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이 국가에 대량 기증되어 국민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처음 작품 목록이 공개되었을 때, 개인적으로 눈길을 끄는 작품이 2점 있었다. 이중섭의 ‘피란민과 첫눈’과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다. 한 점은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른 한 점은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 기증되었다.
필자는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이중섭, 백 년의 신화’ 전시를 준비할 때 이 두 작품을 애타게 찾았다. 도판으로는 전해지지만 약 50년간 실물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당시 공동주최사인 조선일보에 부탁해 ‘그림을 찾습니다’라고 사고(社告)까지 내면서 그림의 행방을 찾았다. 이런 방법이 가끔 통한 적이 있었기에 내심 기대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때 삼성가에서 소장처를 밝히지 못한 것도 어떤 연유가 있었겠지만, 이번에 이 두 작품을 두 공공기관에 나란히 기증한 데에도 분명히 기증자의 ‘뜻’이 있을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찾은 이중섭 그림
두 작품은 이중섭이 한국전쟁 중 폭격을 피해 함경도 원산에서 남으로 피란 내려와 그린 초기의 대표작에 해당한다. 전쟁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노모를 남겨둔 채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실려 왔을 때, 이중섭이 겪었을 ‘시련’과 ‘위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러 피란민에 섞여 이중섭 가족은 집도 없이 외양간 신세나 지고 있었는데, 눈은 내린다. 그것도 첫눈이라니…. 피란민에게 ‘첫눈’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큰 사치인가? 온 가족이 그 첫눈을 맞으며, 사람보다 큰 새와 물고기와 다 함께 나뒹구는 장면은 일견 ‘초현실’적으로 보이지만, 피란민에게는 그저 생생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이 있는 바로 근처 초가집에 1.4평짜리 단칸방을 얻어 가족 네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 때, 이중섭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삶의 위안을 얻고 그림 그리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다. 초가집 앞에서 바다를 향해 내려다본 풍경 그대로, 고요하고 평온하다. 다만, 제주도의 거센 바람을 견디고 자란 팽나무만이 거친 세파를 기억하고 있다.
◇미국·프랑스 유학한 부부 화가
이중섭의 ‘고생’ 스토리가 아무리 끝이 없다 할지라도, 나는 이중섭 세대야말로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이전 세대 서양화가의 활동 환경은 더욱 열악했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가가 지금 조금의 성공이라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 행운이 아니라 과거 불우하게 끝마친 모든 선인(先人)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 철학자는 썼는데, 그것은 어느 세대에나 적용되는 원리 같다. 이중섭의 첫 스승이었던 임용련과 백남순! 그 세대가 겪어내야 했던 시대는 더욱 처절했고 드라마틱했으며, ‘화가’로 살아남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임용련(1901~?)은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으로, 이중섭보다 열다섯 살 위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배재고보 재학 중이었다. 그는 3·1운동에 깊이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 시기 많은 학생이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망명했다. 독일로 가서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가 된 경성의전 출신 이미륵이 대표적이다. 이미륵이 가짜 중국 여권을 만들어 독일로 간 것처럼, 임용련은 ‘임파’라는 중국 이름의 여권을 들고 미국 시카고로 향했다. 그리고 1922년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미술대학이었던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입학하여, 유진 새비지(Savage) 교수의 총애를 받는 학생으로 성장했다.
새비지 교수가 예일대학으로 옮겨가자 임용련도 따라갔다. 그곳에서 한국인 최초로 미술대학을 정식 졸업한 후 장학금을 받아 유럽에 1년간 미술 연수를 떠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파리로 갔을 때, 친구 여동생 백남순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백남순(1904~1994)은 최초의 근대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과 함께 1세대 여성 화가의 대표주자였다. 나혜석이 다녔던 도쿄 여자미술학교를 중퇴, 1928년 봄 단신으로 프랑스에 유학 가서 이미 파리의 여러 살롱에 참여해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녀는 국내 최초로 유럽에서 서양 미술을 공부한 여성 화가로 기록된다. 나혜석이 결혼 후 남편과 함께 파리를 간 것보다도 수개월 빨랐다.
