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성 앵커인 박찬숙은 50년간 방송을 했다. 그는 “나보다 대통령, 정치인, 관료 등 명사를 많이 만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976년 11월, KBS ‘9시 뉴스’에 한국 최초로 여성 앵커가 등장했다. 당시는 요리·음악 프로가 여성 아나운서들이 진행할 수 있는 최고의 프로로 여겨지던 때. 큼직한 이목구비와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박찬숙의 등장은 그래서 화제였다.

한국에도 바버라 월터스 같은 여성 앵커가 필요하다는 홍경모 당시 KBS 사장의 의지로 1호 여성 앵커가 된 박찬숙(76)은 인생 3분의 2를 방송에 쏟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전직 대통령 일곱 명을 만났고, 인터뷰한 국무총리나 장관, 시장 등은 셀 수 없이 많다. ‘박찬숙을 거치지 않고서는 유명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고, 그 자신도 17대 국회의원으로도 활약했다.

이제 좀 쉬는가 싶더니 지난 3월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에 취임했다. 최근엔 장편소설 ‘가지꽃’을 출간했다. 서문의 한 구절이 눈길을 끌었다. ‘흔들리는 나라의 운명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도 흔들린다.’ 박찬숙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다면, 잘못됐다고 깨달은 순간 뒤돌아설 수 있는 용기가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미스 박’이라 불리던 여성 앵커

-앵커로 데뷔했을 때 남자들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더라.

“여자하고 같이 진행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여자하고 앉으면 권위가 떨어진다’ ‘국회의원 출마할 거라 남자들을 거느리고 방송해야 한다’는 이유였다(웃음).”

-‘미스 박’이라 불렸다던데.

“회사 높은 분들에게 툭하면 ‘여자는 여자다워야지, 방송에서 너무 강하게, 남자같이 하는 거 매력 없다’란 충고도 받았다. 1994년에 ‘여기는 라디오 정보센터입니다’ 시작할 때도 ‘여성 앵커 박찬숙씨가 진행합니다’란 말이 꼭 따라붙었는데, ‘앵커면 앵커지, 무슨 여성 앵커냐’고 따졌더니 몇 달 후 ‘여기는 라디오 정보센터 박찬숙입니다’로 프로 제목이 바뀌었다.”

1970년대 박찬숙(오른쪽)이 KBS ‘9시의 스튜디오’를 진행하는 모습. /박찬숙 제공

-목소리가 굵고 키도 크다. 과거 선호했던 여성 아나운서상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런 얘기 수도 없이 들었다. 과거에 모 일간지에 방송평 코너가 있었는데, 어느 기자가 ‘박찬숙은 TV에 안 맞는다’고 썼더라. 그때는 꾀꼬리 같고 양순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좋은 목소리로 여겼다. 그런데 이 굵직한 목소리 덕분에 내 방송 인생이 시사, 토론 쪽으로 풀린 것 같다(웃음).”

-최근에도 여성 앵커가 안경을 쓰고 TV에 나왔다고 논란이 됐다.

“어이없는 일이다. (안경 착용을) 문제 삼는 사람이 이상하지. 말할 거리도 안 된다.”

◇육영수 여사가 보낸 스웨터

-방송 생활 50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428km. 너무 중요해서 다 기억한다. 그땐 고속도로가 뭔지 사람들이 몰랐다. 길이 났는데 왜 마차도 못 가고 개도 못 가냐(고 했다). 그게 국토의 대동맥을 만들어 물류 혁명을 이루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개통식 날 5시간 동안 KBS 남산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을 했다.”

-역대 대통령들을 여럿 만났더라.

“노태우 대통령을 당선자 시절 만났는데, 내가 ‘나는 노태우 후보를 찍지 않았다. 그래도 잘되시길 바란다’고 했더니 노 대통령 왈, ‘언론인이 나를 찍었겠나. 안 찍은 줄 안다. 그러나 잘해 나갈 거다’ 하시더라. 인상적이었다. 1992년 YS(김영삼)를 어느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YS가 ‘미스 박, 이번에도 나 좀 찍어요’ 하기에 ‘지난번 찍었는데 안 되시고 뭘 또 찍으라 그러냐’고 받아쳤더니 껄껄 웃으시더라.”

-대통령 부인들도 인터뷰했나.

“물론이다. 육영수 여사는 인터뷰 후 방송국으로 이름만 적힌 명함과 하얀 스웨터를 보내왔다. 그 뒤 한 행사에서 또 마주쳤는데, 여사가 경호원들을 물리치고 오시더니 ‘방송만 하다 언제 시집가나. 청와대에 좋은 신랑감 있으니 한번 연락하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청와대 문턱이 너무 높아 감히 어떻게요’라고 했지. 그냥 ‘감사합니다’ 하면 될 걸(웃음). 이걸 배짱이라고 해야 하나. 나도 참 별났다.”

