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에게 다가가 그 빛을 인류에게 퍼뜨리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다.”
베토벤의 말이다. 1903년 로맹 롤랑이 쓴 ‘베토벤의 생애’에 수록된 문구이다. 이 책은 1938년 일본어 번역판으로 출간되어 당시 일본과 조선의 예술가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로맹 롤랑은 베토벤의 비극적이고도 영웅적인 삶을 찬미함으로써, 일종의 ‘근대 예술가상(像)’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베토벤에 따르면, ‘예술가’란 신들의 영역과도 같은 높은 차원의 경지를 인간에게 언뜻 느끼게 하는 메신저이다. 이들은 지상에 발 디디고 있으면서도, 영원을 좇아 불멸을 꿈꾸는 이들이다.
◇베토벤을 사랑한 조각가
권진규(1922~1973)는 ‘베토벤의 생애’를 1940년대 일본 유학 시절에 읽었지만, 1971년 서울 동선동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다시 꺼내 반복해서 읽었다.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아틀리에의 그 한 평짜리 쪽방에서. 권진규는 조각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음악 때문이라고 말했다. 1943년 일본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형을 따라 도쿄에 갔을 때, 히비야 공회당에서 음악을 듣던 중 문득 ‘음(音)을 양감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라고 생각한 것이 조각가를 목표로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권진규는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다. 그의 작업실에는 항상 베토벤, 드뷔시, 바그너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친구 중에도 미술보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이가 많았다. 디터 케르너의 ‘위대한 음악가들의 삶과 죽음’을 번역한 핵물리학자 박혜일이 있었고, 베스트셀러 ‘이 한 장의 명반’을 쓴 영문학자 안동림도 있었다. 이들은 권진규가 자살하기 약 한 달 전인 1973년 3월 28일에도 서울에서 열린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연주회를 함께 다녀와서, 베토벤에 대해 얘기했다.
◇첫 스승은 ‘불굴의 화가’ 이쾌대
권진규는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태어난 작가들은 예외 없이 불행했다. 20대의 나이, 한창 대학에 다닐 시기에 1940년대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 치하 젊은이들은 학도병이나 징용에 끌려가야 했다. 권진규도 징용으로 끌려가 다치카와시(市)에 있는 비행기 부품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도망쳐, 고향 과수원에 숨어 지내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혼란은 가중되었고, 제대로 된 교육기관도 없었다. 이 와중에도 또 다른 ‘불굴의 화가’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권진규는 데생을 공부했다. 그러고는 1948년 밀항하여 도쿄로 간 후, 첫 스승 이쾌대가 다니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대학)에 입학했다. 한일 간 국교가 단절되어 거의 아무도 일본에서 유학하지 않던 때였다.
권진규의 일본인 조각 선생은 시미즈 다카시(1897~1981)였다. 그는 1920년대에 프랑스에 가서 부르델(1861~1929)에게서 직접 수학한 인물이다. 로댕의 제자이자 자코메티의 스승인 부르델! 그는 베토벤 초상을 제일 많이 남긴 조각가로도 유명하다. 약 80점 제작했다. 부르델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도 초인적인 열정을 불태웠던 작곡가 베토벤의 내면세계를 조각이라는 매체를 통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어떤 형태로 영원히 붙잡아두기를 원했다.
◇'로댕의 제자’ 부르델 추종
권진규는 학창 시절 부르델의 책을 끼고 살았다고 전해질 만큼 부르델 추종자였다. 그도 분명 비슷한 고민에 빠져 지냈을 것이다. 현실에 발 디디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숭고미를 좇는 일이 가능할까? 그의 조각품을 실제 모델과 비교해 보면, 골격 구조와 형태가 너무나도 정확하게 일치해 새삼 놀라게 된다. 권진규는 대상의 ‘철저한 리얼리티’를 일차적으로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조각은 매우 섬세한 방식으로 이상화 혹은 추상화되어 있다. 스카프를 씌움으로써 간결해진 머리, 조금 더 길쭉하게 뺀 목, 급격히 내려앉은 어깨, 실재보다 살짝 더 명료한 이목구비, 그리고 무엇보다 “그토록 먼 응시!”(안동림의 표현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조금씩 더해져, 조각상은 현실 너머의 어떤 초월적 숭고함을 내비치게 된다. 권진규의 동창으로 평생 그를 경외했던 일본인 화가 도시마 야스마사는 권진규를 추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언제나 영원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영원의 재료 ‘테라코타’에 빠지다
권진규는 어떻게 하면 스스로 부르델이나 시미즈를 넘어설 수 있을지를 평생 고민했다. 그는 먼저 자신만의 특수한 ‘재료’에 승부를 걸었다. 일본 유학 시기에는 일본인이라면 아무도 손대지 않던 화강암 비슷한 재질의 단단한 석조를 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1959년 귀국 후 자신의 아틀리에를 만든 이후에는 테라코타에 집념을 보였다. “돌은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러니하게도 잘 썩지 않는다”고 자신하면서 더 ‘영원한’ 재료를 찾았다. 진흙으로 빚어 가마에 구운 원초적 조각! 미술 교과서의 단골 작품 ‘지원의 얼굴’이 대표적인 테라코타이다.
