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나는 누구에게도 삶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삶이 누구에게나 같은 정도로 힘들 리는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삶은 쉽지 않다. 내가 듣고 보고 경험한 모든 인생이 그랬다. 아침에 울면서 깨어났다. 세수하다 거울 속에서 늙어버린 자신을 보았다. 죽을 때까지 방안의 먼지를 치워야만 했다. 돈을 벌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조산원에서 태어났다.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자기가 될 수 없는 것이 되어야만 했다. 놀이터에서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울고 있었다. 소음에 시달리면서도 정적을 견디지 못했다.
사상가 폴 비릴리오는 비행기의 발명은 추락의 발명이며 선박의 발명은 난파의 발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생의 발명은 고단함의 발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행기나 선박의 운행에서 사고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삶의 운행에서 고단함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삶이 고단하다는 것은 상당 부분 동어반복이다. 산다는 것은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 일이다.
삶이 그토록 고단한 것이니, 사람에 대한 예의는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데 있다. 오스트리아의 문학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누군가 고단한 당신을 위로하고자 나직하게 노래한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노랫말처럼 곱게 흘러갔다는 뜻은 아니다. 그 역시 쉽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그 노랫말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삶이 쉽지 않은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보다 좋은 내일, 내일보다 좋은 모레, 매일매일 행복한 나. 제멋대로 미래를 꿈꾸는 것도 미망에 홀리는 것이다. 이것이 정도를 넘으면 죄를 짓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이 결락되어 있는 인간은 무력한 사람이 된다. 인생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삶을 사랑한 나머지 지나치게 행복을 꿈꾸어도 죄를 짓게 되고, 아예 꿈을 꾸지 않아도 무력해진다. 자기 아닌 것을 너무 갈망하다 보면 자기가 소진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자신이 왜소해진다. 그래서 인간은 가끔은 탁월한 무언가가 되고 싶기도 하다가 또 어떨 땐 정녕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삶이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데 있다.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는 의식주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이 사회에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 한 무임승차자가 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낸다는 뜻이다. 인간은 타인과 함께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 혹은 타인과 더불어 살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나 타인과 함께 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에세이스트 스가 아스코는 “우리는 혼자 있을 수 없었기에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로 정치의 세계는 권력의 희비극으로 얼룩진다. “재주 있는 사람은 부림을 당하고, 미련한 사람은 욕을 당하며, 강직한 사람은 월형을 당하고, 성인은 해침을 당한다(巧者役, 愚者辱, 直者刖, 聖者削·홍양호의 ‘형해(形解)’ 중)”.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서, 혹은 무엇인가 되어 보려다 죄를 짓고 싶지 않아서, 어디론가 은거한다. 마치 “바다에 들어가는 진흙소(泥牛入海)”처럼 사라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따금 기적이 일어난다. 삶의 고단함과 허망함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정치의 잔혹함과 비루함을 통절히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마치 결별을 선언해야 마땅한 상대와 재결합을 시도하는 사람들처럼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의 영광은 바로 끝내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자 결심한 그들의 마음에 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예술비평가 스탠리 카벨은 별생각 없이 그냥 결혼해서 무난한 듯 사는 일보다 (적절한 이유가 있다면) 이혼의 위기를 극복하고 헤어졌던 상대와 다시 재혼하는 일이야말로 의미심장한 결합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 결합은 별 고민 없이 진행된 첫 번째 결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이미 상대의 한계와 결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결합하기로 감히 결심한 것이다. 상대에 대한 오해나 불신을 극복하고 마침내 화해에 이른 것이다. 불행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함께 살아가기로 약속한 것이다.
나는 삶이나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혼한 배우자와 다시 결합하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인생이 고단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살아내기로 결심한다. 어떤 사람은 정치의 세계가 협잡과 음모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거의 유혹을 떨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들의 인생이나 정치는 그러한 자각이 없는 인생이나 정치와는 다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사는 인생이나 마냥 권력을 쥐려는 정치가 아니라 반성된 삶과 숙고된 정치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며, 정치는 그에 대한 응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