◇노무현 정부 때 방송에서 다 잘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실은 양당에서 다 러브콜이 왔다. 당시 노무현 정부 사람이 만나자고 해 코리아나호텔에서 만났다. 언론·여성계 대표로 같이 일하고 싶다더라. ‘저는 해방 때 태어나 6·25전쟁을 겪었고, 나라의 발전을 지켜본 보수적 입장에 속하는 사람이다. 일주일에 방송 프로 하나만 해도 방송계에 남겠다. 죄송하다’고 했다. 갑자기 방송에서 다 잘렸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내 나이 곧 예순이었다. 일을 하지 않을 순 없어 결국 여의도로 갔다.”

-정치는 잘 맞았나.

“전혀(웃음). 정당은 진영 논리로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이라서…. 그래서 정책에 집중했다. 공공디자인포럼을 만들었고, 퍼블리시티권을 명문화하는 입법도 추진했다.”

-친이명박계로 활동하지 않았나.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를 잘할 것 같았다. 이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 ‘문화관광부 이름에 ‘체육’을 넣어야 한다’고 건의한 사람이 나다. 이 대통령 취임과 함께 문화체육관광부로 개명됐다.”

한국 최초의 여성 앵커인 박찬숙은 50년간 방송을 했다. 그는 “나보다 대통령, 정치인, 관료 등 명사를 많이 만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문재인 대통령을 인터뷰한다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나.

“지금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다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냐 묻고 싶다. 임기가 끝나가는 대통령으로서, 오랜 친구이자 선배인 분에게 어떤 말씀을 건넬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론 문 대통령에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 뒤돌아설 수 있는 용기가 가장 큰 용기’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최근 언론중재법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언론계가 들썩였다.

“그 법이 통과되면 언론의 자유가 없어진다. 사회의 물과 공기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론의 자유를 막는다는 건 독재 정권으로 간다는 것이다. 언론중재법을 밀어붙이면 국민들은 ‘정권이 끝난 뒤를 대비해야 할 일이 있는 걸까’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얘기? 여성들의 삶 쓰고 싶었다

-1980년 신군부 때 해직됐다 복귀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던데.

“내가 왜 해직자 명단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사회에서 추방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처음 여성이 스스로를 지키려면 경제적 자립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네에 작은 옷 가게를 열었다. 새벽에 동대문 시장에 가서 옷을 떼와 팔았다. 그러다 친구를 따라 한 신문사에서 하는 문화센터에 등록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박찬숙은 숙명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왜 소설을 쓰나.

“방송 생활 끝내고 여러 일을 해봤는데, 쓰고 기록하는 게 가장 중요하더라. 내게 소설은 세상과 사람들, 특히 여성에 대한 내 방식의 사랑이다.”

-최근 발표한 장편 ‘가지꽃’은 해방 전후 여성의 고단한 삶을 조명했다.

“내 나이 이제 희수(喜壽)다. 주변을 오래 관찰해보니, 여성은 대개 여자라는 이유로 삶이 규정되더라. 여성이 아들 낳는 기계이던 시절, 여성이 직업을 갖는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에 대한 얘길 써보고 싶었다. 이번 책에선 전쟁 속에 흔들리는 여성의 삶을 다뤘다. 사람들은 나더러 대통령, 정치인들 만난 얘기를 쓰라고 하는데, 나는 그 사람들 만난 얘기가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더라(웃음).”

박찬숙은 1973년 구자용 한국외대 명예교수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아내, 엄마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나.

“남편과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왔다. 엄마로서는 글쎄…. 따스함이 부족한 엄마가 아니었을지. 워낙 바쁘게 살아서.”

-여성 앵커·아나운서 출신 정치인들이 늘고 있다.

“정치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면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정계 진출을 위한 디딤돌로 방송을 이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후배 여성 앵커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일부 뉴스에서) 내용을 전혀 모르고 읽기만 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뉴스를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은 다르다. 화면에 예쁘게 나오려고 애쓰는 것보다, 내용을 알고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으면 한다.”

-’1호 앵커’라는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처음엔 민망하고 미안했다. 그런데 1호의 역할이 자신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라, 파장을 키워 다른 곳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더라. 나 이후에 여성 앵커들이 계속해서 나왔고, 지금은 여성 앵커가 혼자 뉴스를 진행하기도 하지 않나. 1호여서 영광이다. 다시 태어나도 앵커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