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인은 내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다. 우주에 가면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지난 2006년 우주인에 도전하면서 이 말을 한 사람이 있다. 뜻밖에도, 정재은(82) 신세계그룹 명예회장이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아버지인 그는 67세 나이로 한국인 최초 우주인 선발에 참여했다. 지원자 3만600명 중 최고령. 최종 탈락했지만, 고령의 재벌가 인사가 우주인에 도전해 화제가 됐다. 당시 정 명예회장 외에도 기업 CEO 출신 인사 10여 명이 도전장을 냈다.
그즈음 국내 재계에 분 우주인 붐은 세계 유명 기업가들이 우주 여행에 슬슬 시동 건 것과 무관치 않다. 2001년 미국 금융회사 월셔 어소시에이츠 설립자인 데니스 티토가 민간인 최초로 자비를 들여 우주 여행을 했다. 이후 미국 사업가 그레고리 올슨,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업가 마크 셔틀워스 등도 수백억원을 주고 ‘우주 여행자’ 타이틀을 땄다.
20여 년이 지난 2021년, 민간인 우주 관광이 다시 후끈 달아올랐다. 핵심 추진체는 베이조스(57) 아마존 이사회 의장, 일론 머스크(50) 테슬라 CEO, 리처드 브랜슨(71) 버진그룹 회장 등 억만장자 삼인방. 지난 11일(현지 시각) 브랜슨이 자신이 세운 우주 관광 회사 ‘버진 갤럭틱’ 우주선을 타고 1시간 만에 86km 상공에 도달한 데 이어, 베이조스가 지난 20일 자체 개발한 우주 여객선 ‘뉴셰퍼드’를 타고 우주 경계선(100km)을 넘어 106km까지 올라갔다 10분 만에 지구로 돌아왔다. 머스크도 9월 우주 관광에 오른다.
일반인의 관심도 뜨겁다. 우주 여행 티켓 값은 작게는 2억원부터 많게는 300억원. 표를 못 구해 대기하는 사람이 수백명이나 된다. 잠재 고객이 240만 명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우주를 향한 순수한 동경일까, 차고 남는 돈을 쓰며 남과 다른 특별함을 보여주려는 과시욕일까.
◇억만장자 삼인방이 쏘아 올린 ‘우주 쇼핑’
“인류는 더 높은 땅에 더 높은 성벽을 쌓기 위해 경쟁했다. 13세기 이탈리아 귀족 가문들은 저택에 저마다 높은 탑을 세우려고 경쟁했고,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도 초고층 빌딩을 올리려는 마천루 경쟁이 벌어졌다. 이제 우주에 대한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인류의 우주 여행에 대한 관심을 이같이 표현했다.
2000년대와 2020년대 우주 여행의 가장 큰 차이는 ‘주체’와 ‘기간’이다. 과거엔 정부 소유 우주선에 올라타 우주정거장에 4~5일씩 머물렀지만, 지금은 민간 업체가 ‘여행’ 목적으로 제작한 우주선을 타고 짧은 시간 구경한 뒤 지구로 돌아온다.
가장 먼저 가시적 성과를 보인 이는 지난 11일 우주 여행에 성공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우편 주문 레코드 회사를 시작으로 항공·미디어·관광 등으로 사업을 확장한 기업가다. 브랜슨은 “나는 어렸을 때 하늘의 별을 보며 꿈꾸던 소년이었다”며 2004년 ‘버진 갤럭틱’을 세웠다.
우주 여행에 가장 먼저 발 들인 건 베이조스다. 2000년 ‘블루 오리진’이라는 민간 우주 탐사 기업을 설립했다. 최근 자신이 보유한 아마존 주식을 팔아 매년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를 블루 오리진에 투자할 만큼 애정을 쏟고 있다. 1982년 마이애미 팔메토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하면서 한 연설에서 그는 “지구 밖에 우주 호텔, 놀이공원, 요트, 식민지를 건설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머스크 테슬라 CEO는 2002년 민간 우주개발 업체 ‘스페이스X’를 세웠다. 스페이스X는 오는 9월 우주선을 쏴 540km 높이에서 사흘간 머무르게 할 예정이다. 2023년 달 관광 비행, 2025년 승객을 태우고 화성에 우주선을 보낼 계획도 세웠다. 머스크는 “인류가 다양한 행성에서 살아갈 수 있는 종(種)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10분짜리 자이로드롭 티켓이 320억원?
