당하기 어려운 걸 선택했다는 느낌이었다. 밖에서 보듯 룰루랄라 하면서 간 게 아니다. 낙마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앞서 황산성·손숙 등 여성 장관 들이 있었지만 언론이 가만히 놔두지 않아 큰 활약을 못하고 물러났다. 나도 법무장관 간다고 하니, 말리는 사람들 많더라. ‘빚이 많다’고, ‘이혼했다'고. 검찰도 무서웠다. 경찰관이나 검찰이 부르면 무섭지 않나, 하하!”
-성공한 법무장관이었다고 생각하나.
“검찰의 인사 문제를 개혁하다가 마무리하지 못했으니 성공이라 말하긴 어렵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내가 살아 있으니까, 하하!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노무현 정부 출범하고 보름쯤 지나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를 할 때였다.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을 비롯해 참모들 대부분이 검사와의 대화 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법무장관은 검찰을 관장하고 수습해야 하는 사람인데,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에 직접 나서면 ‘아이(장관)’가 못하니까 ‘엄마(대통령)’가 나선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강행했다. ‘내가 여기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끝나고 나서 TV로 내 모습을 보니 너무나 태연하더라. 다음 날 신문에도 ‘침착했다’ ‘그만의 이미지를 일궈냈다’는 식의 긍정적 반응이 나왔다. (팬)카페도 생기고 난리가 났지. 언론도 많이 감싸줬다. 내 기억에 조선일보도 비교적 우호적이었다(웃음).”
◇‘노 대통령 대선 자금 수사’ 법치 원칙 지켰다
강금실은 변호사 시절이던 2001년 8월, 김훈 소설 ‘칼의 노래’를 읽고 대한변호사회보에 이런 내용의 칼럼을 올린 적 있다. “이순신의 칼은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의미를 물었다. 강금실은 “이순신은 권력 행사를 한 게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한 거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권력이 있으면 모든 사람을 줄 세우고, 모멸감을 주고, 나쁜 짓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장관 시절 짧은 치마, 가방 등 패션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검찰 인사, 한총련 사태 등으로 너무나 바빠 그런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옷은 평소 내 스타일대로 입었다. 당시는 내가 멋을 내는 나이였으니 화려했겠지. 나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면서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더 많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신이 있다. 일단 여성이 남성과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 것은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핸드백도 옷에 맞춰서 바꿔 들었다. 국민들 보기엔 남성 위주의 단일화된 검찰 조직에서 매우 튀는 장관이었을 거다. 그래도 여성이 기존 권력에 맞서 싸운다는 이미지 때문에 더 좋게 봐준 것 같다.”
-법무장관 하면서 이것만은 지키겠다고 마음먹은 게 있었나.
“법치주의다. (노무현 대통령이) 날 법무장관으로 파격 발탁했으니 법치(法治)를 하는 것이 참여정부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소신이 있었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방향을 놓고 원칙을 지키는 데 있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어떤 어려움이었나.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자금 수사가 대표적이다. 대통령을 모시는 참모들이 구속됐고, 청와대가 수사를 받는데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는 정치적인 행동과 법치적인 행동이 겹쳐 있었다. 모두 눈을 빤히 들고, 내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검찰 개혁의 성공은 법치라는 원칙을 지키며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게 궁극적으로 대통령께 좋은 참모라는 믿음이 있었다.”
◇친문의 문자 폭탄은 잘못… 대화와 포용 해야
-2006년 첫 여성 서울시장에 도전해 오세훈 후보에게 득표율 61대27(133만여표 차)로 크게 패했다.
“그때 내가 출마한 건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1위로 나오고, 당의 요청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절을 못 하겠더라. 대중적 인기는 높았지만, 바닥 수준이었던 열린우리당 지지율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때 맞붙었던 오세훈 후보가 15년 후 다시 서울시장이 됐다.
“전혀 예상 못 한 일이다. 잘하는 것 같다. 조용하게, 신중하게. 평판이 좋은 것 같더라.”
-여성 장관으로 유리 천장을 깼지만, 젊은 세대들의 남녀 갈등이 너무 심하다.
“우리 세대는 여성은 소수자로 남성이 우월한 사회를 살았다. 누나는 대학 안 보내고, 아들은 보냈던 세대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 남성들은 학교에 가면 여성들 성적이 좋고, 면접을 봐도 여성이 훨씬 유리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남성들이 오히려 약자의 감수성을 갖고 자신이 소수, 여성이 다수라고 느낀다. 반면에 여성들은 성장할 땐 차별이 없었는데, 서른이 다 돼 사회에 나와 보니 차별을 받는다고 느낀다. 그러니 참지 않는다. 남녀가 서로 차별을 느끼는 지점이 다르다.”
-해법이 있을까.
“대화와 포용이다. 특히 현재 우리 사회엔 의견이 다르더라도 서로 들어주고,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요새 젊은 세대들을 만났더니, 무서워서 말을 못 한다고 하더라. 악성 댓글로 서로 공격하고, 옛날에 네가 뭐 했느니 캐낸다느니 해서 자유롭게 말할 수가 없단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을 인정하는 첫째 요소가 상대방의 발언권을 인정하는 거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발언권을 독점할 수 있다. 나는 장관 할 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권한을 많이 나누고, 최종 결정만 내가 했다. 그런데 지금도 어디 가보면 의사 결정권자 혼자 떠드는 경우가 많다. 발언이 자유롭지 않으면, 그룹을 형성하고 자기네끼리만 모이게 된다. 서로 더 격렬하게 싸우게 된다.”
-그런 면에서 민주당 내 친문 세력의 문자 폭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문자 폭탄을 받는 사람이 그걸 위협적이라고 느끼면 폭력이다. 나는 그게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에 따른 트라우마에서 시작했다고 본다. 특히 진보 진영의 자책감이 컸다. 왜 이분만 역사에 없는 길을 가게 했나라는 죄의식. 그러나 그것을 문자 폭탄 같은 형태로 표출해선 안 된다. 민주주의는 토론을 보장하는 것, 틀린 말을 참고 듣는 것이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한 상황이다. 강자의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민주당 권리당원들끼리도 좀 더 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 정부의 검찰 개혁, 조국-추미애로 이어진 법무장관들은 어떻게 평가하나.
“전직 장관으로 발언하려면 정확한 내용을 알아야 하는데, 뉴스를 적극적으로 안 봐서 내가 그 부분을 잘 알지 못한다. 또 정치를 안 하고 있어서 공개 발언은 조심하고 있다.”
강금실은 과거 ‘춤추는’ 변호사로 유명했다. 실제로 무용과 진학을 고려한 적도 있다. 전통무용가 김수악, 무형문화재 승무 이수자 손경순, 궁중무용의 대가 이흥구 등으로부터 승무(僧舞)와 살풀이를 배우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춤을 춘다. 운동을 대신해 승무를 춘다고 했다.
“열 살 때 펄시스터즈와 김추자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췄어요. 대학 땐 남녀가 고고춤을 추는 고고미팅에서 제일 열심히 췄다고 해서 상도 받고요. 요즘은 그런 문화가 없지만. 참, 내가 ‘미스터 트롯'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가 있는데 궁금하지 않나요? ‘미스터 트롯'만을 주제로 인터뷰할 수도 있어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