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25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을 전남 신안·무안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했을 때 조순형 당시 민주당 의원이 거세게 비판했다. “홍업씨는 실형 선고를 받고 사면된 지 얼마 안 된 처지인데 스스로 근신하고 자제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라.” 조순형은 2004년에도 자신이 일등 공신 되어 배출한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선거 중립 위반과 측근 비리를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하겠다”며 정면으로 맞섰다. 논객 강준만 교수는 “정치인 대부분이 자기 세력 구축을 위해 정실주의의 포로가 되는 현실에서 조순형은 단연 돋보인다. 다른 정치인들에겐 상례화된 자기 모순이 없어 늘 당당하다”면서도 “정실주의를 인간미로 포장하는 대한민국에서 조순형이 설 땅이 넓을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30년 정치 역정에 원칙과 소신을 고집해 ‘미스터 클린’ ‘미스터 쓴소리’로 불려온 조순형(86) 전 국회의원. 그에겐 부창부수(夫唱婦隨), 아니 더욱 ‘강성’인 아내가 있다. 1960~80년대 국립극단, 극단 ‘자유'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하며 ‘산불’ ‘바꼬지’ ‘따라지의 향연’ ‘타이피스트’ 등 숱한 명작을 남긴 연기파 배우 김금지(80)다. 5공 시절 “독재에 저항하라”며 남편을 정치에 입문시킨 것도 그이고, 1987년 김영삼·김대중의 단일화 실패에 맞서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는 ‘대모험’을 감행할 때 “두목을 따르는 졸개의 마누라가 되고 싶진 않다!”며 독려한 이가 그였다. 술·골프 안 하고 종일 국회 도서관에서 정책을 연구하느라 후원금 모금액이 꼴찌인 남편을 위해 50년 가까이 구두 장사를 하며 선거 비용을 마련해온 억척 여인. “남편이 준 돈으로 옷도 사고 구두도 사는 여자들이 한없이 부러웠다”면서도 “남 비방 안 하고, 반칙 안 하는 준법의 왕초 내 남편이 알랭 들롱보다 멋졌다”고 했다.
조순형 전 의원은 예상대로 인터뷰를 고사했다. “제가 별로 할 얘기가 없습니다.” 마침 올해 이해랑연극상 특별상을 받은 배우 김금지에게 SOS를 쳤다. “해야죠. 인터뷰 안 하면 나한테 밥도 못 얻어먹게요?” 지난 25일 대학로 카페 장(張)에는 화사한 플리츠 정장을 입은 김금지와, 아내가 골라준 감색 줄무늬 양복에 타이를 맨 조순형 전 의원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 남편은 웃기를 잘한다. 웃어도 시익 웃는 게 아니라 얼굴이 구겨질 정도로 시원하게 웃는다. 또 울기도 잘한다. 연애할 때 헤어지자고 해도 울고, 강아지가 아파도 울고, 슬픈 영화를 봐도 울고.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김금지의 <미스터 쓴소리, 조순형> 중에서
-사진 한 장이 두 분의 ‘시작’이었다고 들었다
조순형(이하 조): “대학(서울대 법대) 졸업하고 인생의 좌표를 정하지 못해 방황할 때 고등학교 후배인 주명덕이 사진을 해보라고 하더라. 하루는 암실에서 필름을 인화하는데 인화액 속에서 한 여인의 형상이 떠올랐다. ‘아, 이게 현실의 여자인가’ 싶어 누구냐 물었더니 연극배우 지망생이란다. 그날부터 주명덕의 촬영장을 따라다녔지. 데이트가 목적 아니고 순전히 사진 때문이었다(웃음). 그때 찍은 이 사람 사진을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출품해 입선했다. 지금도 집에 걸려 있다.”
김금지(이하 김): “딱 보니 꼰대. 얼굴은 하얗고 비쩍 마른 남자가 종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길래 되게 할 일 없는 사람이다 했다. 촬영이 끝나니 이이가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더라. 피곤해 죽을 지경이어서 거절했다.”
조: “꼰대? 스물아홉 청년이 어째서 꼰대인가, 허허!”
김: “밤낮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니 꼰대지. 스물셋 김금지가 중년 남자와 연애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하!”
-언제 마음을 열었나?
김: “명동에 금문다방이라고, 문인 화가 연극인들 모이는 아지트가 있다. 국립극장이 가까워 나도 거길 자주 갔는데, 어떻게 알고 이이가 찾아온 거다. 사람들이 죄다 쳐다보니 쭈뼜거리는데, 이 불쌍하고 배고파 보이는 남자를 구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밖으로 데리고 나가 카레를 사 줬다.”
