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호텔 보이로 일하고 밤에는 피아노 조율사 노릇을 하는 톰 리플리. 어느 날 팔 다친 피아니스트를 대신해 뉴욕의 상류층 파티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런데 리플리의 인생이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가 빌려 입은 재킷에는 프린스턴 대학 로고가 박혀 있었고, 그걸 알아본 선박 부호 허버트 그린리프가 이렇게 말을 붙인 것이다. “프린스턴에 다녔으니 우리 아들 딕을 알겠군. 디키 그린리프.”
순간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은 리플리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디키는 어떻게 지내죠?” 디키는 가업을 이어받기 싫다며 이탈리아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허랑방탕하게 지내고 있다. 허버트는 리플리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1000달러와 여객선 표를 내주며 디키를 데려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는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이 주연한 1960년 작 <태양은 가득히>와 달리, 맷 데이먼이 리플리 역을 맡은 1999년 작 <리플리>는 원작의 설정과 이야기에 충실한 편이다. 하이스미스의 소설과 영화 <리플리>는 ‘사이코패스’ 또는 ‘소시오패스’의 행동 방식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작품이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정신이상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이코패스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하지만 모든 사이코패스가 사람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여 성욕을 채우고, 인육을 먹고, 기괴한 기념품을 만들고, 희생자를 살려두면서 고문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연쇄 살인범은 사이코패스, 지능형 범죄자는 소시오패스 같은 이분법이 타당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 그렇다. 양자를 구분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사이코패스 검사표’(PCL-R)를 만든 사이코패스 연구의 개척자이자 권위자 로버트 D. 헤어 박사의 책 <진단명: 사이코패스>에 따르면, “영화와 소설을 제외하면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는 극히 드물다.” 끔찍한 연쇄 살인범은 북미 지역을 통틀어 100명도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사이코패스는 북미에만 200만에서 300만 명가량 존재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인구 중 1% 내외가 사이코패스인 셈이다.
그렇다면 사이코패스란 어떤 존재인가? 다시 <리플리>로 돌아가 보자. 나폴리 남쪽 몬지벨로라는 시골 마을에 도착한 리플리는 디키와 그의 약혼녀 마지를 만난다. 능숙한 거짓말로 동창생 행세를 하며, 평소 듣지도 않던 재즈를 좋아하는 척하면서 디키의 환심을 산다. ‘네가 잘하는 게 뭐야?’ 디키가 묻자 리플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서명 위조, 거짓말, 남 흉내 내기’.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걸 대놓고 자백하고 있지만, 너무도 당당한 태도로 이야기해버리기 때문에 디키는 리플리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헤어 박사의 기준에서 볼 때 리플리는 영락없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 할 수 있다. 사이코패스는 “사회학, 정신의학, 의학, 심리학, 철학, 시, 문학, 예술, 법 등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둘러대기, 허풍, 과시 등이 거짓으로 드러나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 사이코패스의 중요한 특징이다.”
우리는 모두 살면서 크든 작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사이코패스의 거짓말은 그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거짓말을 할 때 들킬까 봐 두려워한다. 반면 사이코패스는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왜 그럴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 외에 그 어떤 장기적인 고찰이나 반성 따위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에게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하다. 그러니 남을 속이고, 때리고, 훔치고, 죽여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거리낌이 없다. 죗값을 치를 수도 있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사이코패스는 오직 본인을 향한 모욕이나 경멸에만 진지하게 반응한다. 부잣집 아들 디키가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말과 행동을 자신에 대한 멸시로 여기며 차곡차곡 쌓아두는 리플리는 전형적 사이코패스일 수밖에 없다.
최근 우리 사회는 때 아닌 ‘소시오패스 논란’에 빠져들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해 국민의힘 대선 주자 원희룡 전 제주지사의 아내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강윤형씨가 내놓은 촌평 때문이다. 여당 측은 의료인의 권위를 빌려 정치적 비방을 했다며 의료 윤리 위반이라고 반발하는 반면, 강윤형과 원희룡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이다.
이재명의 행보를 되짚어보자. 정계 입문 전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그는 검사 사칭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성남시장으로서 본인이 설계한 업적이라고 자랑하더니, 문제가 되자 대장동 개발을 ‘국민의힘 게이트’라고 당당하게 몰아붙였다. 성남시의 조직폭력배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경기도 국정감사 자리에서 곤란한 질문을 받았지만 “으흐흐” 하고 웃어넘겼다. 심지어 경기도지사 당선 직후 “내가 끊어버릴 거야. 예의가 없어”라며 언론과 하던 생방송 인터뷰를 중단하는 등, 남이 자신을 모욕한다고 생각할 때는 격렬하게 반발하는 모습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나는 이재명을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이 논란이 그런 식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본인 스스로 테스트를 신청하지 않는 한 그에 대한 의학적 진단을 내릴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친형 고(故) 이재선씨의 정신병원 강제 입원 논란, 형수를 향한 욕설 파문 등 이재명을 둘러싼 믿기 힘든 소문은 예전부터 파다했다. 하지만 그는 상당수 지지자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의 두둔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과격하고 거칠수록 환호를 받았다. ‘대선 후보 이재명’은 우리 사회의 삐뚤어진 정치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사이코패스 범죄자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주도권 싸움에 집착하고 권력투쟁에 능하다. 심지어 전문가인 로버트 헤어 박사 역시 사이코패스 사기꾼에게 속은 경험이 있다. 애초에 사이코패스가 접근하여 영향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헤어 박사는 강조한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리플리> 같은 창작물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