우주 여행에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일까. 2001년 첫 민간인 우주 여행을 경험한 데니스 티토는 러시아 항공우주국에 2000만달러(약 220억원)를 냈다. 2002년 남아공의 인터넷 컨설팅 업체 CEO 마크 셔틀워스도 21시간 25분 우주로 다녀오는 데 2000만달러를 썼다.
2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이 꿈꾸기엔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블루 오리진은 지난 20일 성공적으로 진행한 우주 여행 티켓을 지난달 경매로 팔았다. 140여개 국 6000여 명이 참가했는데, 첫 응찰가(2차 입찰)는 140만달러(약 16억여 원)이었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억만장자가 응찰가의 20배인 2800만달러(약 312억원)에 사갔다.
2018년 블루 오리진이 내놓은 ‘달 여행’ 상품은 일본의 대형 온라인 쇼핑몰 ‘조조타운’ 창업자인 마에자와 유사쿠(46)가 모든 자리를 구매했다. ‘일본판 머스크’로 불리는 그는 자산 20억달러(약 2조2600억원)로 포브스 선정 일본 부호 순위 30위에 오른 인물. 유사쿠는 정확한 구매 가격은 밝히지 않았지만,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상품도 있다. 버진 갤럭틱은 우주 여행 티켓을 약 25만달러(2억8000만원)에 내놨는데, 할리우드 스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저스틴 비버, 브래드 피트 등 600여 명이 티켓을 샀다. 대기자가 7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안형준 연구위원은 “블루 오리진 동영상을 보면 10분짜리 자이로드롭 같은 놀이기구처럼 보인다. 돈이 있다고 모두가 꿈꾸는 여행은 아니다. 안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모험심이 강한 사람들이 우주 여행을 한다”고 말했다.
억만장자만 우주 여행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화성탐사선 발사 기념 이벤트로 ‘화성에 이름 보내기’라는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이름·국가·이메일 주소 등을 입력하면 화성행 탑승권을 발행해주고, 작은 칩에 신청자 이름을 모두 새겨 넣어 탐사선에 실어 화성에 보내는 이벤트. 지금까지 전 세계 2000만 명 이상이 응모했다. 이벤트에 참여한 산업디자이너 김모(41)씨는 “미지를 현실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진취적인 도전과 순수한 열정에 매력을 느껴 참여했다”고 말했다.
◇순수한 동경인가, 하이엔드 쇼핑인가
작년 8월 미국의 투자은행 코웬 조사 결과, 자산이 500만달러(약 57억원) 넘는 사람들 가운데 39%가 ’25만달러를 주고 버진 갤럭틱의 우주 여행을 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우리로 치면 서울 강남에 50억원대 고급 아파트를 한 채 정도 가진 사람 가운데 2억원 넘게 내고 우주 여행을 가겠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주 관광을 꿈꾸는 심리는 뭘까. 카이스트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개발기획실장을 지낸 박성동 쎄트렉아이 이사회 의장은 “우주 여행에 나서는 사람들은 무중력을 체험하면서 지구의 곡면을 보고, 발밑에 펼쳐지는 파란 바다와 별이 빛나는 검은 하늘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수억원을 들여서라도 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별종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우주 역사학자인 조던 빔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욕망이 강한데, 이것이 우주 여행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숙명여대 심리학과 최지연 교수는 “어떤 개인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 주는 일관적인 심리적 경향성을 특질(trait·特質)이라고 하는데, 우주 여행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러 특질 중에서 경험에 대한 개방성, 다시 말해 새롭고 다양한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 높다고 봐야 한다”며 “성취 욕구와 인정 욕구가 작용한다는 면에서는 하이엔드(최고 품질) 쇼핑과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우주는 갈 방법도 없고, 갈 수 있는 곳도 거의 없다. 오직 극소수의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다는 강렬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우주 공간은 계층과 신분을 나누는 마지막 경계선이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우주선 낙하할 평지 부족한 한국
국내에도 2000년대 민간 우주 여행을 꿈꾸던 벤처기업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업을 접었다. 안형준 위원은 “한때 금방 우주 여행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지만, 기술이 뒤따라주지 못하면서 투자자들이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박성동 쎄트렉아이 이사회 의장은 “로켓을 100km까지 보내는 기술은 조금만 보완하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며 “사람을 태워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안정성이 담보돼야 하는 점, 우주선이 낙하할 수 있는 넓은 평지가 부족하다는 점 등이 장애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