-5년 열애 후 결혼하셨다. 조 의원이 삼성물산에 막 입사했을 때다.
김: “당시 내가 떠오르는 신인 여배우로 상당히 유명했다. 나와 결혼은 해야겠는데, 명성에 걸맞아야 하니 부리나케 직장을 구한 거다(웃음).”
-조 의원 집안이 내로라하는 정치 명문 아닌가.
김: “조병옥 박사 아들이라는 것만 갖고는 나와 결혼할 수 없었다, 하하하!”
-성격이 정반대인데, 정계와 연극계에 천생연분으로 소문이 자자하더라.
조: “아내는 외향적, 나는 내성적이다. 아내는 낙관적이고 나는 비관적이고. 요즘 집에 택배 배송이 늘어 빈 상자가 쌓이는데 이 사람은 바로 내다 버려야 직성이 풀리고, 나는 모아놨다 한꺼번에 버리자는 쪽이라 옥신각신한다. 지금 생각하면 첫인상도 강하고 야심도 보통이 아닌 여배우를 내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랬나, 무슨 만용으로 결혼까지 했나 싶다(웃음).”
김: ”이이가 장가를 잘 왔지. 난 공연 없는 날엔 늘 집을 지켰다. 생활비 벌려고 구두 가게(에모다) 하면서도 이이 퇴근 시간에 맞춰 문 닫고 들어왔다. 식구들 먹이고 입히는 것부터 집 수리, 도배, 장판까지 내가 다 했다.”
# 팔 걷어붙이고 허리를 반쯤 꺾어 절하면서 “내 남편 조순형 후보를 찍어주세요”라고 해본 적이 없다. 그 대신 틈틈이 책을 내어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사는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순형은, 한민당을 창당하고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4대 대선에도 출마했던 조병옥(1894~1960) 박사의 5남매 중 막내다. 조순형이 2003년 민주당 대표로 선출됐을 때, 조병옥이 1956년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이 된 이후 47년 만에 민주당 대표 자리에 오른 한국 정치사의 진기록이라고 떠들썩했다. 조순형이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은 것도 “신익희, 조병옥, 박순천, 정일형, 김대중으로 이어져 내려온 한국 야당의 뿌리를 굳게 지키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조순형은 한 인터뷰에서 “다섯살때 쯤인가. 어머니 손을 잡고 어딘가에 갔는데 용수를 쓴 사람들이 죽 지나가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의 재판장이었다. 어릴 때 난 우리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1980년 신군부가 기성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바람에 다선 의원이었던 형님 조윤형 대신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셨다.
조: “야당의 씨를 말리려는 군부에 맞서 형님 대신 내가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한다고 하더라. 내 인생도 있고 가족도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거부했다. 아버지가 만든 야당을 지키기 위해 자식이 희생해야 하지 않느냐고 화를 내시니 일단 생각해 보겠다 하고 물러나왔는데, 형님이 매사에 낙관적인 이 사람을 설득한 것 같더라(웃음).”
김: “조 박사 아들이니 십자가를 짊어져야지, 안 그런가?”
-선거운동은 제대로 하셨나.
조: “구호를 ‘정통 야당의 씨앗을 보존하자’로 하고, 예식장을 빌려 연설 연습을 했다. 문제는 포스터에 쓸 정치 경력이 전무하다는 건데, 그곳(성북구)이 형님 선거구여서 조윤형 의원의 정치 보좌를 했다고 썼다. 하긴 뭘 해, 하하! 이 사람이 출연한 연극(타이피스트)이 흥행해 거기서 번 돈으로 포니 자동차를 사줬는데 의자 바닥이 내려앉을 정도로 타고 다니며 열심히 운동했다.”
-유세도 함께 다니셨나?
김: “도깨비처럼 눈 화장 하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얌전한 흰 옷을 입고 합동 유세에 나갔는데, 깡패 같은 남자들이 ‘댁은 어느 후보 지지자냐’고 묻더라. 기어드는 소리로 ‘조순형'이라고 했더니 ‘조 후보는 애인을 데리고 다니는구먼’ 하더라.”
-근데 당선이 됐다.
김: “말이 국회의원이지 생활엔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직업이라 내가 더 열심히 벌어야 했다. 당장 국회에 등원하니 다들 크고 까만 중형차에서 내리는데 이이만 덜덜덜 기어가는 포니에서 내렸다더라. 그날로 검정색 중형 세단을 할부로 구입했다.”
-정치를 잘하시던가.
김: “기대를 전혀 안했는데, 잘하더라. 이이가 국회의원 하는 동안 내가 반해서 살았다.”
