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10월, 프랑스. 디뉴 교구 미리엘 주교의 집에 낯선 이가 찾아왔다. 한동안 자르지 않은 더벅머리에 초라한 행색을 한 그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노란색 통행증에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장 발장, 석방된 강제 노역수. 도형장에 십구 년 동안 있었음. 절도 및 가택 침입으로 오 년. 도주 미수 네 번, 십사 년. 이 사람은 매우 위험함.’
미리엘 주교는 그를 쫓아내지 않았다. 장 발장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침대에 새 시트를 깔아주었다. 가정부가 소박한 식기에 음식을 내 오자 손님을 맞이할 때 쓰는 은제 식기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주교는 장 발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곳은 저의 집이기보다 당신 집입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당신 것입니다. 당신 이름은 저의 형제라 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묻지 않고, 그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은 채, 순수한 박애의 마음으로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미리엘 주교 모습에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느낀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철학적 화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환대’(hospitality), 그중에서도 ‘무조건적 환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환대를 두 종류로 구분했다. 흔히 생각하는 환대는 ‘조건적 환대’다. 손님이 누구인지, 주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 이번에 베푼 환대가 나중에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올지 등의 조건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따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대로 ‘무조건적 환대’란 그러한 계산 없이, 아무 질문도 고민도 없이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환대에 대하여>에서 데리다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편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환대 개념을 파헤쳐 들어간다. 그에 따르면 이방인(xenos)에게는 관용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또한 주인에게는 이방인을 환대할 의무가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현대에도 더러 남아 있다. 중동이나 서남아시아 유목민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때까지 대접한다. 알래스카의 이누이트족은 손님이 아내와 동침할 수 있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 기준에서는 터무니없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환대가 법으로 정해져 있거나 어길 수 없는 관습으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낯선 이에 대한 성대한 대접마저도 결국은 조건적 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조건적 환대란 무엇인가? ‘너는 이방인을 환대하라’는 명령과 지시가 없는데도 이방인을 환대하는 것이다. 법 없는 법이며, 명령하지 않고 요청하는 호소에 가깝다. 따라서 무조건적 환대는 이상적 지향점으로 작동할 뿐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해체(deconstruction)의 철학자인 데리다는 난해한 논의와 현란한 말장난으로 ‘악명’ 높은 사람이다. 철학이란 이름으로 비현실적 요구를 들이밀지 모른다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환대에 대하여>는 ‘환대’에 대한 서구 지성계의 통상적 논의와 결이 다르다. 무조건적 환대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현실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롯과 두 딸 이야기를 인용한다. 소돔에 사는 롯의 집에 두 천사가 사람 모습을 하고 찾아왔다. 롯은 ‘조건적 환대’에 따라 손님을 맞이한다. 그런데 악한들이 찾아와 손님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조건적 환대’를 넘어 ‘무조건적 환대’를 지향하는 롯은 두 딸을 대신 내놓으려 했다. 성경에는 마치 미담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데리다는 물음표를 던진다. 롯의 환대는 “가정의 폭군, 아버지, 남편, 그리고 어른인 집주인”의 독단적 횡포 아닐까? 이방인을 보호하기 위해 딸을 강도에게 바친다면 그러한 환대는 평화인가, 폭력인가?
우리 현실로 돌아와 보자. 아프가니스탄은 대한민국과 지리적으로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거리가 멀다. 아프가니스탄의 공식 언어는 파슈토어와 다리어인데, 통역을 구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다. 결정적으로 우리 정신 세계는 불교와 유교, 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형성된 반면 아프가니스탄 난민은 대부분이 무슬림이다. 공통점을 하나 찾다 보면 차이가 열 가지 보일 만큼 서로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환대를 필요로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민이라는 주제가 한국 사회에 제시된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실속 있는 논의로 이어진 적은 없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담론을 생산해야 할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진보 진영의 지적 게으름이 눈에 띈다. 마치 연예인이나 저명인사처럼 앞뒤 맥락 없이 무조건적 환대를 외치는 것만으로 그들의 역할을 다한 것인 양 굴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더 다양한 맥락의 난민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문화, 풍습, 종교, 인종, 언어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꾸준히 논의해야 한다. 북한이란 존재도 잊어서는 안 된다. 탈북자 또한 일종의 난민이라고 볼 때, 우리는 매년 천 명이 넘는 난민을 받고 있다. 그러나 탈북자를 야멸차게 내몰아 국제 인권 단체들의 지탄을 받던 문재인 정권은, 우리 정부에 협력한 아프가니스탄 난민에 ‘특별 기여자’ 자격을 부여해 난민에 대한 사회적 논의마저 원천 봉쇄하고 ‘국뽕’ 소재로 삼았다. 그 홍보용 사진을 찍겠다고 우리 국민인 공무원이 빗속에서 무릎 꿇고 우산을 들게 했다. 이방인을 환대한답시고 같은 국민을 학대하며, 같은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다. 문재인 정권의 환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데리다의 논의로 돌아와 보자. 무조건적 환대는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지향하면서 가능한 것의 영역을 넓혀가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은식기를 훔쳤고 발각됐지만 미리엘 주교는 은촛대까지 선물로 주며 장 발장을 감쌌다. 그 환대에 감화된 장 발장은 19년 옥살이에 따른 증오를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우리에게 찾아온 그 모든 이방인에게 우리의 환대가 기적의 씨앗이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