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는 5월, 신경주역에 내렸다. 한국화 거장 박대성(76) 화백을 만나러 경북 경주시 삼릉으로 가는 길이었다.
얼마 전 그가 신문 사회면에 실렸다. 지난 3월 경주엑스포대공원 내 솔거미술관에서 열린 박 화백의 특별 기획전 ‘서화(書畵), 조응(調應)하다’의 작품 일부가 훼손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미술관에 왔다. 이들은 전시관 한가운데 있는 박 화백 작품 위에 눕기도 하고, 거꾸로 미끄럼틀을 타듯 내려오며 무릎으로 문지르기도 했다. 작품 속 일부 글자가 뭉개지고 훼손됐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 시대 최고 명필로 꼽혔던 김생의 글씨를 박 화백이 모필한 것으로, 가로 39㎝ 세로 19.8m에 이르는 대작이다. 액자에 넣기 어려울 정도로 커서, 미술관에서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려 전시했다. 보험 평가액만 1억원이 넘는다.
작품이 훼손된 사실을 안 미술관 측은 폐쇄회로(CC)TV에 녹화된 화면을 통해 아이들 부모를 찾았다. 아이들 아버지가 이를 제지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준 사실도 알게 됐다. 정작 이 소식을 들은 박 화백은 미술관에 “아무 문제도 삼지 말라”고 했다.
삼릉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으로 추정되는 박씨 3왕의 능이 있는 곳. 과거엔 지나가는 사람들이 능을 보고 인사한다고 해, 절 배(拜) 자를 써서 ‘배동’이라 불렀다. 화가의 집은 이 근처에 있다. 삼릉을 향해 도열하듯 서있는 소나무 수십 그루를 바라보고, 또 그 사이를 거닐며 21년째 이곳에서 산다.
박대성은 훼손된 작품에 대해 “봉황이 지나간 자리에 그 정도 발자국은 남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껄껄 웃었다.
◇작품 훼손? 고놈이 내겐 ‘봉황’이다
–봉황이라니, 무슨 뜻인가.
“작품이 훼손됐다는 뉴스가 유튜브에서 218만회 재생됐다고 한다.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사람들이 내 작품을 그렇게 많이 봤겠나. 그러니 고놈이 봉황이지. 전시관에 다시 가서 보니 아이들 눈에는 미끄럼틀같이도 보이겠더라.”
–그래도 애써 그린 작품이 훼손됐는데.
“내가 보상을 요구하면, 그 아이 부모가 아이를 얼마나 원망하겠나. 아이도 위축될 테고. 아이가 미술관에서 가져가는 기억이 그래서는 안 된다. 인간이 서로 원수지고 살 필요가 없다. 왜 이렇게 다들 ‘네 편 내 편’ 하며 비싼 에너지를 값싸게 소진하나. 물론 관람 문화가 좀 더 개선될 필요는 있다. 이번에 여러 기사가 나가면서 이런 부분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 본다.”
그는 ‘봉황’인 아이 덕분에 자신이 유명해졌다고 했지만, 이는 대단히 겸손한 표현이다. 1969년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내리 8번 입선했고, 관 주도 공모전의 폐해에 맞서 출범한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과 대상을 받으며 일찌감치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가나아트의 전속 화가였으며, 호암 갤러리에서 650평을 가득 메우는 개인전을 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당시 전시된 그의 작품 대부분을 구매했을 정도로 이병철·이건희 부자(父子)가 편애한 작가이기도 하다. 얼마 전 공개된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에도 그의 작품 ‘일출봉’ ‘서귀포’ 등이 포함됐다. ‘일출봉’ 연작은 ‘장백폭포’와 함께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접견실 정면에 걸린 그림이기도 하다. 지난해엔 조선일보 100주년 기념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참여했다.
누군가에겐 ‘오른손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각인됐을지 모른다. 네 살 때였던 1949년, 경북 청도에서 한의사를 하던 아버지가 ‘반동 지주’로 지목되면서, 빨치산이 휘두른 낫에 부모를 잃었다. 이때 그의 왼팔 팔꿈치 아래도 잘려나갔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에 ‘한쪽 팔이 없음을 감안하고 봤을 때 좋은’이란 수식어는 붙지 않는다. 그는 양쪽 팔이 다 있어도 못 그리는 작품을 해내는 화가다. 중학교를 마지막으로 학교는 나가지 않았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놀려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고 했다.