조: “어이쿠, 무슨 소리!”
김: “의정 활동에서 제일로 꼽히는 백봉신사상을 매년 받아오고, 국정감사 최우수 의원으로 선정된 것만 수차례다. 내조 잘했다고 상을 나한테 주던데, 내가 한 건 그저 남편한텐 돈 달라고 안 한 것, 정치하는 남편이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구두 더 열심히 판 것, 어디 가서 초라해보이지 않게 좋은 양복 사 입힌 것밖에 없다.”
-근데 아파트 분양권을 따러 갔다가 집에서 쫓겨날 뻔했다는 일화가 있더라.
김: “아유, 집안이 난장판 됐지. 당신이 왜 그런 곳에 가느냐며 이이가 펄펄 뛰고 난리가 났다.”
-국회의원 시절이었나?
김: “삼성 다닐 때다. 전국에 부동산 바람이 불어 나도 목돈 좀 벌어볼까 기웃거린 건데, 내가 뭐에 씌었나 보다. 잘못한 거 맞다.”
-공직자도 아닌데 왜 그리 화를 내셨나.
조: “글쎄… 어릴 때부터 아버님에 대한 강박이 부지불식간 있었던 것 같다.”
-조병옥 박사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어떤 걸까.
조: “대선을 앞두고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가시면서 하신 마지막 기자회견. 회견 제목이 ‘낫는 대로 지체 없이 달려오리라’였는데 끝내 운명하셨다.”
-기자회견에서 ‘생(生)과 귀(貴)와 부(富)에 애착하는 자와는 천하를 논의할 수 없다’고 하셨다.
조: “아버님은 늘 개인보다 당, 당보다는 국가라는 신조를 가지고 행동하고 결단하셨다. 국보법 파동 등 여야가 극한 대립을 할 때도 아버님은 늘 국가 이익을 먼저 생각해 초당적 결정을 내리셨다. 당내에서 공격받았지만 협상과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지키셨다.”
-일제에 저항하는 지식인이라 온 가족이 탄압 받으며 곤궁하게 사셨더라.
조: “우리만 그랬겠나. 하루는 부모님이 경기도 양주에 쌀 두 말을 얻으러 다녀오는데 너무 힘들고 처량해서 아버님이 동산에 주저앉아 ‘메기의 추억’을 부르셨단다. 이후에도 술만 드시면 그 노랠 부르셨다. 67세에 돌아가셨는데, 그중 36년을 식민지 백성으로 사셨으니 얼마나 가혹한 시간이었을까 싶다.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고 6·25 때 대구를 사수하러 달려가셨다. 비록 대통령은 못 됐지만 민주주의 기초를 만든 생애 마지막 15년이 아버님의 전성기였을 것이다.”
# 탄핵안은 우리 집 식탁에서 먼저 발의되었다. 이 남자 생각에 법은 누구나 지켜야 하는 거고, 그러므로 대통령이라도 헌법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한 뒤 17대 총선에서 낙선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했다.
김: “이이가 식탁에서 뭘 열심히 쓰길래 물어보니 탄핵소추안이란다. 제발 그만두라고 했더니, ‘이걸로 (탄핵이) 되겠나? 그저 대통령에게 경종을 울리는 의미에서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
조: “열린우리당 분당으로 민주당이 고작 60석뿐이어서 탄핵이 될 거라곤 생각 안 했다. 다만 대통령이 선거에 개입하는 발언을 계속 하시니 탄핵 사유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이 동조하면서 일이 커졌고, 자민련까지 투표장에 나오면서 가결된 것이다.”
-탄핵 주도를 후회하시나.
조: “그렇지 않다. 헌법재판소 결정문에도 대통령이 정치 중립을 지키지 않은 건 틀림없다고 나온다. 그러나 해임할 정도는 아니니 기각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대통령도 헌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판례를 남긴 점에서 나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과는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해 ‘꼬마 민주당’을 만들 때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 공신 중 한 사람이다.
조: “대선 후보 경선에서 1위가 됐지만 노무현은 당내 기반이 없었다. 원내 의원 중 노무현을 지지하는 이는 천정배 한사람뿐이었는데, 날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더라. 꼬마 민주당 때부터 노무현을 좋아했지만 내가 어느 캠프에 들어가는 성품이 아니라 거절했다. 그런데 정몽준이 뜨고 노무현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지니 후보 교체론이 나왔다. 무슨 정당이 전당대회에서 뽑은 후보를 여론조사 때문에 버릴 수 있느냐 말이지. 그래서 선대위에 합류해 노무현을 지켰다.”
