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畵人). “작가는 못 되고, 그냥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며 웃는 정재은(52)씨는 ‘낙원’에 산다. 쉰둘.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남편과 두 딸을 떠나 홀로 낙원으로 왔다. 그의 남편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로 활약하는 성 김(61) 전 주한 미국 대사. 한국계로 미 외교 분야 최고위직에 오른 남편을 30년 가까이 내조해온 그는 “이제 마사 스튜어트(살림의 여왕)는 그만하려고요!” 하며 소리 내 웃었다.
작년 여름,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마련한 작업실이 그의 낙원이다. 화려한 대사관저 대신, 엘리베이터가 종종 멈춰 서는 낡고 오래된 건물에서 물감, 종이와 씨름하며 산다. 이달 10일 전시를 앞뒀다. 미대(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지 30년 만에 여는 첫 개인전. ‘소복소복(召福召福)’이라 이름 지은 전시에 그는 유화가 아닌 민화(民畵)를 건다. “복을 부르는 그림이잖아요, 우리 민화가. 인간 본연의 마음에, 삶에 가장 가까운 그림.”
세상에 이미 선보인 적 있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세종(송강호 분) 임금 뒤에 걸린 일월오봉도와 교태전의 모란 병풍을 그가 그렸다. 프랑스 낭트와 파리를 거쳐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고 있는 ‘책거리 순회전’에 ‘첩첩서중(Lost in Books)’을 출품했다. 전시를 기획한 정병모 교수는 “책들의 겹겹이 쌓임을 통해 인생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여주는 작품으로, 건축적 구성미가 뛰어나 스페인 현지에서도 정재은의 책가도를 대표작으로 소개한다”고 했다. 정작 정재은은 “10년은 더 익히고 묵힌 뒤에 보여드려야 했는데 부끄럽다”고 했다. “제일 무서운 총이 눈총이라는데, 민화 하시는 분들께 누가 될까 두려워요. 머스크 따라 우주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입니다(웃음).”
‘성 김의 아내’가 아니라 ‘작가 정재은’의 삶을 시작한 그를 지난달 19일 종로 작업실에서 만났다. “드러눕고 싶을까 봐” 소파를 놓지 않은 공간. 맨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자 창문으로 가을 하늘이 들어찼다.
◇ ‘피어나는’ 그림, 민화
-쉰둘에 여는 첫 개인전이라 소회가 남다르겠다.
“더 무르익은 뒤에 보여드려야 하는데, 부끄러울 뿐이다. 여러모로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 시간이 될 것이다.”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왜 민화인가.
“외국을 떠돌며 살아서 그런가, 시선이 오히려 안으로 들어오더라. 나이가 있어 그런 것도 같고. 서양화를 할 땐 모르는 것에 무작정 다가가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뭔가 잡힐 듯 잡힐 듯한 것을 향해 가는 느낌이다. 다시 대학 가라고 하면 동양화나 도예를 할 것 같다.”
-민화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유머와 해학이 있어서 좋다. 틀에 매여 있지 않고, 시점도 여럿이 합쳐져 있어 재미있다. 잘 아시겠지만,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호랑이는 지배층을 풍자한 것이고, 석류 포도 고추 그림엔 다산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 있다. 저고리 휙 벗어던져 놓고 그다음을 상상(?)하게 하는 책가도도 있다. 수박에 칼을 꽂은 그림을 보신 적 있는지. 시댁에 대한 원망을 표현한 거라더라(웃음). 현대미술처럼 어렵지 않고, 한눈에도 무슨 이야기인지, 무엇을 소망하는지 알 수 있는 그림이라 오래 사랑받는 것 같다.”
-성 김 대표가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했을 때 민화를 배우기 시작했나.
“그건 아니다. 남편이 임기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고2였던 둘째가 입시 앞두고 학교를 옮기기 힘들어 나와 서울에 남아 있게 됐을 때 배울 기회를 얻었다. 그 무렵 예술의전당에서 한국화 수업을 한다기에 들으러 갔다가 ‘행복이가득한집’이란 잡지사가 마련한 민화 클래스까지 알게 돼 입문한 것이다.”
-수묵화를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수묵화도 좋지만 다양한 색으로 표현하고 조합하는 민화가 더 좋았던 것 같다. 뭣보다 우리 종이와 분채 물감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캔버스와 달리 종이(순지 또는 옻지)는 무척 강인해서 물에 빨아도 그대로 있다. 분채 물감은 또, 사람처럼 예민하고 까다롭다. 아교 물에 분채를 일일이 개서 칠하는데, 그 비율이 맞지 않으면 종이에 물감이 붙지 않는다. 이 분야 대가인 정종미 교수님 책들을 구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분채가 종이와 만났을 때 ‘피어나는’ 그 느낌이 정말 좋더라.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달라지고 묵직해진다고 할까. 된장이 삭는 것처럼.”
