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후 8시. A 인터넷 커뮤니티의 정치·시사 게시판에는 새 글이 쉴 새 없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밥 먹고 딱 토론 가즈아~’ ‘님들 토론 어디서 볼 거임?’. 10분 뒤. ‘귤재앙(원희룡) 윾치타(유승민) 입갤ㅋㅋㅋ’ ‘원유 대전 시작했다’ ‘둘 다 표정 좋네’….
이날은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들이 일대일로 토론하는 맞수 토론이 처음으로 진행된 날. SBS·MBC가 생중계한 토론의 전국 평균 시청률은 11.9%(닐슨코리아)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유튜브에서도 국민의힘 채널과 각 방송사 채널 등의 실시간 시청자가 20만명(누적 조회 수 180만회)을 넘길 정도로 인기였다. 토론이 진행되는 1시간 30분 동안 A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글은 약 4400여 건에 달했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정치를 즐기는 사람도 늘고 있다. 마치 스포츠 경기나 게임을 관전하듯,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미디어 등에서 다른 이용자들과 정치 관련 정보를 공유하거나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윤종빈 명지대 교수는 비교적 젊은 세대가 이 같은 ‘정치의 놀이화’ 현상을 주도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오프라인 정치 공간에서 발현되지 않던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의 특성이 온라인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비슷한 현상은 18·20일 진행된 경기도 국정감사 때도 나타났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국감에 출석하면서 관심이 집중된 것. 유튜브에서 실시간 방송된 경기도 국감의 누적 조회 수는 150만회에 달했다. B 커뮤니티에는 ‘오늘 국감은 역대급 꿀잼’ ‘오징어 게임보다 재밌다’ 등의 글이 올라왔다.
회사원 윤모(33)씨는 “특정 정당 지지자는 아니지만 레드홍(홍준표)과 윤스톤(윤석열)의 대결이 재밌어서 토론을 챙겨 보는 편”이라고 했다. 이런 트렌드에 발맞춰 일부 정치인은 “(대중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것은 정치인의 서비스 정신”이라고 말하고, 정당과 후보 캠프는 유행어나 밈(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동영상이나 사진)을 적극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풍자와 조롱이 담긴 콘텐츠가 생겨나고 인터넷에서 확대·재생산되는 현상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국민의힘 토론과 경기도 국감 직후 ‘조지고 올게’ 밈이 유행했다. 원래 이 밈은 강아지 캐릭터가 ‘○○○ 조지고 올게!’라 말한 그림과 ‘하지만 언제나 조져지는 건 나였다’라고 말하는 그림이 위아래로 붙어 있는 것. 한 커뮤니티에선 이 밈의 강아지 얼굴에 홍준표 후보 얼굴을, ‘○○○’에 윤석열 후보 이름을 넣은 그림이 등장했다. 강아지 얼굴에 국민의힘 로고를, ‘○○○’에 이재명 지사 이름을 넣은 그림도 나왔다. 22일 새벽에는 전날 전두환 옹호 논란으로 유감을 표명했던 윤석열 후보 인스타그램에 개와 사과(과일)가 함께 찍힌 사진 등이 올라왔다가 삭제되는 소동이 있었는데, 이 소동은 커뮤니티에서 실시간으로 다뤄졌다. 이용자들은 ‘#사과는 개나줘’란 제목의 글로 게시판을 도배했다.
홍준표 후보는 18일 토론 뒤 ‘조국수소홍’이라는 새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앞서 조국 전 장관을 옹호했다며 ‘조국수홍(조국수호+홍)’이란 별명이 붙었는데, 토론에서 ‘수소, H₂0인가 그거 아니에요’란 말을 해 ‘수소’가 더해진 것이다. 윤석열 후보는 최근 무속·주술 논란이 인 뒤 ‘무속열’ ‘윤짜왕’ 등의 별명이 추가됐다.
전문가들은 ‘정치의 놀이화’ 현상에 명암이 있다고 지적한다. 윤종빈 교수는 “젊은 층의 정치 관심도가 높아져 투표 참여가 제고될 수 있고, 정보 전달의 효율성이 높아져 짧은 기간에 대선 후보 검증 등 많은 것이 이뤄진다는 순기능이 있다”면서도 “검증과 네거티브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정치가 희화화되고 (유권자들의) 정치 냉소를 부추길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