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건희 미술관’을 서울에 짓겠다고 발표했지만, 정작 그 공간을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건지 모호하다.”

“유족 측이 이미 작품을 시기·성격별로 구분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분산 기증을 했는데, 왜 기증품 2만3000여점을 다시 한 공간에 합치려는 건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7일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관’(가칭) 건립 계획을 발표했지만 후폭풍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미술계 일각에선 “미술관을 어디에 짓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기관의 ‘성격’과 ‘의미’ 그리고 ‘임무’인데, 발표 내용만 봐서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유치전에 뛰어들었던 지방자치단체들의 반발도 계속되고 있다. ‘아무튼, 주말’이 새롭게 건립될 이건희 기증관에 대한 궁금증을 파헤쳤다.

'이건희 컬렉션' 21점을 소개하는 대구미술관 특별전 '웰컴 홈: 향연'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미술관은 개막 2주 만에 관람객 1만명을 넘어섰고, 사전 예약자만 1만2554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대구미술관

◇ 2만3000점 한곳에 모으는 것 아니다?

먼저 기증품의 통합 여부. 삼성 측은 지난 4월 고(故) 이건희 회장의 수집품 2만3000여점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고미술품 2만1600여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서양 미술품과 한국 근현대 작품 등 1400여점은 국립현대미술관에 나눠서 기증했다. 이렇게 분산 기증한 컬렉션을 다시 이건희 기증관으로 합친다는 걸까. 이에 대해 수집품을 기증받은 양대 기관장들은 “물리적으로 하나의 수장고로 합치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기증관의 성격과 활용에 관해선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게 없고, 향후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에서 논의해나갈 것”이라고 전제했지만, ‘물리적 통합’이 아니라는 데서는 한목소리를 냈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박물관에 기증한 고미술품은 그대로 박물관 소장품으로,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역시 미술관 소장품으로 등록한다. 별도의 기증관을 세운다고 해서 2만3000여점을 한곳에 모아 넣는 게 아니다”라며 “양쪽 기관 수장고에 그대로 보관하되, 새로 건립되는 기증관에선 고미술부터 근현대 작품까지 ‘이건희 핵심 컬렉션’을 상설 전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증관은 ‘저비용 고효율’의 전시관이 될 것이고, 인력을 최소화하면서 전시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필요할 때마다 양쪽 기관의 수장고에서 작품을 가져와 전시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도 “수집가의 기증 정신을 기리는 공간을 새로 지어서 작품을 한자리에서 본다는 것이지, 하나의 수장고에 넣는다는 뜻이 아니다”라며 “수장고를 통합하는 건 효율성도 떨어지고, 연구·보존처리 인력을 새로 뽑아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양대 기관이 기증품을 등록·관리·연구·보존처리 하면서, 이건희 기증관은 전시의 기능만 특화해 운영하겠다는 얘기다. 새 기증관 설립을 유족 측이 동의했는지 묻자, 윤 관장은 “유족은 순수한 뜻으로 조건 없이 기증했고, 별도의 기증관을 짓는 데 대해서도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전했다.

'이건희 컬렉션' 21점을 소개하는 대구미술관 특별전 '웰컴 홈: 향연'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미술관은 개막 2주 만에 관람객 1만명을 넘어섰고, 사전 예약자만 1만2554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대구미술관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처럼?

미술계 한 인사는 “싱가포르 정부의 국립박물관 운영 시스템을 참고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싱가포르에선 정부 기관인 국가유산청(NHB)이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 페라나칸 박물관, 아시아 문명 박물관 등 다수의 박물관을 통합 운영한다. 모든 전시품을 개별 박물관이 아니라 정부에서 통합해 관리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전시 작품을 교체해 활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증품은 어차피 국가 소유이고, 각 기관들은 관리의 주체일 뿐”이라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기증관 세 곳이 이건희 컬렉션을 통합적인 데이터베이스(DB) 안에서 최대한 잘 활용할 수 있는 운영의 묘를 갖춰야 할 것”이라고 했다.