–팔 한쪽이 없어 놀림받던 아이는 어쩌다 그림을 시작했나.
“어릴 때 살던 친척 집에서 제사를 많이 모셨다. 1년에 열 몇 번씩 제사가 있었는데, 머리맡에 병풍도 서 있고, 지방 쓰던 필기구도 있었다. 지방 쓰려고 오려놓은 종이에 병풍 그림을 흉내 냈더니 친척 어른께서 ‘우리 대성이가 그림에 소질 있다’고 하셨다. 그 말 한마디였다. 보통은 지방 쓰는 종이에 애가 낙서를 해놓으면 99% 타박하지 않겠나.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부모도 없고 팔도 없으니, 기죽지 말란 의미로 그러신 것 같은데, 그 말 한마디가 날 화가로 이끌었다.”
친척 어른은 그에게 황룡사 벽화를 그린 신라시대 극사실주의 화가 솔거 이야기도 해줬다고 한다. 솔거가 그린 벽화를 실제 소나무로 착각해 새들이 날아와 죽었다는 일화. 약 60년 뒤 2015년 그는 작품 830점을 기증해 ‘경주 솔거미술관’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
–학교도 가지 않았는데, 그림 공부는 어떻게 했나.
“어릴 땐 병풍부터 수묵화까지 뭐든 따라 그렸다. 산과 들을 오가며 나뭇짐을 하고 젖양을 먹이면서, 눈에 보이는 풍경들을 그림으로 옮겼다. 수묵화의 기초는 자연. 대자연의 섭리가 나를 완전한 기초의 세계로 이끌었다. 열여덟 살 때는 친척 어른의 소개로 호랑이 그림 대가인 서정묵 선생께 배웠고, 이후 이영찬·박노수·석도륜 등 숱한 대가를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대학에는 고수가 한두 명밖에 없지만, 나는 학교에 속해있지 않아 모든 고수한테 배울 수 있었다. 학교 가지 않은 게 축복이었다.”
그는 미술대전 입선 후에도 그림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중국·대만·미국·인도·터키·이탈리아 등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다녔다. 1994년에는 홀연 미국으로 떠났다. 63빌딩 등 유명 건축물에 그림이 걸리면서 작품 요청이 밀려들 때였다.
–왜 뉴욕으로 갔나.
“90년대 초에 다들 ‘현대 미술, 현대 미술’ 하기에, 그 실체를 알고 싶었다. ‘현대 미술이 뭐냐’고 물었더니 정작 대답하는 사람이 없더라. 그 메카가 어디냐고 하니 ‘원래 독일이었는데 최근에 뉴욕으로 옮아갔다’고 해서 뉴욕 소호로 날아갔다. 김환기를 비롯해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다닌 학원이 있더라. 추상반과 수채반이 있기에 수채반에 등록했다. 물감을 먹으로 바꾸면 되니까. 수채 가르치는 선생이 중국인 3세인데, 학원을 두 번 나가 보고 알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 그랬나.
“첫날은 선생이 시연하고, 둘째 날엔 우리가 그림을 그려서 보여줬다. 나는 먹과 붓만 가져갔다. 선생이 내 그림을 보더니 갑자기 ‘엑설런트’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붓과 먹을 보고 ‘도대체 이 브러시와 잉크가 뭐냐’고 묻는다. 그때 알았다. 현대 미술이란 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잘해내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내게 현대 미술 최고의 도구는 필묵이고, 이를 가장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공간은 뉴욕이 아니라 경주란 생각이 머리를 쳤다. 이 좋은 걸 눈앞에 놔두고 헤매고 있었다. ‘모던’이란 게 이미 우리한테 있는데, 영어로 말하니 다른 대단한 게 있나 싶었던 것이다.”
–국내 여러 곳 중에서도 왜 경주였을까.
“신라가 남겨놓은 문화유산이야말로 모던 중 모던이다. 그중에서도 정수가 불국사다. 변화무쌍하면서도 신비스럽다. 비가 오고 나면 백운교, 청운교 사이 쌍무지개가 보인다. 정월 대보름의 불국사는 또 어떤가. 대웅전에 서면 석가탑과 다보탑 사이에 보름달이 뜬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아 5분 이상 보기가 어렵다.”
