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한복판에 재현한 무령왕릉 무덤 속 모습. 왕과 왕비의 목관이 나란히 전시됐고, 무덤 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에는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와 동전 한 꾸러미가 놓여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971년 7월 4일 밤 김영배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은 기이한 꿈을 꾸었다. 돼지인지 해태인지 모를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다. 이튿날 오전 그는 공주 왕릉원(옛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현장에서 다급한 연락을 받는다. 공사 도중 인부의 삽날에 단단한 물체가 걸렸다는 것이다. 현장에 달려가 조심스레 파보니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즉시 발굴 조사단이 구성됐다. 조사단장은 서울서 내려온 김원룡 국립박물관장. 8일 오후 4시 막걸리에 북어 세 마리, 수박 한 통 올려놓고 위령제를 지냈다. 김원룡 단장과 김영배 분관장이 맨 위쪽 벽돌 두 장을 빼내자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오후 4시 15분 어두컴컴한 무덤 안을 손전등으로 비추던 김 분관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꿈에서 본 그 짐승이 서 있는 것 아닌가. 곧이어 두 사람 눈에 띈 지석(誌石)에는 무덤 주인을 알리는 글씨가 선명했다.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사마왕? 아 아.. 무령왕이다!” 백제 제25대 임금인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과 왕비의 합장 무덤이 1442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전시장 한복판에 재현한 무령왕릉 무덤 속 모습. 왕과 왕비의 목관이 나란히 전시됐고, 무덤 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에는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와 동전 한 꾸러미가 놓여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발굴 50년 만에 모든 출토품 한자리에

20세기 한국 고고학을 뒤흔든 기념비적 사건이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충남 공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발굴 이후 처음으로 무령왕릉 출토 유물 5232점 모두가 한자리에 나왔다. 가방 하나 훌렁 메고 공주 여행에 나선 이유다. 연꽃과 신선 세계가 정교하게 새겨진 은잔(銀盞),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왕과 왕비의 베개와 발받침... 백제 문화의 정수를 눈에 담느라 발길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가장 먼저 발견된 진묘수. 뿔과 날개가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한수 국립공주박물관장은 “화려한 금·은 장신구 사이에서 뜻밖에 가장 인기 있는 유물은 무덤 입구를 지키던 동물상인 진묘수(鎭墓獸)”라고 귀띔했다. 얼핏 돼지를 닮았지만, 뿔과 날개가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무덤을 지키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어둠 속 조사단 눈엔 “그로테스크한 괴수”로 보였지만, 50년 뒤 관람객들은 귀엽고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스마트폰으로 찍기 바쁘다. 몸통은 돌을 깎아 만들었고, 머리에 달린 뿔은 철로 만들었다. 무게가 무려 48.5㎏. 윤지연 학예연구사는 “혼자선 못 들고 남자 학예사도 두 명이 맞들어야 한다”고 했다.

전시장 한복판에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木棺)이 나란히 놓였다. 무덤 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에 놓인 지석과 동전 한 꾸러미, 진묘수가 발굴 당시 모습대로 재현돼 실제 무령왕릉에 들어온 느낌이다. 왕과 왕비의 목관은 크기, 뚜껑판의 개수, 못과 고리의 재질과 형태 등에서 차이가 난다. 무령왕의 목관은 뚜껑이 5개의 판재로 이뤄지고 관을 고정한 못머리도 금으로 입혔다. 왕비의 목관은 뚜껑이 3개의 판재로만 이어져 있고, 못머리도 금이 아닌 은판을 씌웠다.

'받침이 있는 은잔'의 뚜껑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중첩된 연꽃잎 가운데에서 또 피어나오는 연꽃봉오리가 연상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왕의 금귀걸이. 아래에 크고 작은 하트 모양 꾸미개 3개가 달려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동아시아 문물 교류의 보고

삼국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무덤 주인공이 확인된 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것은 천우신조였다. 학계에선 “무령왕릉 발굴은 꺼져가던 백제 역사의 맥박을 되살렸을 뿐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의 찬란한 문명 교류사까지 복원해냈다”고 말한다. 중국 도자와 청동거울,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어진 목관, 동남아산 원료가 포함된 유리구슬은 무령왕릉이 동아시아 문물 교류의 보고임을 보여준다.

