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90년대 안보교육을 세게 받고 자라선지 국토의 북쪽으로 갈수록 묘한 공포심에 휩싸인다. 차창 너머 행군하는 군인들 모습에 괜히 마음이 짠해지고,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깃든 낯선 긴장감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현충일이 들어 있는 6월, 강원도 고성 접경 지역으로 ‘북진’했다. 호국보훈의 달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북으로 내달릴수록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언택트 해변’, 때 묻지 않은 호수가 기다렸다. ‘민간인 출입통제선(이하 민통선)’을 지나니 길 끄트머리에 금강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고성 통일전망대’가 두 팔을 벌렸다.

강원도 고성의 라벤더 테마 농장 '하늬라벤더팜'은 1년 중 6월이 가장 아름답다. 이달 중순 이후 찾는다면 라벤더 향을 실어나르는 보랏빛 파도를 만날 수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최북단 금강산 전망대

“저게 금강산이라고?” “맞네, 맞네! 교과서에서 봤던 그 금강산!”

6일 현충일, 동해안 최북단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해발 70m 고지에 있는 고성 통일전망대(033-682-0088) 내 ‘고성통일전망타워’ 입구에 들어선 20대 커플이 환호했다. 눈앞으로 ‘훅’ 들어온 금강산 풍경에 할 말을 잊었는지 감탄사만 연발했다.

고성 통일전망대 내 '고성 통일전망 타워'는 금강산과 해금강, 우리 동해를 한번에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 박근희 기자
고성 통일전망 타워에서 바라본 금강산. / 박근희 기자

철책과 DMZ(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전망대에서 불과 16~25㎞ 거리에 금강산과 해금강(海金剛)이 있다. 금강산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남쪽 사람들에게 고성통일전망대는 ‘금강산 전망 한계선’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산은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에 6월의 하늘 색을 입힌 듯했다. 500원짜리 동전을 망원경에 딸깍 넣으니 물리적으로는 닿을 수 없는 현종암, 부처바위 등 섬과 해금강, 구선봉 등 북쪽 풍경이 렌즈 안으로 들어왔다. 3층 실내 전망대에 있는 디지털망원경(무료)으로 더 크게 확대해 볼 수 있지만 어쩐지 전망 망원경이 더 실감 난다.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리다 우리 국군 초소에 걸린 태극기를 발견하니 괜스레 가슴이 뻐근해진다. 분단 국가에 사는 안타까움과 자유대한민국에 서 있다는 안도를 동시에 느끼는 순간.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맛은 청량했다.

통일전망대 아래엔 6·25전쟁체험 전시관이 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축소판 같다. 입구에 발을 딛자 별안간 폭음과 함께 “김상병”을 다급하게 외치는 전쟁 영화 속 효과음이 생생하게 터진다. 전시관에선 6·25전쟁 체험실, 전사자 유해발굴실, 병영체험실 등과 차례로 만난다.

'DMZ'의 탄생 배경 등 분단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DMZ박물관'.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DMZ박물관' 내 전사자인 임춘수 소령의 유품을 전시한 공간.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분단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DMZ박물관(033-681-0625)도 민통선 북측에 있다. 박물관 야외에 있는 대북심리전 장비, 독일의 베를린 장벽과 철조망도 이색 볼거리지만 실제 DMZ처럼 조성해 놓은 철책을 지나 6·25 전사자인 임춘수 소령이 생전 가족들에게 남긴 편지 등 유품을 들여다보면 숙연해진다.

고성 통일전망대와 DMZ박물관, 6·25 전쟁체험 전시관은 모두 민통선 안에 있어 입장 전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출입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통일전망대 관람 요금(어른 3000원·학생 1500원·65세 이상 1500원)과 주차비(5000원) 납부 후 군 검문소를 통해 출입할 수 있다. 요즘 같은 계절엔 늦어도 오후 4시 50분까지 검문소에 도착해야 민통선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지난 5월 최북단 '명파해변'에 개관한 세계 두 번째 접경 지역 '아트 호텔'인 '리 메이커'. 흉물로 방치돼 있던 옛 '명파DMZ비치하우스'를 예술가, 기획자, 기관이 참여해 '예술 숙소'로 꾸몄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명파해변 마주한 ‘아트호텔’ 개관

검문소를 빠져나와 더이상 북진할 수는 없으니 하릴없이 남쪽으로 향한다. 차로 10여 분 내려오면 동해안 최북단 해변인 현내면 명파해변과 만난다. 명파해변은 ‘맑은 파도가 일어나는 해변’이란 뜻. 500m의 아담한 바닷가엔 지난달 20일 아트호텔인 리 메이커가 문을 열었다. 영국 작가 뱅크시가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세운 ‘벽에 가로막힌 호텔(Walled Off Hotel)’에 이은 세계 두 번째 접경지역 아트호텔이자 동해 최북단 호텔이다. 숙소의 기능을 잃고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던 옛 ‘명파DMZ비치하우스’를 예술가, 기획자, 기관이 참여해 평화, 생태, 미래를 주제로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했다.