–불국사에서 1년을 기거하며 그림을 그렸다더라.
“내가 성질이 좀 뜨겁다. 공항에서 내려 바로 불국사로 갔다. 방을 달라고 하니 어렵다고 했다. ‘뉴욕에서 잠도 안 자고 여기로 바로 왔는데, 방을 내줘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항상 그렇게 살았다. 그림을 위해서라면 체면 차리는 일이 없었다. 대중 회의 끝에 불국사에 내 방 한 칸이 마련됐다. 11월의 불국사에서 첫날 밤을 보내는데, 밤새 병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 화장실에 들락거리느라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어린아이가 소풍을 앞두고 그러는 것처럼!”
–불국사 전경을 담은 ‘천년 배산'(880×243cm)과 눈 내리는 불국사 모습을 담은 ‘불국 설경'(800×252cm)을 그때 그렸다.
“처음엔 불국사라는 대가람(伽藍)을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통 집이 3칸, 5칸이라면 이건 수십 칸이 서동으로 길게 자리 잡은 셈이니까. 숱한 화가가 이를 그리지 못하고 돌아갔다. 초점을 세 곳으로 나누니 그제야 불국사가 눈에 들어왔다. 눈 내리는 불국사 풍경을 그리는 게 제일 힘들었다. 설경을 그리고 싶은데, 경주는 눈이 잘 오질 않는다. 하루는 같이 지내는 조수에게 ‘있는 동안 눈이 오면 참 좋겠는데’란 말을 하고 잠들었다. 새벽에 이 친구가 날 막 깨워서 보니, 불국사가 흰 눈으로 수북이 덮였다. 그걸 얼른 스케치했다. 그 후로는 그런 풍경을 보지 못했다.”
1996년 그는 경주에서 그린 작품들을 모아 당시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가나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인사동길에 ‘박대성 그림에서 광채가 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솔거미술관 이재욱 학예사는 “소산(박대성 호)의 작품에는 한국화의 전통적 표현 기법인 부감법(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법)과 그만의 다시점(多視點) 구도가 펼쳐지며 우리를 물아일체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영묘한 힘이 있다”고 했다.
–불편한 손을 원망해본 적은 없나.
“몸이 불편한 팔자를 타고난 게 내 인생의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몸이 불편하면 게으름도 못 피우고, 이 세상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남이 안 듣는 것, 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티븐 호킹이 그렇지 않은가. 나는 장애가 중증일수록 하느님이 그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 세상은 영원히 사는 데가 아니다.”
박 화백은 요즘도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냉수마찰 하고, 1시간씩 묵주 기도를 드린다. 오랜 기간 불국사를 그려온 그는 실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작업실 곳곳에 십자가와 함께 성서가 놓여 있다. 2시간씩 글씨 쓰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그는 글씨에서 모든 내공이 생겨난다고 믿는다.
◇180cm 집에서 그린 180cm짜리 작품으로 대상
100㎡(약 30평) 남짓의 삼릉 작업실은 1·2층 주인이 다르다. 1층은 박 화백이 쓰고, 솔숲이 통창으로 펼쳐지는 2층은 성화(聖畵) 작업으로 유명한 아내 정미연(66) 작가가 쓴다. 계단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각 층 분위기가 천양지차다. 대구 가톨릭대 회화과를 졸업한 정 작가는 천주교 서울대교구를 시작으로 대구, 전주, 원주, 제주 등 다섯 교구의 주보 1면 성화를 그려왔다. 지난 3월엔 이렇게 작업한 성화 200점을 모아 서울 명동성당 갤러리에서 ‘현존’이라는 이름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날 2층 작업실은 주인이 없었다. 정 작가는 최근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박 화백은 “요즘 내가 유일하게 근심하는 일”이라고 했다. 화가로서 아내 이야기를 할 때, 그는 꼬박꼬박 높임말을 썼다.
–부부지만, 화가로서는 다른 길을 걷는 듯하다.
“그 사람 재능이 참 귀하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좋은데, 정말이다. 철저하게 기초를 지키는 작가다. 서양화는 인체 중심, 수묵화는 자연 중심. 그걸 제대로 한다. 내게는 ‘공짜 교사’이기도 하다. 내 그림에 대해 가장 현실적인 평을 해주기 때문이다.”
