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 9일에 1박2일 일정으로 속초 여행을 예약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뽑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박모씨·36세·회사원)
“이렇게 인물이 없나요. 이게 최선인가요. 기대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절망감이 들어요. 대선 거부 촛불이라도 들고 싶어요.” (A인터넷 커뮤니티)
대선이 4개월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뽑을 후보가 없어 우울하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름하여 ‘대선 블루(blue·우울감)’. 더불어민주당은 앞서 이재명 전 경기지사를 후보로 확정했고, 국민의힘은 내달 5일 원희룡·유승민·윤석열·홍준표(가나다순) 예비 후보 중 한 명을 후보로 선출한다. 양당 밖에서는 심상정(정의당)·안철수(국민의당)·김동연(새로운 물결) 등이 채비하고 있다. 일부 유권자는 이들 중에 자신의 표를 던질 만한 후보가 없거나, 결국 원치 않는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판단해 우울감을 호소하고 있다.
자영업자 이모(51)씨는 “이재명·윤석열·홍준표 셋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될 것 같은데, 모두 비호감이라 뽑고 싶지 않다”며 “(후보들의) 비리 의혹과 각종 논란, 망언 같은 것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실제 세 후보의 비호감도는 높은 편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19~21일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호감도는 30% 안팎에 그친 반면 비호감도는 윤석열(62%), 이재명(60%), 홍준표(59%) 순으로 높았다. 과거 대선을 앞두고는 선두그룹 후보들은 40~60%대의 호감도를 보였다.
이른바 대장동 의혹, 고발사주 의혹 등 수사 중인 사안에 유력 주자들이 관련돼있다는 점, 후보 간 거센 네거티브 공방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민심 이반을 부추긴다. 경기 군포시에 사는 주부 백모(63)씨는 “죄다 수사 대상인데 누굴 뽑겠느냐. 서로 악다구니하는 것도 보기 싫다”면서 “이런 대선은 처음”이라고 했다. 한 대선주자를 지지했다가 최근 철회했다는 대학원생 엄모(33)씨는 “자고 일어나면 논란이 하나씩 늘어나는데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오더라. 이런 사람에게 나라를 맡길 순 없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 정치 양극화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무주택자라는 직장인 안모(36)씨는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사회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며 “그냥 다 같이 망하자는 생각에 ○○○ 후보를 뽑을까 싶다”고 말했다. 공기업에 재직 중인 박모(44)씨는 “사회 전반적으로 혐오와 적대 감정, 극단적 대립이 만연한데 유력 주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편승하려는 것 같다”고 했다.
대선을 앞두고 불안과 우울감을 표출하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202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심리학협회가 발간한 연례 연구보고서(Stress in America)에 따르면, 미국 성인 68%가 ‘대통령 선거’를 주된 스트레스 요인으로 꼽았다. 2016년 실시된 같은 조사(52%)보다 높아진 수치다. 미 건강전문매체 헬스라인은 당시 선거가 정치 양극화, 코로나 팬데믹, 경제적 불확실성 등의 환경에서 치러졌고, 많은 유권자가 무력감을 느끼는 등 ‘선거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헬스라인은 선거 관련 뉴스 노출 제한, 정치 관련 대화 줄이기, 소셜미디어 사용 중단하기 등을 제안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많은 국민이 국가 운영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자괴감,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정치 양극화, 대선 후보 개개인에 대한 실망감, 사회경제적 불안을 방치하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 등이 우울감의 원인”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정치적 화합을 이끌 리더가 필요하고, 경제·코로나 등 구조적 문제가 해결돼야 그 우울감이 완화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