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르 브뤼헐 '게으름뱅이의 천국'(1567). / 알테 피나코테크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서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보다 참담한 것은 없다. 앞서 존재했던 위대한 군주들은 사람들이 귀찮아하고 해이해지고 물러나기만 할 뿐, 나아가려 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위해 아름답게 수와 문양을 놓은 옷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타악기, 현악기, 관악기 등으로써 사람들의 귀를 유혹하고, 관직과 편의로써 사람들의 몸을 유도하고, 두드러지는 선행을 표창하고 비석에 새기고 영탄함으로써 사람들의 기개를 인도하였다(夫天下之禍, 莫憯於泊然而無欲也. 先王知其將怠惰崩弛, 一於退而無進. 則爲之黼黻藻繪絺繡, 以導其目焉. 爲之鐘鼓琴瑟笙鏞, 以導其耳焉. 圭組軒駟, 以導其身. 褒異旌惠, 刻勒永歎, 以導其志氣).” –연암 박지원 ‘명론’ 중

그는 평생 귀찮음과 싸워왔다. 망연하게 창문 너머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학생들은 그가 무슨 심오한 학술적 사색에 잠겨 있는 줄 안다. 그렇지 않다. 귀찮음과 싸우고 있을 뿐이다. 귀찮음과의 한판 승부, 그건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 치르는 세계대전 같은 것이 아닐까. 오늘도 귀찮음은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기세로 존재의 구석구석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 귀찮은 나머지, 그는 오랫동안 단련해 온 의지력이라는 군대를 파병한다. 잘 싸워다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내가 사람 꼴을 하고 살게 해다오.

귀찮음에 주목해보라. 그러면, 많은 인간사가 설명되는 것 같다. 더러운 사람이 있다. 아, 씻기 귀찮았구나. 갑자기 수척한 사람이 있다. 아, 먹기 귀찮았구나. 착한 사람이 있다. 아, 남을 괴롭히기 귀찮았구나. 너그러운 사람이 있다. 아, 화내기 귀찮았구나. 정숙한 사람이 있다. 아, 연애하기 귀찮았구나. 변온동물이 있다 아, 체온 조절하기 귀찮았구나. 버스 종점에서 내린다. 아, 중간에 내리기 귀찮았구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아, 피임하기 귀찮았구나. 자살률이 줄어든다. 아, 죽기 귀찮았구나.

어? 내가 왜 앉아 있지? 큰 손해라도 본 듯이 부랴부랴 누워본다. 아, 이거였구나. 나에게 맞는 자세란. 가만히 누워 있다 보면 진정한 내가 되는 느낌이다.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않아도 된다. 정치를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칼럼을 쓰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누워 있다 보면, 팔다리도 서서히 나를 떠나는 느낌이 든다. 잘 있어… 몸에 붙어 있기 귀찮아… 살려 줘….

이것이 내가 예측하는 인류 멸망 시나리오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류가 핵무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끝에 핵전쟁으로 멸망할 거라고 말하곤 한다. 혹은 팬데믹을 막지 못해서 전염병으로 멸망할 거라고 말하곤 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인류는 멍청하니까. 자기 편익마저도 장기적으로 계산해서 얻어내지 못할 만큼 멍청한 것이 인간이니까. 그래, 그런 식으로 멸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시나리오는 또 있다. 인간이 지나치게 똑똑해진 끝에 멸망할 수도 있다. 세상은 지옥이군, 아무래도 여기다가 애를 낳아서 키운다는 것은 말이 안 돼. 각종 환경, 정치, 사회 문제를 보라.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을 과연 멍청하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성적인 생각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래서 인류는 결국 생식을 멈추고 자멸해가는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유력한 시나리오는 귀찮아서 멸망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아서 키울 만한 세상이긴 한데, 너무 피곤하군.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다 부질없는 욕심이군. 귀찮아. 이 지구는 인공지능 로봇에 맡기고 사라져 주겠어. 이렇게 멸망한 인류는 모두 누워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명론(名論)>이라는 에세이에서 말했다.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서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보다 참담한 것은 없다.” 박지원이 보기에, 전쟁, 지진, 홍수, 팬데믹, 호환, 마마보다 참담한 재앙이란 바로 담담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이다. 다 귀찮아하는 상태이다. 그래서는 이 세계가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귀찮아하는 사람들의 관점이 아니라, 정치하는 이의 관점이다. 뼛속 깊이 귀찮아하는 사람은 삶 자체도 귀찮아하므로 인류의 멸망 따위를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을 감히 책임지고자 하는 정치인들은 다르다. 이 세상이 사라지면 큰일이다. 책임질 대상이 없어지잖아! 나는 뭔가 책임지고 싶은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천하는 텅 비어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무엇을 가지고 그 그릇을 유지할 것인가? ‘이름’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이름을 유도할 것인가? 바로 ‘욕심’이다(天下者, 枵然大器也. 何以持之? 曰名. 然則何以導名? 曰欲).” 사람들이 귀찮은 나머지 아무것도 안 하다가 멸종하는 사태를 막으려면, 사람들의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뭔가 해보고 싶은 욕망. 우리는 흔히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하지만, 사실 욕망이 없다면 이 세계는 텅 비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릇은 해체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다가 멸종되고 말 것이다. 욕심이 있어야 인생이 있고, 인생이 있어야 욕심이 있다.

그래서 뛰어난 정치가들은 “아름답게 수와 문양을 놓은 옷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타악기, 현악기, 관악기 등으로써 사람들의 귀를 유혹하고, 관직과 편의로써 사람들의 몸을 유도하고, 두드러지는 선행을 표창하고 비석에 새기고 영탄함으로써 사람들의 기개를 인도하였다.” 다시 말해서, 멋진 것들을 만들었다. 사람들의 선망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멋진 패션이 없으면 멋쟁이도 없을 것이고, 멋쟁이가 없으면 연애의 욕망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연애를 하지 않다 보면, 사람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인류는 멸망할지 모른다.

박지원이 보기에 사람들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 중 명예(이름)가 가장 중요하다. “만물은 쉽게 흩어지기 마련이니, 어떤 것도 그것을 붙잡아 둘 수 없다. 이름으로 붙잡아 둔다(萬物之易散而莫可以相屬也. 名以留之).” 어떤 선망하고 욕망할 것이 있기에, 사람들은 귀찮음을 이기고 세상에 나와 그 욕망의 대상을 좇는다. 마침내 경제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정치가 필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