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이모(28)씨는 1년 6개월 동안 함께 일한 동료가 퇴사 소식을 전하자, 축하 케이크를 준비했다. 케이크에는 ‘이번 역은 퇴사입니다, 내리실 곳은 꽃길입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도비는 자유예요’ 문구와 캐릭터가 그려진 양말도 선물했다. 영화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도비는 양말을 받아야 주인으로부터 해방되는데, 이를 일종의 밈(meme·따라 하며 즐기는 온라인 문화코드)으로 활용해 퇴사자에게 양말 선물하기가 유행이 됐다.

소셜미디어에는 퇴사를 축하하기 위한 파티와 선물, 심지어 퇴사 당일을 기록한 ‘퇴사 브이로그’까지 인기다. 청년 체감 실업률 24.3%에 육박하는 시대에 입사도 아니고 퇴사가 축하의 대상이라니. 왜 그럴까?

지난 2일 서울 마포에서 연 오현정(24)씨의 퇴사 파티. 회사 동료들이 축하 케이크와 꽃다발을 준비했다.

수원의 한 대형 학원 강사로 1년 7개월 일하다 지난달 2일 그만둔 신민영(32)씨. 퇴사 당일 경기도 가평에 있는 수영장이 딸린 빌라에서 성대한 퇴사 파티를 열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 2명은 신씨를 위해 풍선과 꽃바구니, 바비큐까지 준비했다. 이날 들인 돈은 차량 기름 값을 제외해도 50만원이 넘는다. 신씨는 “연봉은 적어도 배울 게 많다는 마음으로 입사했지만, 과로와 자존감 하락으로 퇴사를 결심했다”며 “평생 공무원으로 일해 온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일이 나를 갉아먹는 기분이 든 이상 참고 일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연봉 7천 대기업 퇴사’ ‘아무튼 퇴사’ 등의 제목을 단 퇴사 브이로그도 유튜브에 꾸준히 올라온다. 퇴사 영상의 필수 요소는 말끔하게 마지막 출근을 준비하는 모습, 동료와 작별 인사하는 장면,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읊는 ‘퇴사자의 변(辯)’이다. ‘퇴사자의 변’은 퇴사한 날 집에서 카메라를 켜놓고 “자기 계발보다는 소모적인 일이 많았다” “두렵지만 더 큰 꿈을 위해 퇴사한다”는 식의 내용을 차분히 말하는 형태다.

양늘(30)씨가 직장에서 1년 6개월 간 근무하다 퇴사한 날, 파티를 열어준 동료 앞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연봉 7000만원을 받는 대기업 세일즈 마케팅 회사원이자 유튜버 문상헌(33)씨는 “스스로 결정한 퇴사라, 브이로그 올리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며 “20년 전이었다면 정신 못 차린다는 반응이 많았을 텐데, 공감해주는 댓글이 꽤 많았다”고 했다. 퇴사 브이로그를 올린 또 다른 유튜버 허윤(44)씨는 “회사는 인생의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며 “누구나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 권리가 있듯 그만둘 권리도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퇴사’는 직장인들의 유쾌한 놀이 문화로도 활용되고 있다. 가수 이민석의 노래 ‘퇴사’는 유튜브 조회 수 92만 회를 기록했다. 댓글에는 “아침 출근송으로 제격” “고용노동부가 노래를 유해 콘텐츠로 분류할지도 모른다”는 반응이다. 일명 ‘퇴사 짤(인터넷상 그림이나 사진)’을 동료가 모여 있는 단체 카톡방에 공유하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 위장약 개비스콘의 TV 광고를 패러디한 장면 등이 인기다. 개비스콘 패러디는 야근이나 주말 출근 등으로 속이 꽉 막힌 모습과 ‘퇴사’라는 약을 먹은 뒤 개운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대조해 놓았다.

퇴사 축하 케이크. /오원더

채용 플랫폼 ‘사람인’이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1년 이내 조기 퇴사자’ 현황을 조사한 결과, 신입사원 중 조기 퇴사를 하는 비율은 평균 28%. 10명 중 3명 정도는 1년을 못 버틴 셈이다. 조기 퇴사의 첫 번째 이유는 ‘개인의 만족이 훨씬 중요한 세대라서’(60.2%, 복수응답). 1년 이내 퇴사자 유형으로는 ‘대졸 신입사원’(46.9%, 복수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들 기업 중 85.8%는 ‘조기 퇴사를 막기 위해 노력 중’이라 답하기도 했다.

퇴사 축하 케이크. /오원더

전문가들은 ‘평생 직장’ 개념이 옅어지면서 퇴사를 축하하는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엔 퇴사를 낙오로 여겼지만, 요즘은 새로운 도전을 위한 준비로 보기 때문에 축하 분위기가 생긴 것”이라며 “불합리를 억지로 참기보다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