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독립 영화관인 에무시네마 옥상에서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의 명대사가 흘러나왔다. 에무시네마는 지난 6월부터 왕가위·히치콕 감독의 작품을 야외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별빛 영화제’를 열고 있다. 그중에서도 왕가위 감독 작품은 예매가 1분 만에 마감되는 높은 인기에 앙코르 상영까지 했다.

지난 8일 영화를 관람했다는 김모(39)씨는 “TV나 온라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던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단 사실이 반가워 알람까지 맞춰서 예매에 성공했다”며 “야외 극장이라 코로나 불안감이 조금은 덜하다는 점도 좋았다”고 했다. 에무시네마는 앙코르 상영 이후에도 관객들의 문의가 계속되자, 아예 7월 말까지 영화제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영화제 외에도 7월 16~18일에는 왕가위 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하는 ‘해피 왕가위’ 기획 상영을 한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 '화양연화'(왼쪽)는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첸 부인'과 '차우'의 비밀스러운 만남과 감정을 다룬다. 에무시네마에서는 옥상에 설치된 야외 스크린에서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상영하는 '별빛시네마(오른쪽)'를 운영 중이다. /왓챠, NK 제공·에무시네마

◇20년 전 개봉작 화양연화, 11만명 동원

올해 영화계의 화두는 단연 ‘왕가위’인 듯하다. 지난해 12월 말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 리마스터링’은 재개봉작인데도 박스오피스 2위까지 오르더니, 코로나란 악조건을 뚫고 누적 관객 11만명을 돌파했다. 2000년 개봉한 화양연화는 2016년 BBC가 선정한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2위에 오른 작품이다. 영상과 음향을 보강한 리마스터링(remastering)을 거쳐 다시 스크린에 걸렸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인 왓챠도 지난 3월 ‘헐 왓챠에’ 시리즈를 통해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온라인상에 독점으로 공개했다. 공개 직후 ‘중경삼림 리마스터링’과 ‘화양연화 리마스터링’이 그 주 왓챠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 1·2위에 나란히 오를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왓챠 허승 이사는 “‘헐 왓챠에'는 해리포터 등 이용자들의 요청이 많았던 콘텐츠를 수급해서 소개하는 기획”이라며 “왕가위 감독 작품에 대한 요청이 워낙 많았는데, 실제 이를 통해 왓챠에 입문했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고객 반응이 좋았다. 이동진 평론가가 비대면으로 진행한 왕가위 영화 GV(관객과의 대화)에도 1500명이 몰렸을 정도”라고 했다.

◇1990년대 홍콩을 통조림처럼 간직한 영화

20년이 지난 영화가 다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왕가위 감독 영화를 찾는 관객층 중에는 아예 이 영화를 처음 보는 20~30대가 많다. CGV에 따르면 화양연화의 경우 30대 관객이 34.2%로 가장 많았고, 20대가 30.2%, 40대가 18.8%였다.

에무시네마 양인모 프로그래머는 “왕가위 감독은 서사 중심이라기보다 미장센 등 이미지로 이야기를 만드는 촬영 기법이 많다”며 “젊은 층들은 이를 마치 움직이는 그림을 보듯 한다. 이미지에 친화적인 젊은 관객들과 왕가위 감독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요즘 젊은 층에게 인기 있는 레트로(복고) 열풍도 인기 견인에 한몫한다. 실제 ‘힙지로(힙한 을지로)’로 뜨고 있는 을지로 등에서는 복고풍을 표방한 가게에 ‘왕가위 감독 영화에 나올 만한 장소’라는 평가가 달린다.

최근 급변하는 홍콩의 분위기를 꼽는 분석도 있다. 왕가위 영화는 ’1990년대 홍콩을 통조림처럼 간직한 영화'란 평을 들을 정도로 당시 시대 분위기를 잘 녹여냈다. 김시선 영화평론가는 “왕가위 감독 영화 대다수는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전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라며 “지금 다시 봤을 땐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예언서이자, 돌아오지 않을 추억 같은 영화가 된 느낌”이라고 했다.

화양연화가 개봉된 지 21년이 지난 지금의 홍콩은 국가보안법 시행과 이를 반대하는 우산 혁명 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지난달 24일에는 반중(反中)성향인 홍콩 빈과일보가 26년 만에 폐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