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

“너 혹시 ‘일베’ 하냐?”

직장인 홍모(29)씨는 코로나 유행 이후 답답한 마음에 친구에게 “이노무 코로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가 흠칫 놀랐다. 친구는 “‘노무’는 일베 용어니까 사용하지 마라”고 했다. ‘노무’는 극우 성향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단어로 주로 쓰인다. 홍씨는 ‘이놈의’의 오타라고 해명했지만, 한동안 마음이 찝찝했다. 홍씨는 “그 뒤로 ‘너무’라는 글자를 칠 때마다 혹시 잘못 쓸까 봐 바짝 긴장한다. 일베 때문에 앞으로 ‘노무’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도 못하겠다”고 했다.

지뢰처럼 조심조심 피해가야 할 혐오 표현이 늘고 있다. ‘수박’도 그중 하나가 될지 모르겠다. 지난달 21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대장동 개발 사업 특혜 의혹에 반박하며 올린 글에서 ‘우리 안의 수박 기득권자들’이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측은 “‘수박’이란 용어는 극우 커뮤니티에서 쓰기 시작한 호남 혐오, 호남 비하 멸칭”이라며 혐오 표현 사용을 멈춰달라고 논평을 냈다. 이 지사는 “(수박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의미로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라고 반박했다.

‘맘충’ ‘틀딱’처럼 비교적 명백한 혐오 표현과 달리 ‘수박’처럼 일상에서 쓰는 단어도 특정 커뮤니티에서 모욕과 비하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몇 년 전, 배우 류준열은 소셜미디어에 “엄마 두부 심부름 가는 길”이란 글과 함께 절벽을 오르는 사진을 올려 일베 논란에 휩싸였다. 네티즌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사인이 두부 외상이며 일베 회원들이 이를 조롱하는 표현으로 ‘두부’를 자주 쓴다고 주장했다. 류준열 측은 “’류준열이 일베를 한다’는 결과를 정해 놓고 다양한 가설을 제기하며 끼워 넣기식의 공격을 하는 악의적인 안티 행동”이라고 반박했다.

이 밖에도 일베 용어 중에선 전라도 특산품인 ‘홍어’, 전라도가 7시 방향에 위치한다고 해서 ‘7시’,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비하하며 받침을 뺀 ‘포도’ 등 단어만 놓고 봐선 혐오 표현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단어가 많다. 직장인 원모(30)씨는 “아무렇지 않게 ‘전라디언’이라는 말을 쓰는 동료에게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단어라고 알려준 적이 있다”면서 “멸칭인지 모르고 썼다는데 의미조차 모르는 말을 생각 없이 쓰는 행동도 실망스러웠다”고 했다.

차별이나 비하의 의도가 없어도 혐오 발언이라 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명백한 혐오 표현이라면 의도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애매한 표현은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고 봤다. 이재진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수박이나 두부 같은 단어는 어떤 목적과 의미로 쓰였는지 명확하지 않다면 섣불리 혐오로 판단하긴 어렵다”면서 “요즘은 특정 단어에 의미를 부여해 인정을 받고 세력을 키우려 하면서 일상 언어도 전쟁터가 됐다”고 했다.

남성 혐오, 여성 혐오 용어 논란도 끊이질 않는다.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안산 선수가 과거 소셜미디어에 썼던 ‘오조오억’이라는 표현이 ‘남혐 용어’라며 일부 네티즌이 비난하는 글들을 올려 젠더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카카오는 지난 3월 ‘허버허버’라는 표현을 쓴 이모티콘을 판매 중지했다.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인터넷에서 자주 쓰였지만 “여성 커뮤니티에서 남성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인 남성 혐오 단어”라는 주장이 나왔다. 카카오는 당시 “언어의 시대상을 반영해 해당 상품의 판매 종료를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혐오 표현을 놓고 논란이 계속되자 “일베에서 쓰는 말을 공부라도 해야 하는 거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2014년에 프로그래머 이두희가 ‘일베 용어 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방송인 홍진호가 일베 용어를 썼다는 논란에 휘말리자 이두희는 “나도 모르게 쓰는 일베 용어 때문에 괜한 오해를 받아서 훅 가는 것 방지용”으로 개발했다며 일베 용어 사전을 공개했다.

지난해 인권위가 발표한 ‘온라인 혐오 표현에 대한 일반 시민과 전문가 인식 조사’에 따르면 남성보다는 여성이, 연령대가 낮을수록,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온라인 혐오 표현에 대한 민감도가 높았다. 혐오 표현을 쓰는 이유에 대해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서’라고 답변한 응답자 비율이 27.5%로 제일 높았고, ‘상대방이 먼저 내가 속한 집단을 비난하는 내용을 올려서’(21.1%),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서’(14.7%) 순으로 나타났다. 조사를 수행한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온라인상에서 표현의 양은 점점 늘어나는데 글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면서 몇 마디로 의사를 강하게 표출하려다 보니 자극적인 혐오 표현이 늘고 있다”면서 “누구나 인정할 만한 혐오 표현은 억제 장치를 마련해야 하지만, 논쟁 여지가 있는 표현은 좀 더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