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전봇대 아래에 수리부엉이 한 마리가 힘 없이 앉아있어요!”
지난달 25일 경기도 용인시청 문화예술과 사무실로 한 중년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천연기념물이니까 빨리 와서 구조하시라”고 했다. 이서현(41) 문화재팀 학예사가 인근 소방서 협조를 받아 ‘출동’했더니 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 달에도 몇 통씩 이런 전화를 받아요. 몇 년 전엔 자기 집 아파트 베란다에 황조롱이가 둥지를 틀었는데 새끼를 부화해 너무 시끄럽다고, 아이가 고3인데 공부에 방해되니 빨리 제거해달라는 민원도 받았어요. 지자체 학예사들은 늘 겪는 일입니다.(웃음)”
◇지자체 학예사는 힘들어
이씨는 11년 차 학예사다. 2010년 경기도에서 주관한 학예연구사 채용 시험에 합격한 후 용인시청에 배정받았다. 이씨처럼 전국 지방자치단체에는 문화재 업무를 담당하는 학예사 직군이 있다. 서울시 같은 대규모 지자체는 소속 학예사가 두 자릿수이지만, 상당수 시·군·구청에선 학예사 1~2명이 일당백(一當百)으로 일한다. 이씨는 “용인시청은 5년 전까지 저 혼자였다가 현재 3명으로 늘었지만, 일은 그보다 더 많이 늘었다”며 “국보·보물·사적 등 지정문화재 관리, 조사, 발굴 감독은 기본이고 활용, 방재 시스템 관리, 학술 용역과 유물 보존 처리까지 직접 한다. 집중호우로 성벽 담장이 무너지면 보수 정비도 하고, 천연기념물 구조 등 각종 민원에도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31년간 현장을 뛰고 지난달 말 퇴임한 이채경 전 경주시청 문화재과장은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으로 통한다. “경주 시내 역사부터 유물에 얽힌 사연까지 별별 희한한 질문이 쏟아지고, 모른다고 하면 ‘학예사가 그것도 모르냐’는 비아냥을 받았다. 그 소리 듣기 싫어서 공부하다 보니 잡학다식한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박종수 원주시역사박물관장은 “문화재청 직원 수백 명이 나눠서 하는 전문 분야의 일들을 홀로 감당해야 하니, 지자체 학예사들은 ‘내가 바로 우리 지역의 문화재청장’이라는 사명감으로 일한다”고 했다.
이들이 현장에서 겪은 경험담만 모아도 책 한 권이 나올 정도. 박 관장은 원주 치악산 주변 도로에서 쓰러진 산양을 등에 업고 내려왔고, 이 전 과장은 “천연기념물 새가 날개를 다쳤으니 어서 와서 구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뛰어 갔더니 칠면조였다.
여름철엔 ‘풀과의 전쟁’이 벌어진다. 이서현 학예사는 “성벽이나 석탑 등 문화재 주변에 잡초가 너무 빨리 자라는데 보통은 인부를 고용해서 제초 작업을 하지만, 지나가다 눈에 보이면 직접 손으로 뽑는다”고 했다. 박종수 관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도 문서 제목에 ‘문’자만 박혀 있으면 전부 학예사에게 맡겼다. 문화재, 문화예술, 문화원 지원, 지역 축제, 지명(地名) 관리, 음반·비디오 단속 업무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며 “지금도 가장 큰 문제는 학예직을 ‘행정 보조'로 여긴다는 것”이라고 했다.
◇학예사? 어디에 있는 절인고?
“자넨 누구인가?” “학예사입니다.” “학씨인가? 그런 성씨가 있나?”
A군청 학예사가 실제 겪은 일화다. B시청 학예사는 “윗분에게 학예사라고 소개했더니 ‘하계사’로 잘못 알아듣고, 어디에 있는 절이냐고 되묻더라”고 했다. 학예사라는 직급 자체가 생소하다 보니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담당 과장조차 외부 인사 앞에서 ‘해설사’라고 소개하거나 ‘안내원’으로 불린 경우도 있다.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 가치를 높이는 문화재 행정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는데, 일선 현장에서 정책을 실행하는 전문 학예 연구 인력에 대한 인식과 처우는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지난 2019년 지자체 학예연구직 공무원 연합단체인 ‘전국학예연구회'를 결성하고,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본격적인 단체 행동에 나섰다. 연구회에 따르면 현재 전국 지자체 학예직은 1000여 명. 계약직 비율이 절반 가까워 업무의 연속성이 떨어지고 만성적 고용 불안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문화재 관리 인력 턱없이 부족
지자체 학예직 인력이 지역별로 제각각인 이유는 관계 법령이 미비하기 때문이다. 현재 학예연구직 배치에 관한 법은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6조’로, 지자체에 등록된 공립박물관은 학예사를 1명 이상 두게 돼 있다. 하지만 지자체 문화재 업무 학예사 배치에 관한 법 규정은 따로 없다 보니 지자체장의 관심과 의지에 따라 학예사 지위와 처우가 천차만별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경북 문경시청 엄원식 문화예술과장은 “문화재 업무에 학예연구직 전문 인력을 법정 배치할 수 있도록 문화재보호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자체의 지정문화재 수량과 매장 문화재 면적 등에 비례해 학예 인력을 늘릴 수 있도록 문화재보호법에 전문인력 자격과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경환 문화재청 차장은 “미국의 문화재보호법에는 주정부 문화재담당관, 부족 문화재담당관, 심지어 일부 연방 정부기관에도 문화재담당관(FPO)을 두도록 하고 있다”며 “우리도 중앙정부의 정책 기능 강화와 함께 지방정부의 현장 관리가 균형 있게 조화되는 문화재 관리 체계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턱없이 부족한 지방의 문화재 전문 인력 보강이 시급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