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山寺)에 가면 방향을 잃곤 했다. 어떤 절은 일주문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경내가 나오기도 했고, 경내에 발을 들여도 대웅전 앞마당까지만 ‘휘리릭’ 둘러보고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사천왕상 아래 서면 고압적인 각도에 괜스레 주눅이 들었고, 대웅전 불상 뒤 탱화는 다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 절을 마치 ‘불교 테마파크’처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이가 있다. 인문서 ‘아름다운 우리 절을 걷다’(지식서재)를 펴낸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학예연구사이자 작가 탁현규(49)씨다. 우리 옛 미술을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스타 강사이자 재치 있는 작품 해설로 주목받기도 한 주인공. 그와 함께 만추(晩秋)의 산사를 걸었다. 절 공간의 의미와 탱화 감상법까지, 절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덤이다.
◇북한산 명찰 ‘승가사’ 순례
“절은 전통 미술의 보고(寶庫)입니다. 전통 건축·조각·회화·공예 등을 모두 절 안에서 만날 수 있어요. 천년고찰까지는 아니어도 가까운 명산에 올라 명찰 한 곳만 제대로 둘러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절과 전통 미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탁씨가 추천한 곳은 서울 4대 명찰 중 구기동 북한산에 있는 승가사. ‘진흥왕순수비’가 있던 북한산 비봉에서 동쪽으로 1㎞쯤 떨어져 있는 산사다. 해발 450m 지점에 있는 데다 길이 험해 서울 시내 산사치곤 인적이 드문 편이다. 셔틀 차량 외 일반 차량으로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은 ‘덕분에’ 호젓하고 고즈넉한 운치가 남아 있다.
모든 절의 출발점은 ‘일주문’이다. 승가사 일주문 현판에는 북한산의 옛 이름인 삼각산을 따 ‘삼각산승가사’라 쓰여 있다. “절의 일주문에 들어서는 순간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일주문의 역할은 ‘여기서부터 경내이니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으시라’는 뜻입니다.” 탁씨가 설명했다.
바위산의 비탈을 살려 닦은 승가사는 756년(경덕왕 15년) 수태(秀台)가 창건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창건 후 여러 왕의 기도처로 이름 날렸다.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다가 1957년 비구니 도명이 중창(절 등을 여러 번 고쳐 새롭게 함)했다. 1972년부터 있었던 이 절의 주지 스님이었던 상윤 스님이 30년 동안 다시 일궜다는 절은 마치 바위산의 일부였던 듯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실존 인물이었던 승가대사를 기리는 절이라 하여 ‘승가사’라 불린다. 탁씨는 “승가사의 기원(起源)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며 대웅전 뒤편 ‘약사전(藥師殿)’으로 안내했다. “약사전은 병을 고쳐주는 약사불을 모시는 공간으로, 승가사에선 약사불 대신 석조승가대사좌상(보물 제1000호)이 있어요.” 커다란 암벽에 조그만 굴 형태의 승가사 약사전은 고려시대 땐 ‘승가굴’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동굴 안 석조승가대사좌상 뒤편에서 나는 약수는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와 인연이 깊다. 암반 사이에서 솟아 나오는 이 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도 이 약수 한 모금 하기 위해 일부러 절에 오르는 이들이 많다. 약사전 옆으로는 108계단이 이어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 끝에 올라서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승가사의 백미로 꼽히는 승가사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이 기다린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은 고려 초 10세기경에 완성된 것으로 마왕을 항복시키는 석가모니불의 고유 손짓인 항마촉지인(왼손은 참선하듯 편히 펴고 오른손은 땅을 향해 내린 모양)을 하고, 머리 위엔 팔각 보개(덮개)를 쓰고 있다. 탁씨는 “마애석가여래좌상 얼굴이 오랜 세월에도 훼손이 덜 된 건 보개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약사전의 석조승가대사좌상, 108 계단과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해 한 달 걸려 산으로 옮겨왔다는 범종, 현대 사탑(寺塔)의 건축미를 엿볼 수 있는 ‘亞(아)’자형 평면의 승가사 9층 석탑 그리고 대웅전 ‘목각 탱화(목각탱)’는 승가사 순례 시 놓치지 말아야 할 ‘빅 5’나 다름없다.
◇단원의 탱화, 겸재 그림 속 그 절
탁씨는 서강대 사학과 시절 ‘간송미술관’을 찾았다가 우리 미술에 빠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어머니가 누나 대입 시험 전, 절에 기도하러 가실 때 따라 다니다가 어깨너머로 탱화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후 탱화를 공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절을 찾아 다녔죠.” 절에서 만나는 불교 미술은 탁씨의 전문 분야다. “제대로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으려면 성당에 가야 하듯, 제대로 탱화를 감상하려면 신발 벗고 대웅전으로 들어가야죠.”