-30년 만에 붓을 다시 들었을 때 두렵지 않았나.
“그냥 좋았다. 내가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란 생각은 전혀 없이 완전히 출발점에서 새로 시작하는 마음이었다. 유화처럼 준비물이 많아 번거롭지 않은 것도 좋았다. 작업대 그런 거 없이 우리 집 식탁에서 단출하게 시작했다.”
-2016년에 입문했는데 2017년 그룹전을 하고, 2019년 시작된 ‘책가도 순회전’에도 참여했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더라.
“아,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열심히 그리다 보니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문이 열리며 길이 생겼다.”
-영화 ‘나랏말싸미’ 미술 작업에도 참여했다.
“최정아갤러리에서 열린 그룹전 ‘작지만 큰 기쁨’전에 작은 민화를 걸었는데, 그걸 보고 영화사라며 연락을 했다. 처음엔 사기 치는 줄 알았지(웃음). 박찬욱 영화 ‘아가씨’로 벌칸상을 받은 류성희 미술 감독이 내 그림이 마음에 든다며 작업을 제안했다. 일월오봉도, 모란도 등 다섯 점을 작업했다. 스크린으로 그림을 보니 정말 신기하더라(웃음).”
◇소복소복, 복을 부릅니다
정재은의 첫 개인전 ‘소복소복’은 10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직동 최정아갤러리에서 열린다. 그는 “15평 남짓 한옥에서 여는 아주 작은 전시”라고 했다. 모란도, 책가도 등 18점이 걸린다. 갤러리 최정아 대표는 “그레이(회색) 톤이 있을 만큼 전통 민화보다 채도가 낮은, 정재은 스타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원색으로 화려한 전통 민화와 달리, 현대적이다.
“모사보다는 내 나름의 감성과 해석으로 조금씩 변형해봤다. 종이도 내가 원하는 색으로 물들여보고, 장식이나 기물 등 디테일도 조금씩 다르다. 그래도 기본에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모란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본 조선시대 그림들과는 달라 보인다.
“꽃의 형태는 거의 비슷한데 모란도에 꼭 들어가는 요소, 이를테면 이끼 부분을 걷어냈다. 색 배합도 조금 달리해 봤고, 분채 물감뿐 아니라 연필도 활용해봤다. 특히 나뭇잎 부분을 연필로 그렸는데, 흑연이 보는 각도에 따라 빛에 반사돼 반짝거리는 게 좋아서 시도해봤다.”
-전통을 따라가는 게 싫은가.
“그건 아니고, 민화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다. 전통을 답습하기보다는 현대미술과 접목해 좀 더 진화시키면서 격을 높이고 싶었다.”
-’소복소복’이라는 전시명이 예쁘다.
“민화가 복을 부르는(召福) 그림이라…. 겨울 전시이기도 하니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느낌도 줄 수 있고. 세상이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라 전시에 소망을 담고 싶었다. 한자로 써도 글자 모양이 참 예쁘다.”
-스페인 책거리 순회전에 출품한 ‘첩첩서중’도 현지에서 호평받고 있다더라. 제목도 재미있고, 책들 사이 사람 형태의 기물이 올라가 있는 것도 독특하다.
“우리 인생이 책 한 권 같다는 생각에 그렇게 표현해봤다. 사람들 사이 인연이 중첩되고 이어지면서 한 삶을 이루지 않던가. 책거리는 직선의 짜임으로 이뤄져 외국인들에게도 현대적으로 다가가는 것 같다.”
-어머님이 한복 디자이너였던 것도 민화 작업에 영향을 미쳤을까. 한복의 배색, 질감 같은 것들.
“글쎄. 자라면서 본 것들이 내 안에 쌓였겠지만, 그땐 싫었다. 형제가 없어 외로운데 엄마는 늘 바쁘시니 한복이 싫더라(웃음). 지금은 후회된다. 엄마가 직접 디자인해 만든 비단도 있었는데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자수도 점점 사라지고. 그런 소중한 것들이 남아 있으면 더 다양한 작업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트렁크 두 개 들고 무작정 서울로!
정재은은 이번 전시를 위해 작년 여름, 당시 필리핀 대사였던 남편과 딸들이 있는 마닐라를 떠나 서울로 날아왔다. “필리핀에서는 코로나 봉쇄에 날씨까지, 도저히 그림이 그려지질 않아 결단을 내렸죠. 트렁크 두 개에 물감, 옷가지 몇 점, 램프 들고 서울로 왔어요. 성인이 된 두 딸은 기꺼이 찬성해줬고, 남편한테는 그냥 통보했지요. ‘간다, 나는’ 하고요. 하하!” 서울로 혼자 이주해온 사이 남편은 대북특별대표를 겸한 인도네시아 대사로 옮겨갔지만, 아내는 아직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가보지 않았다.
