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이 뮤직 비디오 찍으라고 회의장 내준 건 마이클 잭슨도 못 한 일?” 지난달 20일 방탄소년단(BTS)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뉴욕 유엔 본부로 날아가 찍은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 영상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BTS처럼 대중 가수가 유엔 본부를 구석구석 휘저으며 영상을 찍은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2012년 비욘세가 유엔에서 촬영한 적이 있지만 연단에서 얌전히 노래 부르는 수준이었다. 유엔이 지금까지 내부 촬영을 공식 허가한 영화도 ‘인터프리터(2005)’ 한 작품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왜 BTS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냐는 논란은 있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이벤트의 최대 수혜자는 유엔이라는 사실. BTS는 시쳇말로 ‘엄근진(엄숙·근엄·진지)’ 이미지 유엔 본부를 단번에 트렌디한 세트장처럼 바꿔 버렸다. 3분 43초짜리 영상에서 카메라는 역동적으로 춤추는 멤버의 동선을 따라가며 유엔 총회장, 총회 로비, 청사 입구, 잔디 광장, 유엔 사무국 등을 담았다.
유엔 본부는 1950년대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 유엔으로선 팬 1억명을 몰고 다니는 글로벌 수퍼스타를 공짜로 출연시켜 ‘건축 투어 영상’을 찍은 셈 아닌가. 유엔 공식 유튜브에 올라간 이 영상 조회 수는 단숨에 2400만을 뛰어넘었다.
1952년 완공된 유엔 본부는 당대 ‘건축계의 BTS’라 할 만한 스타가 총출동해 설계했다. 1945년 유엔 창설 후 본부 후보 도시로 몇 군데가 물망에 오른 가운데, 1946년 록펠러 가문이 맨해튼 부지를 기증하면서 뉴욕으로 낙점됐다. 유엔은 설계 공모를 하지 않고, 국제기구라는 취지에 걸맞게 다국적 건축 팀을 만들었다. 1947년 ‘근대 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프랑스), 오스카 니마이어(브라질) 등 11국을 대표하는 거장 11명으로 구성된 ‘유엔 디자인 위원회’를 출범했다. 위원장은 ‘링컨 센터’ 등을 설계한 미국 건축가 월리스 해리슨이 맡았다.
최종안은 르코르뷔지에 안을 기초로 니마이어 안을 절충한 디자인이었다. 르코르뷔지에 색깔이 짙게 밴 건물은 39층(높이 154m) 유엔 사무국 건물. BTS 뮤직 비디오 후반부, 잔디 정원에서 단체로 춤추는 장면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고층 빌딩이다. 지금으론 평범해 보이지만 당시엔 첨단 기법이던 커튼월(골조만으로 하중을 지지하고 외벽은 유리로 마감하는 공법)이 뉴욕 최초로 적용됐다. 장식을 걷어내고 기능을 강조한 국제주의 건축 양식이다. 사무국 앞쪽, 곡선 지붕에 돔을 올린 낮은 건물이 BTS가 연설한 총회 건물이다.
‘건축 어벤저스’ 11명은 ‘평화를 위한 일터(Workshop for Peace)’를 유엔 디자인 슬로건으로 잡았지만, 개성 강한 건축가들의 협업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자신이 주도권을 가질 줄 알았던 최고 스타 르코르뷔지에는, 록펠러 가문 소속 건축가나 다름없던 해리슨이 위원회를 좌지우지하자 분개해 벽에 붙어 있던 다른 사람의 도면을 다 찢어버리기도 했다. 뉴욕타임스에선 “건축가들의 강제 결혼이 가져온 불화”라고 꼬집었다.
뮤직 비디오를 잘 보면 곳곳에 보석같이 박힌 예술 작품이 숨어 있다. 총회장 연단에서 출구 쪽으로 카메라가 180도 돌아가는 순간, 유기적 형태의 벽화가 휙 지나간다. 프랑스 입체파 화가 ‘페르낭 레제’의 작품. 트루먼 미 대통령이 ‘스크램블드 에그’란 애칭을 붙인 그림이다. 멤버들이 총회장 문을 열고 로비로 나오자마자 뒤로 보이는 파란 스테인드글라스는 샤갈의 작품. 1961년 아프리카에서 비행기 사고로 순직한 2대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
0.5배속으로 영상을 느리게 돌려놓고, BTS 뒤를 보자. 또 다른 BTS(Behind The Scene·비하인드 더 신), 공짜 예술 투어가 펼쳐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