- 열린우리당으로 분당되면서 노 대통령과 멀어지신 건가.
조: “민주당으로는 정치 개혁 못한다기에 우리가 당권을 모두 위임할 테니 (민주당이란) 틀을 유지해달라, 중진은 시간이 가면 자연도태된다, 분당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정치적 도의상 자기를 당선시킨 집권 여당을 쪼갠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더라.”
-노무현 서거 12주기였다. 너도나도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자고 외친다.
조: “실정도 많지만 국제 정치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한 것은 큰 덕목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인은 서생의 문제 의식과 상업의 현실 감각을 겸비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걸 몸소 실천한 게 노무현이다. 한미 FTA, 이라크 파병, 제주 해군 기지 등 지지 세력이 그토록 반대했지만 노무현은 굽히지 않았다.”
-2007년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도 나가셨다.
조: 이인제씨가 다시 등판했고, 박상천 대표가 내가 나가야 경선판이 활기를 띤다고 강권하더라. 여론조사는 괜찮게 나오는데, 당심을 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경선 풍토를 잘 아는 나로서는 참 버거웠다. 날 도와준 원외 위원장들에게 공천을 약속하는 공수표를 마구 날려야 하는데 그건 정말 못 하겠더라. 그래서 중도 포기했다.”
-7선 의원의 소임을 다하고 2012년 정계를 떠났다.
조: “나 같은 사람이 한국 정치 풍토에서 도태되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김: “이이처럼 돈 안 쓰고 술도 안 사는 사람을 일곱 번이나 뽑아준 유권자분들이 기적이지, 하하!”
#남편에게 무얼 바라거나 기대하는 사람들은 오래 붙어 있지 못한다. 돈을 못 만드니 별 볼일 없다고 흉보다 사라진다. 계보 같은 것은 만들지도 않는다. 시아주버님은 “우리 순형이는 영국 같은 데서 상원의원 해야 돼” 한 적도 있다.
-아버님만큼 정치를 잘했다고 생각하나.
조: “어림없다. 정치의 폭에서 비교되지 않는다. 그저 시대가 날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국회의원은 3선, 4선이 되면 대선을 바라보며 당내 정치 신경 쓰느라 의정 활동은 소홀히 한다. 인기만 얻으려는 국회의원이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후원금 실적이 늘 최하위권이었다던데.
조: “후원회를 두 번쯤 했나? 그런 자리가 불편했다. 내가 뭐 잘한 일 있다고 후원을 받나. 자서전도 안 냈다. 그리고 국회의원은 공부를 해야 한다. 임기 4년 동안 국회법도 안 읽는 의원이 수두룩하다.”
김: “이이는 대선 후보 경선 중에도 국감 준비하던 사람이다(웃음).”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대권 도전은 어떻게 보시나?
김: “지금 시대에 그만한 매력 있는 사람 못 봤다. 속이 시원하더라.”
조: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으로 1위를 한다는 건 국민들 소박한 희망이 윤석열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공정, 정의, 상식, 법치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 국민들이 환멸을 느껴왔기 때문에 기대가 큰 것이다.”
-최재형 감사원장도 대선 후보로 오르내린다.
조: “그분은 다음 정권에서 대법원장 하면 좋을 것 같다.”
-문재인 정부에 고언(苦言) 한 말씀.
조: “자신들은 촛불을 혁명이라고 하지만 국정에 필요한 기본 지식, 균형 감각 같은 게 너무 부족했다. 문재인 정부 5년은 우리 헌정사에서 학자들의 논문 대상이 될 것이다. 대통령제의 단점들이 이 정권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됐다. 오죽하면 청와대 정부라고 했겠나.”
-이준석 돌풍이다. 후배 정치인들에게도 한말씀 주신다면.
조: “정치란 특혜나 특권을 쫓는 직업이 아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 특별한 소명 의식이 필요한 분야라 국민의 평균적 도덕성보다는 조금 더 높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운 게 정치고, 또 가장 어려운 게 정치다.”
두 사람에게 다시 태어나도 정치를, 연극을 할 거냐 물었다. 조순형이 빙그레 웃더니 아내에게 말했다. “요다음 생이 또 있다면 서로 바꿔서 하지. 난 연극배우 하고. 당신은 정치 하고.” 곰곰 생각하던 아내가 “당신은 진지한 연기를 잘할 소질은 있어요” 하자, 용기를 얻은 남편이 목소리를 높였다. “왠지 ‘햄릿’ 역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애!” “꿈도 크셔라.”
김금지에게 남편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이 뭐냐고 물었다. “이이 그 자체가 선물, 하하하!”
팔순에 서로를 이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부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