승가사 대웅전에는 목각탱이 있다. 나무로 깎아 만든 탱화다. 목수 삼형제가 장장 8년 동안 절에 기거하며 은행나무 200그루로 완성했다고 한다. 입체감을 살려 조각한 뒤 금으로 칠해 넣은 기법이 특이하다. 목각탱을 감상하고 있으니 대웅전에 발을 들인 비구니 스님이 따스한 미소로 말했다. “절을 완성하는 데 참여한 목수 삼형제 중 아이 아빠가 있었다고 해요. 아이가 백일 때 절에 올라왔다가 모든 일을 끝내고 집에 가니 아이가 아빠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답니다.” 스님의 말에 탁씨는 “그만큼 엄청난 불심으로 완성한 공간”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씨는 탱화 감상을 이어가고자 한다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창건한 경기도 화성 화산 용주사도 가보라고 추천했다. 대웅보전의 후불탱(1790년)만 보고 와도 ‘성공적’이라고 했다. “용주사 후불탱은 석가모니불(영산탱), 약사불(약사불탱), 아미타불(아미타불탱) 모임 장면을 한 폭에 담은 김홍도 작품으로 당시엔 파격적인 서양화법을 가미해 섬세하고 생생하게 표현해 낸 역작입니다.”
승가사는 도보 이용 시 ‘승가사 입구’ 버스정류소 하차 후 ‘러시아대사관저’를 지나 승가공원지킴터로부터 1.2㎞ 등산 코스를 이용한다. 승가사까지는 40분~1시간 소요 된다. 걷기 힘든 이들을 위해 운행하는 승가사 셔틀 차량(편도 1000원)은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매 시 정각 5분 전에 구기동 ‘러시아대사관저’ 부근에서 출발한다. 용주사는 차량 이동이 가능하다.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는 겸재 정선이 65세 무렵 서울 근교와 한강변의 명승 명소를 그린 ‘경교명승첩’의 그림 ‘독백탄’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다. 탁씨는 “‘독백탄’은 마재(지금의 능내 부근)에서 바라본 두물머리 풍경인데 그림 속 운길산 한 쪽에 있는 작은 절이 수종사”라고 했다. 수종사의 운치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는 듯하다. 여전히 전망이 좋은 데다 일출과 운해가 낄 무렵 풍경이 수려해 사진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다. 여기저기 쌓인 돌탑만 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찾았는지 가늠된다.
11월 초 현재 수종사는 ‘단풍 맛집’으로 변신했다. ‘해탈문’으로 오르는 계단 위 나무들뿐 아니라 세조가 하사했다는 500여 년 수령 은행나무도 노랗게 물들었다. 이 은행나무와 수종사의 기원이 된 범종을 보기 위해 평일에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 ‘산신각’에 오르면 단풍 든 운길산의 품에 안긴 수종사 기와지붕과 그 너머 푸른 북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근엔 ‘다산 정약용 유적지’ ‘능내역 폐역’ ‘물의 정원’ 등이 있어 나들이 코스를 짜기에도 좋다.
◇절경 만나는 ‘무지개다리’ 두 개
전남 순천 조계산의 두 절 선암사와 송광사도 가볼 만하다. 태고종의 선암사, 조계종의 송광사. 천년 세월 동안 이어온 두 산사는 ‘순례길’로 이어져있다. 등산이나 트레킹을 좋아한다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두 곳을 오가며 순례할 수 있다. 걸어서 서너 시간, 차로는 20~30분 거리에 있다. 두 절 모두 ‘무지개다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 두 곳의 무지개다리 인증샷이 경쟁하듯 올라온다. “절 초입에 있는 무지개다리는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요. 특히 조계산 동쪽 선암사의 무지개다리인 승선교(昇仙橋·보물 제400호)는 우리나라 절의 무지개다리 중 으뜸으로 꼽힙니다.”
승선교는 ‘선계로 오르는 다리’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놓인 다리다. 다리 나이로만 따지면 300년이 넘었다. 승선교를 지나면 ‘선계로 내려온다’는 뜻의 누각 ‘강선루(降仙樓)’가 나온다. 탁씨는 승선교 아래에서 계곡에 비친 강선루를 감상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산수와 인문의 만남이 아니냐”며 탄성을 내뱉었다. 강선루를 지나 선암사 일주문으로 향하는 내내 계곡 물소리가 이어진다. 탁씨는 “오리지널 노이즈 캔슬링(이어폰 등의 소음 차단 기능)”이라며 웃었다. 속세의 소음을 계곡 물 소리가 씻어준다는 뜻이란다.
