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00년, 정부는 2년 뒤 있을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파리에는 에펠탑이 있고 런던에는 타워브리지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는 마땅히 랜드마크라 할 만한 게 없단 말이야.’ 그래서 정부는 국가를 상징할 만한 조형물을 상암동에 건립하기로 한다. 치열한 공모전 끝에 당선작이 나왔다. ‘천년의 문’이란 이름을 가진 이 원형건축물은 영화 ‘스타게이트’에서 외계와의 통로 역할을 했던 게이트를 연상케 하는 근사한 것이었다. 직경은 무려 200m에 달하며, 건축물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어서 서울시 전역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데, 조감도를 보면 도보나 차량을 이용해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질 것 같다. 서울의 랜드마크 기능을 확실히 해냈을 이 건축물은 아쉽게도 건립이 무산된다.
이유는 돈 때문. 당시는 IMF 사태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때라 이 건축물에 소요되는 550억원을 충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예산낭비라는 지적이 쇄도하자 정부가 그냥 포기해 버린 것이다. ‘천년의 문’이 다시 화제가 된 건 작년 여름, 이 건축물의 조감도가 인터넷에 소개된 뒤였다.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이렇게 말했다. “세련된 외양이 한강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그냥 만들었다면 서울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됐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경제 사정이 어렵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꼭 써야 할 돈은, 쓰는 게 낫다.’
이 교훈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코로나로 인해 외환위기에 버금갈 만큼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는 2021년에도 여러 건축물이 건립 중이거나 계획 단계에 있다. 천년의 문처럼 그때 지을 걸, 하고 후회하느니 꼭 필요한 건축물이라면 짓는 게 낫다. 문제는 그 건축물들이 필요성을 충족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예컨대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짓겠다는 박종철 센터를 보자. 총 사업비 9억 8천만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만들어질 이 건축물은 ‘박종철 열사의 정신을 기리는 민주주의 교육의 장’으로 쓰일 예정이란다. 박종철 열사는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다 붙잡힌 뒤 1987년 물고문 끝에 사망하신 분이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 6월 항쟁이 일어났는데, 이 스토리는 영화 <1987>로 만들어진 바 있다.
이런 분을 기념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사전평가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반대를 해버렸다. 십중팔구 적폐세력의 준동으로 여기겠지만, 이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인 2019년의 일이다. 도대체 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현 정권이 땅값을 많이 올려준 덕분에 10억 남짓한 돈으로 살 수 있는 땅이 거의 없었다는 게 그 하나다. 이 문제는 민주화 유공자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쓰는 현 정부가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다음 이유를 들으면 말문이 막힌다. 박 열사의 고문치사 현장인 용산구 남영동에 이미 기념관이 건립돼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 열사가 훌륭한 분이긴 하지만 서울의 두 곳에서 경쟁적으로 그를 기념하는 건 낭비 아니겠는가? 하지만 추진위원회는 아예 문체부의 사전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센터’ 형식으로 건물을 짓기로 했단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 기념관은 정말 박 열사를 기리기 위한 것일까?
종로구 원서동에 건립 중인 ‘노무현 시민센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종로라고 하면 깜짝 놀랄 분들이 계실 것이다. ‘아니, 노무현 시민센터는 봉하마을에 있지 않나? 생가와 묘역도 거기 있을 텐데?’ 하지만 봉하마을에 있는 건 ‘김해 깨어 있는 시민문화체험전시관’이며, 총 사업비 178억 (국비 89억, 시·도비 89억)을 들여 건립됐다. 여기엔 노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활동에 관한 사료가 전시돼 있지만, 정작 건물명엔 ‘노무현’이란 이름이 빠져 있다. 왜일까? 그래야 종로에 ‘노무현 시민센터’를 당당하게 지을 수 있어서다.
실제로 노무현재단은 종로에 짓는 기념관이 봉하 기념관과 중복이라는 언론의 지적에 대해 ‘사업 주체가 다른 별개의 사업’이라고 우겼는데, 덕분에 총 300억이 넘는 돈이 들어갈 이 건축물을 짓는 데 115억원의 국비가 투입됐다고 한다. 재난지원금도 전 국민한테 뿌리자고 우기는 마당에, 꼭 필요한 건물이라면 그 정도 돈은 써도 된다. 하지만 봉하에 이미 기념관이 있는데, 고인과 별 상관도 없는 종로에 기념관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재단 측은 “미래세대에 노무현 정신을 전하기 위해” 이 건물을 짓는다지만, 노무현 정신을 계승했다는 이 정권이 하는 짓을 보면 서울과 봉하 두 군데서 노무현 정신을 전할 필요가 과연 있을지 의문스럽다. 놀라운 점은 지하 3층, 지상 3층으로 지어질 이 건축물의 평당 건축비가 무려 2천만원이라는 것이다. 김경율 회계사에 따르면 이는 일반 건물의 공사비인 500만~600만원을 훨씬 뛰어넘으며, 종로 디타워의 800만원보다도 훨씬 높단다. 혹시 천년의 문이 못 이룬 서울시 랜드마크의 꿈을 이루려는 것일까?
서울 은평구에 지어질 국립여성사박물관도 고개를 젓게 만드는 건축물이다. 2천2백평 규모에 지상 5층, 지하 2층으로 짓는다는데, 총 사업비가 268억이나 된다. 올해는 설계비 명목으로 3억원만 예산안에 반영됐지만, 2023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니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나랏돈이 퍼부어질 전망이다. 여성운동을 하는 분들은 이게 숙원사업이었다지만, 이 건물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여성 관련 문화유산을 총망라해 전시하고 역사 속 여성의 역할을 조명’하기 위함이라는데, 이미 비슷한 역할을 하는 ‘국립여성사전시관’이 고양시에 있다. 인터넷상의 소개를 보면 ‘한국 여성사의 정립과 보급을 통한 양성평등 역사인식 확대’가 목표라고 돼 있던데, 이건 국립여성사박물관이 추구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천년의 문은 미래를 지향하는 건축물이었지만,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위에서 예를 든 건축물들은 죄다 과거의 인물들을 우려먹는, 필요성이 떨어지는 것들이지만, 코로나 시대에도 불구하고 착착 추진되고 있다. 국가부채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는 이 시대에, 이렇게 돈을 써도 되는 것일까? 이미 지어진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최소한 새로 지어지는 것만은 막아보자. 그게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다.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공동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