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하는 장기표의 아내다. 스물여섯 살, 수배 중이던 ‘거리의 혁명가’를 만나 45년을 살았다. 왕십리 중앙시장 다방에서 결혼을 서약한 지 석 달 만에 구속된 남편은 10년의 도피, 10년의 옥살이를 반복했고, 꽃 같던 여인은 남편 옥바라지에 두 딸 키워내느라 손에 매니큐어 한번 발라볼 틈 없이 나이를 먹었다. 서대문경찰서에서 단식 투쟁에 들어간 남편에게 죽이라도 먹이려 찾아갔던 날을 기억한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형사과장이 말했다. “이제 보니 장기표가 호랑이 등에 업혀서 사는 거였네. 부인을 보니 알겠네.”
전태일 분신, 민청학련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민주화 운동 한복판에서 남편 못지않은 수난과 고초를 겪었으나, 정작 조무하는 담담했다. “옛날엔 내가 특별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나이 드니 알겠더라구요. 누구나 다 특별하게 살고 있다는 걸. 누구나 우리 못지않게 산전수전 겪으며 저마다의 인생을 치열하게 산다는 걸.” 10억원에 달한다는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거부한 이유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건 남편 장기표뿐이다. 재야의 ‘동지’였던 이부영·김근태·이재오·김문수는 제도권에 들어가 명성과 권력을 누렸는데, 장기표는 “내가 추구하는 정치가 아니다”라며 ‘안 되는 길’로만 골라서 갔다. 창당과 출마를 거듭했다 실패한 것만 일곱 번. 거덜날 살림도 없지만 논술 교사로, 문화센터 강사로 뛰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내는 선거철만 돌아오면 가슴이 내려앉는다. “남들은 영원한 재야, 천연기념물 이러면서 존경한다는데, 제가 볼 땐 그냥 바보예요, 바보(웃음).”
남편 모교이자, 자택 근처인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앞에서 조무하(71)·장기표(76) 부부를 만났다. 장기표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 20일 전이다. 이달 5일, 남편의 느닷없는 출마 선언에 전화로 다시 만난 조무하는 “이젠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며 웃었다. “청룡열차가 정해진 목표도 없는데 점점 끝을 향해 달리는 느낌이랄까요.” 교사 출신의 강직한 성품을 지닌 아내 앞에서 장기표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앉아 있었다.
# 많은 사람들이 문통과 더민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약자의 편에 서는 점’으로 꼽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이 약자의 편에 서는 경우는 자신들 가진 것이 침해되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만 그렇다. 장기표는 다르다. 그의 삶은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초지일관된 노력의 연속이었다. 취할 수 있는 무수한 유혹들을 뿌리치고 소위 ‘안 되는 길’만 고집함으로써, 그동안 쌓았던 명예와 동지들을 잃었다.
-작년 총선 때 정연두 서울시립대 교수가 경남 김해로 출마한 장기표를 지지하며 올린 글이 화제였다. ‘안 되는 길’ 고집하지 말고 이제 좀 편하게 살면 안 되나.
장기표(이하 장): “안 되는 길을 고집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어릴 때부터의 일념, 다른 하나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믿어서다. 사람들은 내가 민중·민주·정의·노동 같은 거창한 가치를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나의 행복 때문이었다. 신앙의 궁극적 목표가 자기 구원이듯 민주화운동이 내겐 신앙이었다.”
조무하(이하 조): “아유, 그럼 혼자 살았어야지(웃음).”
-아내와 두 딸의 삶도 배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조: “이 양반은 자기 이념, 자기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관철하려는 욕심이 하늘을 찌른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 소설책이나 보며 편히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맞으니 참 힘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참고 사셨나.
조: “저 양반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꼭 나쁜 일은 아니니까. 많은 이가 ‘장기표는 참 이상적이다’라고 하는데, 그건 ‘저 사람 참 바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도 바보같이 살자, 했다. 다 내려놓고 흘러가는 대로….”
-조무하가 없었으면 오늘의 장기표도 없었겠다.
조: “이이는 평생 여성들 도움을 받고 산 사람이다. 어머니, 형수, 그리고 두 딸들까지. 수배돼 도망 다닐 때도 그 집 여성분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숨어 지낼 수 없었다. 그 세월이 기니 우리가 모르는 도움의 손길도 많았다. 나중에 소문으로 들으니 우리 때문에 곤욕을 치른 분들도 계시더라. 죄송할 뿐이다.”