선암사는 꾸민 듯 안 꾸민 듯 담박한 미를 간직한 산사다. 억지스럽게 개보수를 한 인공적인 ‘흉터’가 별로 없다. 높지 않은 조계산과 어우러져 안정감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각황전 옆 수령 350~650년에 이르는 매화나무 ‘선암매’ 50여 그루가 만개하는 3월 말이 1년 중 가장 예쁘다고 하지만, 단풍 내린 가을도 그에 못지않다. 대웅전과 함께 ‘丁(정)’ 자형 건물인 원통각(圓通閣), 팔상전(八相殿) 등 절 여기저기 볼거리가 가득하다. 꽃살문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다는 원통각의 ‘모란 꽃살문’ 등 경내를 아기자기하게 수놓은 ‘디테일’을 발견하는 재미도 놓치지 말자.
송광사는 1969년 조계총림(승려들의 참선수행·경전 교육기관)이 된 대도량이다. 규모가 커서 제대로 둘러보려면 하루가 모자란다. 무지개다리 위의 집인 ‘우화각’은 송광사의 절경을 대표하는 곳 중 하나다. 우화각을 지나면 절의 ‘검문소’ 역할을 하는 사천왕상이 맞는다. 탁씨는 “전국 절의 사천왕상 중 최고라 생각하는 사천왕상이 여기에 있다”며 가리켰다. 사천왕상 중 탁씨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동방지국천왕’. “호탕하면서도 자애로운 얼굴은 한국 조각 역사에서 단연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야 할 것입니다. 보기만해도 맑고 강한 기운을 얻기도 한답니다.”
‘산 속 보리밥집’ ‘20첩 산사정찬’, 절 근처 뜻밖의 미식 여행
산사 가면 생각나는 맛
산사를 순례하며 영혼을 달랬으니 시장기를 달랠 차례. 이왕이면 건강 맛집을 눈여겨본다.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에서 10분 거리에 기와집순두부 조안본점은 30년 전통의 재래식 생두부 전문 식당. 국내산 콩을 고운 자루에 걸러내는 방식으로 두부를 빚는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의 순두부는 말캉말캉한 ‘푸딩’ 같다고 해서 ‘푸딩 두부’라는 별칭을 얻었다.
하얀 순두부백반(9000원)과 재래식 생두부(1만1000원), 두부김치(1만4000원), 군두부(1만4000원) 등은 바로 만든 두부의 고소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대표 메뉴. 하얗고 밍밍한 맛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춧가루 양념이 가미된 비지찌개 콩탕백반(9000원)이 먹을 만하다. 요즘 같은 나들이 철엔 평일 점심에도 대기가 기본. 두부를 빚고 나온 뜨끈뜨끈한 비지가 수시로 나오는데, 비지는 원하는 만큼 각자 셀프 포장해 가져갈 수 있다.
순천 선암사와 송광사 주차장 주변엔 사찰음식이나 토속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있어 식사를 해결하기 편하다. 송광사 부근 소소산식(벌교식당)은 불심 깊은 주인이 정직하게 산사 음식을 만들어낸다. 산사만찬(1인 2만5000원)은 산사 음식을 그대로 재현한 메뉴로 구성된다. “일반인들에게는 간이 슴슴해 추천하지 않는다”는 게 주인 얘기다. 채식주의자라면 ‘도전’해 볼 만하다. 산사정찬(1인 1만7000원)은 한식 한상 차림에 가깝다. 산사정찬이라고는 하지만 보쌈이나 생선구이(조림) 등도 나온다. 꼬막 철인 11월부터는 꼬막비빔밥을 찾는 단골들이 발길한다.
선암사와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엔 보리밥집이 유명하다. 선암사 승선교에서도 꼬박 1~2시간을 걸어가야 맛볼 수 있는 송광면 장안리 조계산 보리밥집 원조집은 선암사와 송광사 사이 굴목이재 부근에 있는 산중식당이다. 거리로 따지면 선암사에서는 2.8㎞, 송광사에서는 3.3㎞ 정도다. 동그란 양은쟁반에 보리밥(7000원)과 함께 10여 가지 나물반찬이 나온다. 야채파전(7000원), 도토리묵(7000원)도 맛있다. 등산객이나 순천 시민에게는 오래된 맛집이지만 ‘고행을 감수하고라도 먹겠다’는 의지의 ‘등린이(등산+어린이·등산 초보)’들 발길이 잦아 최근 다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