왕의 관 꾸미개. 인동초 줄기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가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역동적이다. 달개 장식이 달려 화려하다. /국립공주박물관
왕비의 관 꾸미개. 가운데 꽃병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이다. 달개 장식 없이 정적이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보로 지정된 유물만 17점.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왕과 왕비의 관 꾸미개는 금 함유량 98% 이상으로 순금에 가깝다. 나란히 전시된 왕과 왕비의 것을 비교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왕의 꾸미개는 인동초 줄기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가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역동적이다. 반면 왕비 것은 가운데 꽃병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이라 정적이고 단정하다. 둘 다 얇은 금판을 오려 무늬를 만들었지만 왕의 꾸미개는 달개 장식이 달려 화려하고, 왕비의 것은 달개가 없다.

'왕비의 베개와 봉황 머리 장식'이 전시된 모습.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400년 넘는 세월에도 목재가 바스러지지 않은 것은 옻칠의 힘. 무령왕비 베개를 장식한 봉황 두 마리는 검은색으로 칠한 후 정수리 깃과 목에 금박 띠를 돌렸다. 베개의 우아한 붉은 빛과 봉황의 고고한 검은 빛깔의 조화가 당시 백제의 칠기 문화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전시장 곳곳에 공주를 대표하는 나태주 시인의 시구가 붙었다. “공주라 무령왕릉 천오백년 잠을 깨어/ 하늘 아래 연꽃으로 둥그스름 피었으니...” 이번 특별전을 기념해 시인은 ‘무령왕릉’을 주제로 시 4편을 새로 썼다.

연꽃무늬 벽돌. 무령왕릉 입구를 막은 벽돌은 모두 614점이었다. /국립공주박물관

◇사상 최악의 졸속 발굴

무령왕릉 발굴은 ‘사상 최악의 졸속 발굴’이라는 오명도 함께 갖고 있다. 발굴 당시 현장에서 눈치를 챈 한국일보 기자가 1971년 7월 8일 자 1면 톱기사로 ‘새 백제왕릉 발견’이라는 특종 기사를 냈다. ‘물먹은’(낙종한) 기자들에 구경꾼까지 몰려들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청동 숟가락이 부러지는 등 통제 불능 상황으로 치닫자 다급해진 조사단은 철야 작업을 강행했다. 큰 유물만 대충 수습하고 나머지는 바닥에 엉킨 풀뿌리째 자루에 쓸어담아 나왔다. 하룻밤 새 왕릉 발굴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은 생전에 “나의 실수였고 고고학자로서 평생의 아쉬움의 하나다. 나라와 국민에게 큰 죄를 저질렀다”고 뼈아픈 반성문을 남겼다.

1971년 7월 8일 무령왕릉 발굴 당시 맨 위쪽 막음벽돌을 빼내는 모습. /국립공주박물관

옆 전시실에선 이 긴박했던 발굴 과정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당시 현장에서 문화재관리국에 보낸 긴급 보고서도 나왔다. 1971년 7월 5일 오전 10시 30분, 발견자 김영배 공주분관장 등은 “시급히 조사 작업을 진행치 않으면 도굴 및 파괴의 우려가 있으니 긴급 조치 바람”이라고 썼다. 벽돌을 들어내고 목관을 반출하는 사진, 발굴장에 모여든 사람들과 열띤 취재 경쟁까지 흑백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는 “당시 우리 기관과 학계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발굴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고고학의 인식과 수준을 한 단계 성숙시킨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무령왕릉 발굴을 반면교사 삼아 2년 뒤 경주 천마총 발굴 등에선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전시는 “반세기 동안 무령왕릉과 함께 한국 고고학과 보존과학도 성장했다”며 “반성과 회한을 넘어서 새로운 반세기를 열어가야 할 때”라고 말한다. 내년 3월 6일까지.