-둘이 동시에 감옥에 간 시기도 있었다.
조: “처음엔 남편이 재판받는 법정에서 소란을 피웠다고 48시간 유치장에 갇혔다. 6~7년 뒤엔 아예 구속돼 넉 달인가 집을 비웠다. 큰애가 6학년이었는데, 우리가 구속돼 있을 때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하더라. 나중에 들으니 엄마 아빠가 힘든데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공부를 잘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지금도 마음 아픈 기억이다.”
-딸들은 어떤 일을 하나?
조: “둘 다 박사 후 과정이다. 큰애는 과학사회학, 작은애는 국제정치. 장 선생이 우리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 자립심이다(웃음). 어디다 내놔도 제 밥벌이는 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영역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허리띠 졸라매고 대학원까지 공부시켰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했더라.
조: “수배당해 도망 다니는 남자 뒷바라지 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5·18광주민주항쟁 터지고 남편과 함께 도피할 상황이 되면서는 학교도 그만둬야 했다. 이후로는 아이들 교습소, 논술 교사, 온갖 문화센터를 전전하며 가르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았다면 좀 더 여유 있게 살지 않았을까.
조: “신청 서류를 써 내라는데 구차하더라. 솔직히 쪽팔렸다. 나는 외국 정상들이 무명 용사들 묘에 헌화하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다. 누구나 자기 영역에서 치열하게 고생하며 산다. 무슨 특별법, 이런 걸 자꾸 만드는데 그들은 자존심도 없는 건가.”
-그래도 미련이 남을 것 같다.
조: “처음 보상금을 준다고 한 게 1995년 김영삼 정부 땐데, 젊어서 그랬나, 그때는 이렇게 힘들게 살 줄 몰랐다, 하하!”
장: “받아도 되는 돈을 안 받은 게 아니다. 받으면 안 되는 돈이라 안 받은 거지. 농사 짓는 사람,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 그런데 민주화운동 했다고 보상을?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5·18 보상법에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게 한 건 위헌이란 판결을 내렸더라. 정신적 피해 위자료도 청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파렴치한 짓이다.”
# 세상이 다 나를 칭송하더라도 당신이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칭송은 내게 헛된 것이며, 세상 사람이 다 당신에게 위로의 말을 할지라도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의 말 한마디에 어떻게 비길 수 있겠소?
-이 명문이 적힌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가 1988년 출판됐다. 책이 나왔을 때 저자인 장기표는 감옥에 있었다는데, 지금도 이 마음, 변함 없으신가.
장: “물론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 장기표가 훌륭하다 해도 집사람이 ‘당신은 형편없어’ 하면 완전히 황이지, 하하!”
조: “그 당시엔 좋았는데 지금은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들린다(웃음).”
-수배 중으로 쫓겨 다니던 남자가 왜 좋으셨나?
조: “도망 다니는 형편인데도 그 집 어르신들 챙기는 마음 씀씀이가 따뜻하더라. 빨래, 설거지 등 숨어 있는 그 집 살림살이를 도맡아했다. 그때 내가 프랑스 68운동, 시몬느 베이유, 창비 책들을 한창 읽을 때라 되지도 않는 정의감이 있었고(웃음).”
-왕십리 중앙시장 다방에서 커피 한 잔 놓고 결혼했다는 게 사실인가.
장: “둘 다 커피를 좋아해서. 그날 날씨가 참 좋았다.”
조: “측은지심이었던 것 같다. 도망 다니는 처지이니 사랑도, 돈 버는 여자도 필요하지 않았을까(웃음).”
-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가 당시 운동권 남녀들의 연애 교본이었다고 하더라.
장: “교도소에서 이불 덮어쓰고 쓴 책이다. 도망 다닐 때 날 숨겨준 집의 따님이 결혼을 한다는데 선물할 게 딱히 없어서 사랑학을 써봤다. 사랑의 자기 구원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도 사랑받는 기술이 아니라 사랑하는 기술이다. 예수가 설파한 사랑의 본질도 그것이다.”
-종교가 기독교인가?
조: “신자는 아니지만, 이이가 감옥에 있을 때 둘이서 매일 한 장씩 신약성경을 읽어나갔다. 밤 10시로 시간을 정해놓고 남편은 교도소에서, 나는 바깥에서. 성경 구절도 좋지만 장 선생의 해석이 참 좋았다. 그런 건 인정한다(웃음).”