최북단 명파해변에 들어선 아트 호텔 '리 메이커'는 8명(팀)의 작가가 객실 8개를 각자의 예술 감성으로 꾸몄다. 객실 하나가 전시관이 되는 셈이다. 사진은 '스포라스포라'의 '스펙트룸'.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리 메이커' 호텔 8개의 객실 중 신예진 작가가 꾸민 '산수설계 홈 프로젝트' 객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2층짜리 2개 건물, 총 8개의 객실은 박진흥, 오묘초, 류광록, 홍지은, 신예진, 박경, 스포라스포라, 스튜디오 페이즈 등 8명(팀)의 예술가가 각자의 색깔을 담아 꾸몄다. DMZ의 철책을 연상케 하는 설치 작품으로 장식한 객실부터 조선 시대 왕가를 재현한 한실 등 객실마다 독특한 작품들이 함께한다. 모든 객실은 커튼을 열어젖히는 순간 반전이 펼쳐진다. 탁 트인 바다 전망 대신 철망에 가로막힌 뷰를 경험한다. “‘접경 지역 호텔'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했다”는 게 관계자 설명이다. 로비, 복도 양쪽 끝, 라운지 곳곳에 작품이 서 있다. 김종량 작가의 ‘신 몽유도원도-나전, 2021’과 같은 대작도 있다. 개관은 했으나 호텔은 현재 내부 관람만 가능하다. 리 메이커의 관리를 맡은 고성군(033-680-3351) 측은 “숙박 및 추후 구체적인 이용 방법은 운영 업체 선정 후인 6월 중순 이후에 다시 공지할 것”이라고 했다.

동해안 최북단 해변인 '명파해변'엔 일부 철책을 상징적으로 남겨 두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호텔 앞 명파해변가엔 최북단 캠핑장인 명파해변 오토 캠핑장(010-4212-5107)이 있다. 텐트를 칠 수 있는 21개 사이트와 방갈로 형태의 ‘돔 하우스’를 갖췄다. 얼마 전 해변의 철책 제거 사업이 완료돼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이달 말까지는 해변 정비 사업을 진행한다. 명파해변에서 차로 5분 거리 ‘금강산 콘도’ 양옆으로 나란히 있는 마차진해변대진해변은 코로나 사태 후 언택트 해변으로 조용히 알려지면서 아는 사람들만 찾는 중. 금강산 콘도 뒤편 ‘무송정섬’(사유지)과 이어진 모래사장을 사이에 두고 해변이 나뉜다. 대진해변 출입구는 상시 개방하나 마차진해변은 군 작전 통제 구역에 속해 있어 출입구를 한시적으로 개방한다.

고성 '금강산 콘도' 뒤편 무송정섬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마차진해변과 대진해변이 이어진다. 아직은 발길이 덜 탄 고성의 크고 작은 해변도 볼거리다. / 박근희 기자

◇이승만이 사랑한 ‘화진포’, BTS 다녀간 ‘능파대’

고성 통일전망대에 서면 북쪽이 궁금하듯, 고성의 남쪽은 북쪽에 있는 이들이 그토록 궁금해하고 그리워하는 곳이기도 할 터. 거진읍 화진포는 수복(收復) 전 김일성 일가가 왕래한 별장과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기붕 부통령의 별장이 남아 있는 곳이다.

고성 화진포에 있는 '화진포의 성'. 외국인 휴양촌의 예배당 건물로 쓰이다가 1948년부터 2년 간 여름에 김일성의 처 김정숙과 아들 김정일 등이 머물렀다고 알려지면서 '김일성 별장'이라고도 불렸다. 해무가 낀 지난 2일 화진포 성을 두른 소나무의 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금은 화진포의 성이라 부르는 김일성 별장은 결핵 퇴치를 위해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도입한 선교사 셔우드홀 부부의 의뢰로 독일 망명 건축가 베버가 지은 건물이다. 건축 당시엔 외국인 휴양촌의 예배당으로 사용됐다. 6·25전쟁 중 훼손된 것을 복원해 역사안보전시관으로 운영 중이다. 김일성의 처 김정숙이 1948년부터 2년간 여름에 아들 김정일 등을 데리고 와 귀빈관에 머물렀다고 알려지면서 ‘김일성 별장’이라 불렸다. 곡선 형태의 건물도 특이하지만, 전망이 장관이다. 화진포 해변과 송림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2층 창문으로는 화진포해변이 ‘파노라마 뷰’로 펼쳐진다.

화진포호가 내다보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화진포의 성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이기붕 부통령 별장 역시 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사택. 인근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은 김일성 별장보다 소박한 풍채다. 단층집 거실에 들어서면 격자창에 화진포호가 그림처럼 걸린다. 동해안의 연안 석호인 화진포호는 호안선 길이만 16㎞에 이른다. 호수 주변은 울창한 송림이 둘러쳤다. 통합권 개념의 입장권(3000원)을 끊으면 근대 유산인 별장 세 곳과 화진포생태박물관 등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곰보바위'로 이름 난 고성 문암해변 '타포니 지형'의 능파대. BTS가 다녀가며 더욱 유명해졌다. / 박근희 기자

화진포 남쪽 ‘문암해변’의 능파대는 방탄소년단이 겨울 화보집 촬영을 위해 다녀가면서 일부러 찾는 이들이 늘었다. ‘곰보바위'란 별칭이 붙은 능파대는 ‘파도 위를 걷는다'는 뜻으로 화강암이 소금에 의해 염풍화 작용으로 구멍이 생기면서 형성된 타포니 지형이다. 최근 진입로인 계단이 일부 파손돼 보수 후 12일부터 재개방 예정이다.