-남편은 그럼 독수공방 중이신가.
“필리핀에선 둘째가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두 딸이 다 미국에 있어서 인도네시아에선 혼자 지낸다.”
-집안 어른들과 주변에서 걱정 안 하시나.
“불화설, 아니 내가 이혼을 요구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더라. 하하! 말할 수 없이 미안한데, 필리핀에서는 그림 그리고 전시 준비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뭐만 먹으면 위가 아파서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 무수리 타입이라 절대 아픈 스타일 아닌데(웃음). 아무래도 서울에 가서 작업을 해야겠다 싶어 인터넷으로 들어가 찾아봤다. 언젠가 최정아 대표가 ‘낙원동 분위기가 묘해’ 했던 말이 생각나 그쪽도 알아보다 마침 수리된 북향 작업실이 나와 있길래 그날로 계약해 버렸다.”
-그 열정을 지금껏 어떻게 숨기고 살았나.
“그러게. 나도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과거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인데, 어떻게 살았나 싶다. 그땐 엄두가 안 났다. 남편 발령지 따라 2~3년마다 이사 다니고, 아이들도 키워야 했으니. 지금도 주위에선 내가 이해가 안 된다더라. 편한 생활 놔두고 왜 여기 와서 고생하냐고. 근데 그림 그릴 때 너무 좋은 걸 어떡하나. 입국해 자가 격리 하는 2주조차도 행복하더라.”
-서울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나.
“내 힘으로 월세 내고 작업 비용 마련한다. 아르바이트 네 가지 하면서. 가끔 남카(남편 카드)로 장은 보지만 되도록 내 힘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새 공간에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지금의 내가 좋다.”
-명함에 화인(畵人)이라고 적었더라.
“작가는 전혀 못 되고, 그냥 그림 그리는 사람,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 그림으로 세상에 서고 싶은 사람이란 뜻으로 새겼다. 두 딸이 제일 좋아한다. 자기들이 엄마랑 안 놀아줘도 되니. 하하!”
-최근에 성 김 대북특별대표가 ‘종전 선언’ 관련해 서울 다녀갔다는 뉴스가 나오던데.
“1박 2일로 일정이 줄면서 아주 잠깐 봤다. 원래는 인사동 밥집 ‘조금’에 가서 솥밥 먹기로 했는데 시간이 없어 숙소에서 잠깐 보고 헤어졌다. 우리는 견우 직녀인가 봐 이러면서. 하하!”
◇조지 클루니 닮은 남편과 산다는 것
정재은과 성 김(한국명 김성용)은 1993년 결혼했다. 미국 국적에다 나이 차이가 많아 “그저 어렵기만 한” 남자였는데, 그가 차고 있던 시계에 마음이 끌렸다고 했다. “숫자가 크게 새겨진 낡은 시계였는데 저런 시계 좋아하는 사람이면 나와 맞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버님 시계였어요(웃음).”
성 김의 부친 김재권은 1970년대 주일 공사로 일하다 ‘김대중 납치 사건’ 관련해 공직에서 물러난 뒤 미국으로 온 가족이 이민했다. 지난 2011년 미국의 첫 한국계 주한 대사로 발탁된 성 김이 국무부에서 선서식을 할 때 “아버지가 이 자리에 계셨다면 정말 자랑스러워하셨을 것”이라며 눈물을 글썽인 일화가 유명하다. 정재은은 “아버님에 대한 남편의 효심이 정말 각별했다, 로스쿨 졸업하고 검사로 일하던 남편이 외교관으로 직업을 바꾼 것도 아버님 영향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시아버님을 어떻게 기억하나.
“우리가 약혼했을 때 이미 폐암 말기셨다. 말단 외교관인 남편이 한창 일 배울 시기인데 ‘아버지와 함께 있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며 1년 휴직계를 내고 워싱턴 DC에서 LA로 날아갔다. 간병하느라 힘들었지만 아버님 덕에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국 드라마 틀어드린 뒤 1시간씩 안마해드렸다. 어린 내가 타국에 와서 고생한다고 정말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외모도 멋지고 인품도 훌륭한 분이었다.”
-성 김의 한국 대사 시절, 대사 부인이 궂은 일 도맡아한다고 해서 ‘무수리’란 별명이 붙었다더라.