-어떤 구절을 가장 좋아하나?
조: “하늘을 나는 새들도, 들에 백합도 다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는데 너희들한테 안 주겠느냐 하는 말씀. 너무 힘이 되고 고맙더라. 요즘은 범사에 감사하란 말씀으로 산다.”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나.
조: “구속됐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이 양반 선거 출마했을 때. 그럴 땐 도서관에 가서 온갖 수기를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다. 나보다 더 힘들게 산 사람들이 쓴 책을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읽으면서 힘을 얻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책을 전혀 이해도 못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적도 있다(웃음).”
-득도의 경지에 올랐을 것 같다.
조: “장 선생이 사상가네, 경세가네 해서 책을 많이 냈는데 언제부턴가는 내가 더 책을 많이 읽으니 요즘은 (남편이) 아래로 보인다(웃음).”
장: “나 같은 사람 만나서 당신이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며 살게 된 거지.”
조: “봐라. 모든 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다, 하하!”
# 장기표씨가 어떤 사람이냐고 누가 내게 물을 때면 나는 한마디로 “그는 순수한 사람이다”라고 대답한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어부의 노래를 그는 알지 못한다. 세상이 다 취해도 홀로 깨어 있으려고 하는 그 지나친 순수함이 그의 병이요, 그의 죄이다.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장기표는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란 제목으로 조영래가 쓴 칼럼이 지금도 회자된다.
장: “난 어릴 때부터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사람이다. 대학 들어와 1학기를 마쳤는데, 여기 다녀서는 세상을 못 바꾸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김용기 장로의 가나안농군학교에 갈까도 생각했는데 근검절약만 강조하니 이 또한 세상을 바꾸는 길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번 위인 조영래가 찾아왔다. ‘장형, 학교 그만두지 말고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꿔봅시다’ 하더라. 내가 사는 법률연구원(고시원)과 조영래 집을 오가며 함께 공부하고 함께 민주화 투쟁을 했다.”
-왜 어릴 때부터 세상을 바꾸고 싶었나?
장: “지독한 가난에 대한 분노. 장리쌀을 아나? 춘궁기에 쌀 한 가마 빌리면 추수기에 한 가마 반을 갚는 것인데, 그걸 못 갚아 우리 집을 비롯한 빈농들은 가난에 몸부림쳤다.”
-운동권인데 군대, 아니 월남전까지 다녀왔더라.
장: “어릴 때부터 군대 기피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전쟁 직후라 더 그랬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했다. 67년에 베트남 파병 부대로 입대했다. 차출이 왔는데 3000원을 주면 안 갈 수 있었다. 그것도 싫었다. 요즘 말로 내로남불 아닌가.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고 나로서는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위험한 상황도 많았을 것 같다.
장: “구정 대공세 때 한국군이 많이 죽었다. 고엽제도 엄청나게 쏴서 밀림이 단풍이 들 정도였다. 그땐 그게 병이 된다는 걸 몰라 정글화 신고 물 웅덩이에 들어가 첨벙거렸다. 더우니까.”
조: “난 저이가 고엽제 환자인 줄도 모르고 결혼한 거다(웃음).”
장: “살이 떨어져 나가는 사람, 심장이 망가진 사람도 있는데 난 운이 좋아 가려움증으로만 앓았다. 개뼈다귀를 구해서 긁고 또 긁었다. 고엽제를 앓으면서 피부병 연구도 많이 했다. 독성을 땀을 통해 뽑아내야겠다 결심하고 교도소에 있을 때도 매일 땀을 흘리며 살았다.”
-조영래가 쓴 대로, 가난한 농꾼의 아들이 서울법대까지 들어왔으면 육법전서 한 가지만을 의지해서 판검사로 출세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터무니없는 자존심, 타협을 모르는 지나친 강직함이 장기표의 죄’라고도 썼더라.
장: “날 보고 이상주의자라고 하는데, 난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길을 가는데 술 취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 그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상주의자인가? 아니다. 그야말로 현실주의자다.”
-그럼 제도권 정치로 들어갔어야 하지 않나.