◇‘보랏빛 향기’ 라벤더 제철

6월에 고성에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1년에 단 한 번 6월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라벤더’ 때문이다. 간성읍 하늬라벤더팜(033-681-0005)의 드넓은 평원에 보랏빛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잉글리쉬라벤더를 심은 ‘라벤더 필드’만 3000여 평. 지금 제철인 양귀비, 초록빛 호밀까지 더해져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리든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친다.

지난 2일 '하늬라벤더팜' 라벤더 필드엔 이제 막 보랏빛을 머금은 라벤더들이 반겼다. 이곳 하덕호 대표는 "중순 이후에 제철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들어가는 길부터 예사롭지 않다. 레드 카펫 대신 보랏빛 도로가 이어진다. 영국풍의 ‘잉글리쉬가든’을 지나면 바로 라벤더 군락이 펼쳐진다. 이맘때 풍경을 놓칠세라 전국 각지에서 여행객이 몰리는 중. “대구에서 왔다”는 동갑내기 친구 김은영(26)·배윤지(26)씨는 “작년에 방문했다가 좋아서 올해 다시 라벤더 피는 계절에 맞춰 왔다”고 했다. ‘라벤더 전도사’라 불리는 이곳 하덕호(60) 대표는 “예년 같으면 만개했을 시기인데 올해는 날씨 때문에 이달 중순이 지나야 하늬라벤더팜의 제멋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 대표가 2006년부터 가꿨다는 3만3000여㎡ 농장은 유화를 그린 거대한 캔버스 같다. 제대로 즐기려면 반나절도 모자란다. 카페에서 파는 라벤더 아이스크림 하나 들고 걷다 보면 라벤더 향기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다. 관람료는 일반 6000원, 어린이 3000원. 6월 라벤더 시즌에는 휴무일 없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 가능하다.

[ ‘수바위’ 보며 호박식혜, ‘천진바다’ 보며 문어곱창전골··· “전망은 서비스입니다” ]

고성 '화암사' 내 찻집 '란야원'은 '수바위 전망대'나 다름 없다. 진경산수화같은 풍경이 차맛을 더한다. / 박근희기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 식후경이든, 경후식이든 경치 좋은 고성이니 맛집에서도 전망을 포기할 순 없는 일.

불심(佛心)이 깊지도 않으면서 고성군 토성면의 ‘화암사(禾巖寺)’를 찾아간다면 화암사 안에 있는 찻집 란야원(070-7726-7551)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불자들만 조용히 찾던 사찰에 여행객들이 발걸음하기 시작한 건 란야원이 ‘수바위 뷰 맛집’으로 소문나면서부터다. 산사 초입의 누각을 용도 변경한 찻집의 미닫이문을 열어젖히면 문틀의 네모난 프레임 안에 수바위가 그림이 되어 걸린다. 수바위가 잘 보이는 자리는 이미 찻집의 포토존이나 다름없다. 사람이 몰리는 날엔 풍경에 취해 마냥 신선놀음하거나 오래도록 앉아 담소를 나누기는 쉽지 않다. 화암사 주차장에서 찻집까지 경사로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갈 것. 계곡 물소리 들으며 천천히 올라 호박식혜(7000원)와 냉유자차(6000원) 한잔하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여름이면 서퍼들이 조용히 찾는 토성면 천진해변의 남경식당(070-4205-5959)은 바다를 내다보며 토속 음식인 섭국(1만원)과 청어알비빔밥(1만2000원), 문어곱창전골(소 4만원부터) 등 별미를 맛볼 수 있다. 통유리에 좌식 자리는 바닷가 대청마루에 앉은 것만 같다. 문어곱창전골은 쫄깃한 식감의 문어와 곱창 등을 골라 먹고 자작하게 남은 국물에 볶음밥(2000원)을 해 먹는 게 코스다. 음식이 전반적으로 깔끔하다.

고성 '천진해변' 전망 맛집인 '남경식당'의 문어곱창전골.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가진읍 가진해변 부근의 카페 테일은 동네 안쪽 1950년대 지은 키 작은 한옥을 카페로 고친 곳. 소박한 멋이 돋보이는 카페는 골목 안쪽에 있으니 전망이 특별할 것은 없지만 피크닉 바구니와 피크닉 매트 등을 들고 바다로 나가 ‘나만의 뷰’를 즐길 수 있는 ‘피크닉 세트’(커피, 디저트 포함 1인 9000원)가 유명하다. 주말엔 이마저도 선착순. 태양을 피할 수 있는 파라솔은 추가 대여(1만원)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