권진규가 생애 마지막에 가장 주목했던 재료는 의외로 ‘건칠’이었다. 생각해보면 건칠이야말로 더욱 영원하다. 삼베에 옻액을 입혀 바르고 덧입히기를 다섯 번 이상 반복해야 견고한 형태를 완성하는 지난한 작업이지만, 옻으로 만든 오브제야말로 역대급으로 오래간다. 동아시아에서 출토된 옻으로 된 부장품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서양인이라면 잘 사용하지 않는, 엄청난 공력이 드는 재료이지만, 이 재료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조각에 적용한 것은 권진규의 독창적 발상이었다.
그는 1970년 건칠에 매료되어 있을 때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제작을 의뢰받았다. 동네 한 교회에서 예배에 사용될 그리스도 조각상을 부탁한 것이다. 그는 이 불멸의 주제를 위해 가장 영원한 재료인 건칠로 그리스도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주문자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삼베에 수액과 이물질을 섞어 거칠고 너덜너덜한 표면이 그대로 드러난, 누더기의 그리스도를 도저히 예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이 조각상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 전시에 출품되어 있다.
권진규는 세상의 원죄를 모두 짊어진 누추한 모습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리얼리티’를 표상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리얼리티가 썩지 않는 건칠로 만들어져 영원성을 보장받게 된다. 외관상으로는 누추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비극적으로 숭고하며, 재료적으로는 영원한 조각품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건칠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건칠을 되풀이하면서 오늘도 봄을 기다린다”고 권진규는 1972년 3월에 썼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다
대체 영원한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신에게 다가가 그 빛을 전달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인간으로서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도전이라는 사실을 예술가들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도전 속에서 예술가들은 ‘비극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의 정체를 바라본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의 좌절은 ‘숙명’인지도 모른다. 권진규의 퇴짜 맞은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아틀리에 한구석 높은 천장에 언제나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권진규도 1973년 봄, 마찬가지로 천장에 매달려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많은 주변인은 예측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고. 오로지 한 사람, 그의 죽음을 예감한 이가 있었으니, 그의 조카 허명회였다. 권진규의 유산을 50년 가까이 지켜오다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여동생 권경숙(1928~) 여사의 아들이다. 허명회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여 권진규에게 미술 수업을 받은 어린 제자였고, 자녀가 없었던 권진규의 양자가 되기로 예정된 사람이었다. “이제 할 만큼 했다”는 말을 권진규가 무심히 내뱉었을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허명회는 ‘곧 소나기가 올 것 같다’고 직감했다.
허명회는 오랫동안 권진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미술을 전공할 생각도 있었지만, “미술보다 아름다운 학문”이라고 스스로 판단한 수학의 세계에 빠졌다. 그는 고학으로 스탠퍼드 대학을 나와 한국 통계학 분야에 선구적 업적을 남긴 학자가 되었다. 허명회의 아들 허준이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30대에 세계 수학계의 난제인 리드 추측을 증명, 세계적 수학상을 휩쓴 천재 수학자로 알려졌다. 현재 프린스턴 대학 교수이다. 최근 ‘뉴호라이즌 수학상’ 수상 기념 인터뷰에서, 허준이는 수학을 공부하는 원동력(motivation)이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다고 말했다. 수학 이론은 현실에서 경험적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암시하기 때문에 마치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매우 순수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학자의 내적 동기는 예술가의 그것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음악가, 조각가, 수학자는 불멸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 너무나도 먼 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