장: “제도권에선 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들은 내 사상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정연두 서울시립대 교수는 장기표는 투사이기 전에 사상가라고 했다. “실패한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을 누구보다 열심히 모색해온 장기표는 민주시장주의에 기반한 복지국가 건설을 꿈꾼다”고 썼다. 장기표 사상의 핵심은 노동이 ‘부가가치 생산을 위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시장이 이윤 추구의 장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장이 된다는 것이다.
-장기표의 이상대로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장: “그렇게 안 하면 망한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대량 실업, 소득 양극화, 팬데믹, 인간성 상실을 막을 수 없다.”
-사상가로서 이를 구현해줄 현실 정치인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장: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그 사람의 의식을 결정한다고 했다. 자본가 계급은 자본가의 생각을, 노동자 계급은 노동자의 생각을 갖게 된다는 건데, 난 동의하지 않는다. 돈 많은 사람 중에도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고, 노동자 중에도 악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난 ‘생활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통찰력은 머리가 좋거나 책을 읽어서 얻는 게 아니다. 자기 생활이 바라야 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강렬한 의지가 있어야 올바른 전략이 나온다. 그것이 내가 현실 정치를 하려는 이유다.”
-정치인이 아니라 성직자를 했으면 어땠을까.
장: “도망 다닐 때 태종사란 절에서 법명도 받고 사미계도 받았다. 천수경도 외워 독송한다. 규율 하나는 잘 지키는 사람이라 목사나 신부가 됐어도 잘했을 거다. 하지만 정치를 통하지 않고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조: “이런 비유가 맞는지 모르지만, 촌에서 자라서 그런지 이이는 상당히 용감하다. 가슴에 책보 둘러매고 앞만 보고 질주하는 딱 그런 스타일. 자기가 내린 결론에 조금도 의문을 갖지 않고 회의하지 않는다(웃음).”
# 사랑이 넘칠 때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인 것이다.
-장기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장: “전태일. 제대로 배운 적 없는데도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청년이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기 한 몸을 버려야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사랑이 넘칠 때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인 것임을 일깨워준 사람이다.”
-박근혜에게 최순실 1명이 있다면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10명 이상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엔 전태일이 없다고도 했다.
장: “마르크스주의는 1980년 가을부터 범람했다. 주체사상은 85년부터다. 나는 운동을 1960년대 중반부터 한 사람이라 그런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는다. 신출내기 운동권들이 마르크스와 레닌을 따르고 북한을 숭배한다. 학생들이 주장하면 우~ 따라가고, 노동자들이 주장하면 또 우~ 따라간다. 민주노총만 해도 87년 6·29항복을 받아낸 뒤 해방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오히려 한국노총이 혹독한 독재 시절 탄압받아가며 노동조합을 만든 사람들이다.”
-장기표가 극우화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장: “나는 태극기 집회에는 가지 않는다. 촛불 시위에는 매번 나갔다. 국민을 이기는 정권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중형을 받을 만큼 죄를 지었나.
장: “그렇지 않다. 구속해서도 안 되는 거였다. 사면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생각이 있는 사람인가 싶다.”
-현 정권을 비판하면 함께 민주화 투쟁했던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나.
장: “민주화운동을 타락시킨 건 이 정권이다. 목숨 걸고 싸운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부심을 땅에 떨어뜨렸다.”
-장 선생이 준 선물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
조: “옥살이 끝난 뒤 이이가 처음 간 외국이 중국인데, 옥으로 된 분홍색 목걸이를 사왔더라. 그게 우리 결혼 생활에서 전무후무한 선물이다.”
-남편에게 준 선물은?
조: “옥바라지 하나는 정말 미친 듯이 했지. 5·3 인천 사태로 구속됐을 땐 매일매일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래야 교도소에서도 이 사람을 무시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빠 얼굴 잊을까 봐 아이들도 자주 데리고 다녔더니 하루는 큰애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이러는 거다. ‘엄마, 글쎄 내 짝은 서울구치소를 몰라’, 하하!”
-다시 태어나도 장기표와 결혼하시나?
조: “아유~ 안 한다. 누구와도 안 하고 혼자 살 거다. 자유롭게!”
아내가 보낸 엽서의 여백에 깨알 글씨로 빼곡히 답장한 편지를 책으로 묶은 것이 ‘장기표 옥중서한-새벽노래’다. ‘김대중 옥중서신'에 못지않은 진보 진영의 명저로 꼽힌다. 인터뷰 다음 날 장기표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내의 말은 살면서 처음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어젯밤 모처럼 둘이서 맥주 한잔 했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