문체부는 이건희 기증품 활용에 대한 주요 원칙과 활용 방안은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의 10차례 논의를 거쳐서 결정됐다고 밝혔다. 김영나 위원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굳이 별도의 기증관을 지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컬렉션 전체를 한자리에서 감상하고 기증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새 공간을 짓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민병찬 관장은 “지방에 연고가 있는 작품들은 전국 13개 소속 국립박물관으로 보내고, 해외 박물관에 있는 한국실에도 전시하는 등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이 이건희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가야 토기는 국립김해박물관, 제주도 동자상은 국립제주박물관, 신라 관련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보내는 등 가능하면 수장고에 두지 않고 최대한 많은 작품을 전시에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용산은 왜 갑자기 부상했나?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는 서울 용산과 송현동으로 압축됐다. 미술계에선 일찌감치 송현동 부지를 후보로 거론했지만, 용산은 뜻밖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용산 후보지는 용산가족공원을 일부 포함한 문체부 소유 부지(용산동 6가 168-6). 문체부 관계자는 “국립중앙박물관 바로 옆이고, 국립한글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등 20여개 대형 박물관·미술관이 모여 있어 ‘미술 인프라’를 갖췄다”며 “정부 땅이어서 별도의 부지 매입비가 들지 않고, 언제든 들어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했다.

용산이 후보지로 급부상한 건 지난 5월 용산구가 문체부에 이건희 미술관 건립을 제안하면서다. 용산구는 막강한 인프라에 더해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부터 이건희 회장까지 삼성가가 대를 이어 살아온 ‘제2의 고향’ 땅”이란 점도 부각했다.

지자체 반발과 관련, 황희 문체부 장관은 “지방으로 가면 문화향유권과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겠지만, 지자체 40여곳이 요청하는 과정에서 어느 쪽으로 가도 마찬가지의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했고, 김영나 위원장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연구와 관리였다. 여러 종류의 기증품을 조사·연구·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있는 양쪽 기관의 경험과 전문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언제든 원활하게 협력할 수 있는 서울의 두 곳이 최적의 장소”라고 했다. 문체부는 앞으로 관계기관과의 협의, 위원회의 추가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부지를 선정할 계획이다.

◇기증관 이름에 왜 홍라희는 빠졌나?

새 기증관의 이름은 가칭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관’이다. 미술계 일각에선 “왜 ‘이건희·홍라희 소장품관’이 아니고 이건희 이름만 남기나” 하는 지적도 나왔다. 삼성가의 미술품 소장에 정통한 미술 관계자 A씨는 “이건희 컬렉션 중 한국 근현대 작품과 서양 미술 작품은 물론이고, 책가도 병풍·조선시대 목가구 등 고미술 수집품에도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의 안목과 조언이 깊이 반영돼 있다”고 했다. 또다른 미술계 관계자 B씨는 “컬렉션은 이건희 회장 혼자 모은 게 아니고 부부가 함께 수집했다고 봐야 한다. 부부가 경제공동체인 데다 홍 관장은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대표 인물’에 수년간 1위에 오를 정도로 안목과 파워를 갖고 있던 사람인데, 이건희 회장의 이름만 남기는 건 많이 어색하다”고 했다.

일례로 15일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엔 ‘허동화·박영숙 컬렉션’이 있다. 자수공예 유물 수집과 연구에 헌신한 고(故)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이 생전 유물 5000여 점을 기증하면서, 부부의 이름을 공동으로 넣어 기증 증서를 작성했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는 “이건희 컬렉션도 ‘이건희·홍라희 컬렉션’으로 불러야 원칙적으로 맞는다. 그래야 한국 고미술부터 서양의 현대 미술품까지 시대·종류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수집한 컬렉션의 본질을 살릴 수 있다”며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있는 가부장적 인식 체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