“대사관저 살림살이를 책임져야 하니 일이 많은 건 당연하다. 누굴 잘 시키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또 공사(公私)가 분명해야 해서 우리 식구 쓰는 냉장고는 우리 월급으로 채워 넣고, 대사관 차도 사적으로는 이용하지 않았다. 대사 아내들 모임에도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갔으니까(웃음). 직원들과는 정말 잘 지냈다. 생일엔 꼭 케이크 챙겨드리고 음식 해서 나눠 먹고. 아직도 다들 연락하며 지낸다.”
-재미 교포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던데.
“이상하게 바꾸기 싫더라. 전쟁 나면 나는 헬기 못 타는 거다. 하하! 남편이 ‘이런 여자와 사니 내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하더란다.”
-필리핀 대사 부임할 때 선서식에서 존 캐리 장관이 성 김을 ‘외교계의 조지 클루니’라고 했다던데. 동의하시나?
“글쎄,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난 잘 모르겠다(웃음). 언젠가 백악관에 갔을 때 멀리서 진짜 조지 클루니를 본 적이 있다. 저 멀리서 지나가는데도 광채가 나더라.”
-오바마 대통령도 보셨나?
“일본 아베 총리가 미국 왔을 때 백악관 디너에 초청받은 적이 있다. ‘라저 댄 라이프(larger than life)’라는 표현이 있듯이, 본래의 자신보다 1.5배는 더 커보이는 아우라가 있는 사람이었다. 압도적이었다.”
-미 외교관들 중 기억에 특별히 남는 사람이 있는지.
“주한미대사도 지내신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 남편의 상사였는데, 안경 너머 학구적인 눈빛과 한없이 따뜻했던 성품이 잊히지 않는다.”
-남편이 한국 대사 부임할 때 국무부 선서식에서 두 딸도 엄청 울었다던데.
“그건 할아버지 때문이 아니고 정든 학교,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운 건데 기사가 그렇게 났다. 하하!”
◇쌀 씻을 때도 기도한다
-이 나라 저 나라 옮겨 다니며 딸들 키우기도 쉽진 않았을 것 같다.
“아무래도 히든 로스(hidden loss·안 보이는 손실)가 많지. 친구고 학교고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니. 그래서 가능하면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생존력은 강하다. 어디 가서 어떻게 살지 모르니 네 앞에 있는 음식은 무조건 잘 먹어라가 우리 집 원칙이다. 이사 갈 때도 한 사람당 트렁크는 무조건 하나! 짐을 최소화해야 옮겨 다니기 편하니까(웃음). 낯선 곳에 트렁크 하나씩 들고 딱 떨어지면 가족은 결속할 수밖에 없다.” 큰딸 에린은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뒤 의대를 준비하고 있고, 둘째 에리카는 브라운대 4학년으로 교육과 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두 딸 모두 아이비리그에 보낸 비결이 있을까.
“아이고, 그런 거 없다(웃음). 밥만 열심히 해줬다. 쌀 씻을 때도 기도하면서. 하하! 집에서 먹는 건 김에 밥만 싸서 먹어도 맛있지 않은가. 되도록 아이들 삶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무엇이든 물어오면 최선을 다해 답해줬다. 딸들이 어떤 길을 가든,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다. 이런저런 시행착오 겪으며 자기 색깔대로, 풀(full)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남편도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가.
“딸들에겐 최고의 아빠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 학교 행사엔 꼭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혼도 내는지.
“물론이다. 요즘은 아이들을 너무 혼내지 않아서 문제 아닐까. 특히 생활 습관, 인사 안 하는 거. 이런 건 아주 엄하게 가르친다.”
-외교관, 아니 협상의 전문가인 남편과 부부싸움 하면 누가 이길까.
“남편이 검사 출신이라 말로는 못 당한다, 하하! 내가 나이도 한참 어리지 않나. 근데 나이 들면서는 내가 가끔씩 그간 쌓아두었던 걸 꽝 터뜨리기도 한다(웃음).”
-남편에게 받은 선물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남편과 맛집 찾아다니기를 좋아하는데, 어느 식당에서 음식을 담아 내온 접시가 하도 예뻐서 감탄했더니 출장 간 남편이 어느 날 그 접시를 사 왔더라. 짐 들고 다니는 거 질색인 사람이(웃음).”
정재은씨는 남편과 가족에 대해 말을 아꼈다. 특히 대북 협상가로 활약하는 성 김 대사에 대해선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거든요. 차관급인데도 비행 시간이 아주 길지 않으면 무조건 이코노미를 타요. 열 몇 시간 비행기 타고 와서 바로 직장으로 가는 때가 허다하고요. 그런 사람에게 제가 누가 되면 안 될 것 같아서(웃음). 그저 남편 하는 일이 양국에 모두 도움이 된다면 좋겠어요.” 한결 같은 부부 금실의 비법을 묻자 잠시 목소리가 커졌다. “가끔 이렇게 떨어져 살면 돼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