정미연은 대구에서 간장 제조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열 살이나 차이 나는 나이도 그랬지만, 한쪽 팔이 없는 데다 가난한 화가다 보니 오빠들의 반대가 심했다. 정작 장인·장모는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장모는 매일 새벽 ‘우리 박 서방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결혼한 이듬해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신혼을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사글세 2만원짜리 연탄 집에서 시작했다. 그때 집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가 180cm였는데, 대상 받은 그림의 종이도 180㎝였다.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밑에서 두 살 된 딸이 기어다니며 낙서를 했다. 안 되겠다 싶어 하루는 두 눈 딱 감고 아이 손등을 세게 때렸더니, 그다음부턴 안 그러더라. 가슴 아프지만 어쩌겠나. 이게 내 밥벌이인데.”
그렇게 큰 딸이 국내 유명 아트갤러리인 가나아트센터에서 일하는 박정연(41) 부장이다. 둘째 딸 아연씨는 뉴욕 프랫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전업 작가로 활동한다. 정연씨는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되지 않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하는데 쉽지가 않다. 아버지는 늘 딸들이 남녀 구분 없이 큰사람이 되길 바라셨다. 어릴 땐 다소 엄격한 아버지가 버겁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커서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버지 마음을 알겠다. 아직도 기도하고 운동하라시는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감사하다”고 했다.
–경주 솔거미술관에 작품 830점을 기증했다.
“장롱 속에 작품을 넣어놓으면 뭐 하겠나. 많은 사람이 보게 하는 게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살리는 길이다. 미국에 가보니 기부 문화 하나만큼은 정말 부럽더라. 최근엔 세한도나 이건희 컬렉션을 보면 우리나라도 많이 바뀐 것 같다. 이건희 컬렉션은 개인적으로 작품을 흩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컬렉션이라는 건 한 사람의 일생과 가치관이 반영된 것인데, 그걸 나눠버리면 진주 목걸이를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걸 모으되, 순회하는 형식으로 공개해야 한다고 본다.”
내년 7월엔 그의 작품들이 미국으로 간다. 미 서부에 있는 LA카운티박물관(LACMA)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비슷한 시기 미국 동부에서는 다트머스대, 스토니 브룩대, 메리 워싱턴대 등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순회전을 한다. 이를 위해 다트머스대 김성림 교수를 주축으로 박대성의 작품 세계에 대한 영문 서적 발간도 진행 중이다.
–서양에서 사랑받는 이유가 뭐라고 보나.
“우리 것, 내 것에 대한 진정성이 통한 것 아니겠나. 지금까지 많은 화우가 해외에서 유학했는데 결국 존재감 없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걸 놓아 버려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쪽 사람만큼 하기도 어렵고, 우리 정체성도 잃어버려 설익는 것이다. 유학이 나쁘다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젊은 사람들이 우리 것이 정말 소중하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나는 가끔 이중섭 화백이 붓을 들고 여기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럼 지금보다 더한 천지개벽이 났을 텐데!(웃음)”
박 화백을 오랜 기간 지켜본 서예 평론가이자 예술의전당 이동국 수석 큐레이터는 “소산 같은 작가가 한 명만 더 있어도 업고 다닐 것”이라고 했다. “서양에선 낯설지만 결코 자신들이 가질 수 없는 소산의 세계를 부러워한다. 우리나라에서 서화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이를 현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500년·1000년 전 얘기만 하기 때문이다. 소산은 이걸 다 뛰어넘는다. 동양을 가장 서구적으로 해석한 화가가 소산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좋은 음악, 아름다운 그림을 보면 이유는 모르지만 행복해진다. 인류를 두근거리게 하는 게 결국 예술 아닐까.”
–언제 가장 두근거리나.
“작품이 가장 잘 나올 때. 그간의 고통을 다 상쇄하는, 나만 아는 희열이 있다. 그 맛 때문에 내가 아직도 붓을 못 놓는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루저 중의 루저'였다.
“그 부족함이 내겐 강점이었다. 어려움 없이 한 일은 들여다봤을 때 취할 게 없다. 그걸 딛고 이기려고 발버둥치면서 인간은 성장한다. 그렇게 나의 세계도 구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