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가 지진 피해로 무너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을 종이로 복원한 모습. /Forgemind ArchiMedia/Flickr

이번 도쿄올림픽의 최대 화제는 뜻밖에도 ‘골판지 침대’였다. 선수촌 방마다 설치된 이 침대를 두고 온갖 조롱과 혹평이 쏟아졌다. 미국 뉴욕포스트는 “성관계 방지용 침대”라 명명했고, 뉴질랜드 조정 대표팀 선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마자 프레임이 찌그러지는 영상을 공개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급기야 이스라엘 야구팀 선수들은 “몇 명이 올라가면 침대가 무너지는지 보겠다”며 실험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8명까지 버텨내던 침대는 9명이 뛰자 망가졌고, 영상을 본 일본 네티즌들은 댓글로 “변상하라”며 분노했다.

도쿄올림픽 선수촌 골판지 침대에 앉자마자 찌그러지는 영상을 공개한 뉴질랜드 조정 선수들. /뉴질랜드 조정 대표팀 인스타그램

◇약하고 값싼 종이로 침대를?

전문가들은 “종이는 약하고 값싼 재료라는 선입견 때문에 골판지 침대가 과도하게 조롱의 대상이 됐다”고 지적한다. 장정 몇 명이 올라가서 뛰면 골판지뿐 아니라 웬만한 목재 프레임 침대도 무너진다는 것이다. 골판지는 말 그대로 종이와 종이 사이에 골을 만들어 강도를 높인 종이. 임형남 가온건축 대표는 “골판지는 ‘종이로 만든 트러스(부재를 삼각형으로 엮어서 지붕을 받치는 구조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구조적으로 강화된 재료”라며 “공기층이 있어서 일반 나무보다 통기성이 좋고, 재활용이 가능한 친환경 소재이기 때문에 인체공학적으로나 건축·환경적 측면에서 충분히 전향적인 시도였다”고 평했다.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지구와 사람을 위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지속가능성’을 강조했다. 골판지 침대 역시 ‘재활용’과 ‘친환경’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다. 폭 90㎝, 길이 210㎝. 일반적인 싱글 사이즈보다 작지만, 200㎏ 하중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제작사 ‘에어위브(Airweave)’는 홈페이지에 “코일 스프링 등을 넣은 기존의 매트리스는 사용 후 산업 폐기물 증가로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를 야기한다”며 “우리는 골판지로 프레임을 만들고, 매트리스는 재생 가능한 폴리에틸렌 소재를 썼기 때문에 선수촌에 사용된 침구는 모두 올림픽이 끝나도 재활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골판지를 휘어 만든 '위글 의자'. /비트라

골판지로 만든 가구가 처음은 아니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Gehry)는 1972년 골판지를 여러 겹으로 휘어 만든 ‘위글(Wiggle) 의자’를 내놨다. ‘종이가 내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고?’ 하는 의심은 접어도 좋다. 60여 층으로 이뤄진 골판지가 앉는 사람의 체중을 분산해 편안하면서도 튼튼하다. 탄생 당시에는 저가 가구로 제작됐으나, 1992년 가구 회사 ‘비트라’가 재생산하면서부터 독특한 소재와 디자인으로 대접받고 있다.

경기 안양시에 있는 전시관 안양파빌리온에는 골판지로 만든 원형 벤치가 있다. 건축가 신혜원 로컬디자인 대표의 작품. 그는 2014년 흔히 구할 수 있는 골판지를 친환경 옥수수 풀로 이어 붙여 지름 7.2m에 이르는 대형 원형 벤치를 만들었다. 사람이 뛰어다녀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다. 신 대표는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야 해서 종이를 떠올렸다. 싸고 가벼워 만들고 운반하기 쉬운 데다, 설치 작업 후 폐기물이 나오는 것이 안타까워 자원을 재활용할 수 있는 골판지로 작업했다”고 했다.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안양파빌리온 내부 모습. 건축가 신혜원 로컬디자인 대표가 제작한 원형 골판지 벤치에 시민들이 앉거나 누워 책을 보고 있다. /안양파빌리온
반 시게루가 2000년 설계한 독일 하노버 엑스포 일본관 내부. 종이로 지붕 돔을 만들었다. /Forgemind ArchiMedia/Flickr

◇貧者들을 위한 종이 건축

사실 일본은 건축 재료로서 종이에 대한 실험을 충분히 거친 나라다. 반 시게루(64)는 종이로 건축의 뼈대를 만들어서 유명한 건축가.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 200만명의 임시 거처를 종이로 만들면서 그의 ‘종이 건축’이 시작됐다. 1995년에는 일본 고베 대지진 이재민을 위한 가설 주택을 만들었다. 모래주머니를 채운 맥주 상자 위에 종이 튜브를 쌓아 올린 이 집은 마치 통나무집 같다고 해서 ‘로그 하우스(log house)’라고 불렸다.

반 시게루가 추구하는 건축은 약자를 위한 건축이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지진으로 무너진 대성당도 종이로 다시 세웠다. 예산의 한계, 짧은 공기(工期), 시공 인력 부족 등 기존 건축에서 걸림돌이 되던 요인들은 종이 건축 앞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종이 수백 겹을 붙여서 둘둘 말아 만든 종이 기둥은 튼튼하고 안전할 뿐 아니라 방수와 방염 처리를 해서 내구성도 지녔다. ‘종이는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깬 그는 2014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대만에 있는 '종이로 만든 교회'(Paper Dome) 야경. /Jaque Tseng/Flickr

그가 세운 종이 건축물들의 평균 수명은 50년. 첨단 공법으로 쌓아 올린 건축물 못지않다. 쉽게 찢어지고 화재와 습기에 취약한 종이로 어떻게 견고한 건축이 가능할까. 반 시게루는 저서 ‘행동하는 종이 건축’에서 “종이는 진화한 나무”라며 “재료 자체의 강도는 그것을 사용한 건축의 강도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실험을 통해 장기간 햇볕을 쪼이면 자외선의 영향으로 종이를 구성하는 내부 섬유질 구조가 변하면서 종이 기둥의 강도가 높아진다는 점을 알아냈다. 약한 종이라도 두루마리 휴지처럼 여러 겹으로 말아서 원통 기둥을 만들면 막대한 하중을 견딜 수 있다. 원통형으로 겹겹이 쌓인 종이 기둥은 같은 면적의 콘크리트 기둥이 받치는 하중의 80%를 견딜 수 있다는 실험 결과도 나왔다.

국내 종이 가구 업체인 페이퍼팝 박대희(35) 대표는 “골판지 침대는 하중을 분산하는 격자 구조 프레임이어서 웬만한 성인 남자가 뛰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며 “골판지 침대에 사용하는 올펄프 재질은 섬유질이 촘촘해서 물기가 닿아도 스며들지 않는다. 일반 택배 박스용 골판지의 발수율이 20~30%라면, 종이 가구용 골판지는 90% 이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