백남순과 임용련은 파리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1930년 4월 파리 근교 에르블레(Herblay)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집을 꾸렸다. 이 무렵 집 정원에서 센 강을 바라본, 임용련의 풍경화가 용케 남아있다. 이 그림은 1982년 백남순의 친구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오산고보에서 만난 ‘제자' 이중섭
백남순과 임용련 부부는 결혼 후 바로 귀국했다. 192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직접 미술을 공부한 화가는 당시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이들의 귀국은 경성의 화젯거리였다. 귀국하자마자 ‘부부전’을 열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이들을 “조선이 낳은 세계적 화가”라고 소개했다. 소설가 이광수가 전시평을 썼다.
그러나 아무리 외국에서 유학한 똑똑한 인재가 조선으로 들어와도 이들이 활동할 무대가 없던 때다. 오히려 3·1운동으로 망명했던 임용련의 과거 이력으로 인해, 특고경찰이 열심히 따라붙었을 뿐이다. 이들을 받아준 곳은 독립운동가의 온상지,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보였다.
이들은 1931년 정주 오산고보(5년제)로 가서 영어와 미술 선생을 맡았다. 여기서 당시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중섭을 만났다. 이 부부는 이중섭이 이듬해 ‘전조선 남녀 학생 작품전’에서 입선할 때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이중섭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그의 ‘첫 스승’이었던 것이다.
◇연필화, 전통 접목… 두 스승의 가르침
임용련은 특히 ‘연필화’의 중요성을 이중섭에게 각인시켰다고 생각된다. 임용련은 연필로 그린 그림을 단순한 습작이 아닌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인식했는데, 그런 태도는 이중섭의 초기 연필화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임용련이 미국 유학 시기에 제작한 ‘십자가의 상’(1929)과 이중섭의 ‘세 사람’(1943~1945)을 비교해보면,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연필화에 진지한 태도였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유화 작품에 ‘긁기’ 기법을 도입한 것도 임용련과 이중섭의 작품에 공통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백남순의 작품 또한 이중섭에게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1930년대에 그린 대작 병풍 ‘낙원’을 보자. 이 작품은 동양의 무릉도원 전통과 서양의 아르카디아 전통을 묘하게 겹쳐 놓은 것으로, 두 세계의 ‘이상향’에 대한 갈구가 종합된 특이한 도상의 작품이다. 산과 강, 계곡과 폭포, 나무와 숲이 어우러진 자연 한가운데에서 인간들은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모습이다. ‘어떻게 서양화를 동양 전통과 연결할 것인가’ 하는 초기 유화 화가의 절실한 고민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질문은 이중섭의 평생 화두이기도 했다. 이중섭 또한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낙원’이나 ‘도원’과 같은 현대판 무릉도원을 즐겨 그리며, 조선의 전통 사고와 서양의 새로운 재료를 결합하는 독창적 시도를 계속 하지 않았던가.
백남순의 ‘낙원’은 그녀가 오산고보에 있을 때, 전라남도 완도에 살던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선물이었다. 해방 직후 백남순이 남으로 내려올 때 정주에 있던 작품은 하나도 가지고 오지 못했기 때문에, 해방 전 이미 남쪽에 있던 이 작품만이 지금껏 살아남았다. 백남순이 해방 전에 그린 유일한 현존작! 이 작품도 이건희 컬렉션이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미술관에서 작품으로 재회한 사제
‘낙원’의 세계는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해방 후 현실 세계의 ‘비극’이 본격화되었다. 임용련은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해방 정국 미군정청의 재판장 고문과 ECA(미국경제협조처) 세관 고문으로 일했다. 직업상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의해 가장 먼저 처단될 운명이었다. 그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인민군에게 끌려가 이후 처형된 것으로 전한다. 백남순은 7남매를 이끌고 사회사업을 하다가 1964년 아예 미국으로 이민 갔다. 자녀를 다 키운 후 말년에 다시 화필을 잡기도 했다.
1980년 그녀는 뉴욕에서 이중섭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이재현 연출의 연극 ‘화가 이중섭’을 직접 관람했다고 한다. 자신의 제자 이야기가 담긴 그 연극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서울에 있는 이구열 미술평론가에게 전화를 걸어 소회를 말한 적이 있다. 이제는 백남순도 이구열도 고인이 되었고, 임용련과 이중섭은 이미 오래전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 임용련의 ‘에르블레 풍경’도, 백남순의 ‘낙원’도, 그리고 이중섭의 ‘피란민과 첫눈’까지도 모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앞으로 영구히 국가 자산으로 보존되어 세대를 이어 전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