[50년 전 무령왕릉 조사단도 이 국밥 먹으며 발굴했다고?]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들이 꼽은
무령왕릉 인근 먹거리&볼거리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옛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솟은 무덤이 무령왕릉이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40세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풍전등화에 빠진 백제를 일으켜 세웠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한성이 함락된 후 쫓겨 웅진(공주)으로 천도해 있었다.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둔 뒤 521년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갱위강국(백제가 다시금 강국이 되었다)’을 선언한다. 올해는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들이 ‘무령왕의 도시’ 공주를 알차게 즐기는 법을 들려줬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이 한창인 공주박물관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실제 무령왕릉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옛 송산리 고분군·041-856-3151)이다. 바닥에 그려진 진묘수 그림을 따라 구릉 위로 올라가면 무령왕릉을 포함해 백제 고분 7기가 있다. 초록으로 뒤덮인 완만한 능선의 고분을 따라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도 색다르다.

'고가네 칼국수'의 대표 메뉴인 평양식 만두전골과 보쌈수육.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박물관에서 차로 7분 거리에 있는 고가네 칼국수(041-856-6476)는 학예사들이 만장일치로 꼽은 ‘공주 맛집’이다. 주인 김영란씨가 고씨 집안으로 시집온 뒤, 시댁에서 운영하던 직물 공장을 리모델링해 지금의 칼국수 집으로 만들었다. 개운하고 시원한 평양식 만두전골과 보쌈수육이 인기 메뉴. 한수 관장은 “무령왕 시대의 공주 중심지가 바로 제민천이었다”고 했다.

구도심인 제민천에 조성된 '나태주 골목길'.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인근에 조성된 나태주 골목길에선 소소한 골목 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시와 그림이 곳곳에 숨어있는 골목이다. 하얀 담벼락에 손으로 써내려 간 시구에서 몽글몽글 감성이 피어오른다. ‘힐링 장소’로 소문난 한옥 카페 루치아의 뜰(041-855-2233)에선 시간도 느리게 흘러간다. 건축가 임형남·노은주 부부가 구도심의 오래된 집을 고쳐 차를 나누는 문화 공간으로 꾸몄다. 도심 골목길 재생 프로젝트의 성공 사례다.

카페 '공다방' 창가에 앉으면 정면으로 보이는 공산성 뷰.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제민천에서 차로 4분만 가면 공산성이다.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성벽인 공산성은 웅진 백제 시기(475~538)를 대표하는 고대 성곽이다. 백제 땐 ‘웅진성’으로, 고려 시대엔 ‘공주산성’으로, 조선시대 인조 이후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금강을 내려다보며 공산성 성곽길(2660m) 전체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1시간 30분 걸린다. 매표(어른 12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600원) 후 금서루에서 오른쪽 길로 올라 쌍수정⋅왕궁지⋅진남루⋅영동루⋅광복루⋅만하루와 연지⋅영은사⋅공북루⋅공산정 전망대를 거치는 코스가 정석이다.

정면으로 공산성 뷰가 보이는 카페 '공다방'.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성곽길 걷기가 부담스럽다면 공산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다방으로 간다. 안민자 학예연구사는 “정면으로 보이는 공산성 뷰가 예술이라 요즘 가장 뜨는 카페”라며 “창가 자리에 자리 잡으면 공산성 보며 멍 때리기 좋다”고 소개했다. 이름에서 풍기는 레트로(복고) 감성과 달리 내부는 모던한 분위기. 공산성 야경이 예쁘니 밤에 가도 좋다. 월요일 휴무.

공산성 인근 국밥집 '새이학가든'의 대표 메뉴인 '공주 국밥'.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무령왕릉 발굴 50년’ 특별전을 감상한 이들에겐 공산성 인근 국밥집 새이학가든(041-855-7080)을 추천한다. 50년 전 무령왕릉을 발굴한 조사단이 이곳 국밥을 먹으며 작업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한수 관장은 “서울에서 내려온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에게 이 집을 소개한 사람이 김영배 공주분관장”이라며 “65년 전부터 공주시장(市場)에서 유명했던 ‘이학식당’이 이름을 바꿔 현 위치로 옮긴 것”이라고 했다. 푹 고아 녹아 있는 대파와 무가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을 낸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공주에 오면 꼭 들렀다고 한다. 공주국밥 9000원. /공주=허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