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편의점엔 ‘허풍 대잔치’가 열린다. 내가 선정한 ‘뻥 그랑프리’ 수상자는 자신이 야쿠자 두목의 수양딸이라고 주장하는 손님이었다. 그는 젊을 적 일본에 살았는데, 그때 일한 식당 주인이 야쿠자 두목이자 엄청난 재력가로, 열심히 일하는 자신을 어여삐 여겨 수양딸 삼아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 두목이 조직 간 세력 다툼 과정에 뇌를 다쳐 수년간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 중인데, 유언 내용을 두목 가족들이 알고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한국에서 숨어지내고 있으며…. 아, 뭐가 이리 복잡하고 오색찬란해. 아무튼 그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수양딸께서는 자정 무렵이면 편의점에 찾아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영화 같은 인생 사연을 말씀하셨다.
자신을 H그룹 명예회장님 운전기사였다고 소개하는 손님도 있었다. 그는 명예회장님이 전국 방방곡곡 컨테이너에 비자금을 숨겨두었다며, 자기만 장소를 안다고 했다. “저한테 한 군데만 조용히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졸랐더니 ‘예끼, 이 친구야! 내가 그걸 왜 알려줘?’ 하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기만 했다. 직업 의식이 철저한 분이었다. 언젠가 편의점 점주 모임에 갔다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업계 선배님이 껄껄껄 웃으며 말씀하시더라. “나도 편의점 20년 하는 동안 그런 손님을 다섯명쯤 만났어.” H그룹 명예회장님은 참 많은 운전기사를 두고 있었나 보다. 여하튼 그 뒤로는 산촌 구릉에 용도가 의심되는 컨테이너가 보일 때마다 회장님의 비자금을 떠올리곤 한다. 전국 곳곳, 많단다.
이뿐인가. 점주들은 각자 자기 점포의 ‘뻥 그랑프리’ 후보를 내세웠다. 카타르 국왕의 여덟째 아들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아라베스크한 손님이 있고, 월남전에서 베트콩 1개 사단을 기관총 하나로 격파하고 돌아왔다는 듬직한 람보 손님 이야기도 등장했다. “다음에 꼭 무공훈장을 보여주겠다” 약속하셨다는데, 언제나 “다음에!”만 반복한 지 벌써 몇 년째라지. 30억 복권에 당첨된 적 있다는 손님, 유명 여배우의 옛 남친이었다는 손님, 대통령 경호실 비밀 요원이었다는 손님, 자기 집안 논밭이 멀리 지평선을 이루었다는 몰락한 만석꾼 집안의 장손까지… 세상에는 참 대단한 인물이 많다. 욕망의 다양한 그림자를 심야 편의점에서 만난다.
고달팠던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가 끝나고 이른바 ‘단계적 일상 회복’이 시작된 지난 주말, 편의점 점주 몇이 오랜만에 만났다. 예의 그 ‘뻥 그랑프리’ 이야기가 나왔다. 그동안 업그레이드된 뻥도 있고, 한동안 보이지 않는 뻥도 있다. 그러다 누가 문득 “뻥을 쳐도 좋으니, 혀 꼬인 목소리로 한참 수다만 떨고 가도 좋으니, 야간에 손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라는 말에 잠시 숙연해졌다. 시간당 손님 숫자가 0을 찍는 그 심정을 아시는지.
얼마 전엔 자영업자 영업손실 보상이 시작됐다. 지난 3개월 동안 자영업자들이 입은 손실을 정부에서 보상해주겠다는 것이다. 만세!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진일보한 제도”라고 관계 부처 장관께서는 크게 자랑하시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가관이다. 일단 보상을 받게 된 식당이나 카페는 쥐꼬리만 한 보상금에 울화통이 치밀고, 편의점은 아예 대상에서 제외돼 망연자실이다. 직접적인 영업시간 제한을 받지 않았으니 보상해 줄 수 없다나. 누군지 몰라도 그동안 대한민국에 살지 않은 사람이 만든 법안인 것은 확실하다. 식당과 카페가 문을 닫으면 근방 자영업자가 모두 죽는다. 그런 상황에 누군 주고 누군 안 주고…. 행정명령을 받지 않았다고 보상해주지 않는다면, 직접적인 소득 손실을 보지 않은 모든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은 왜 주었는가.
눈물 머금고 21세기판 야간 통금(通禁)의 나날을 묵묵히 견뎠더니 돌아온 대답은 ‘당신들은 손해 본 것 없지 않으냐’는 식의 세상 물정 모르는 배척이다. 그런 상황에 또 누군가는 ‘총량제’가 없어 자영업자들이 불나방처럼 덤벼든다고 비웃는다. 우리가 마치 음식 쓰레기라도 되어 버린 느낌이다. 우리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서글픈 이야기는 이쯤 하자. 애당초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며 자영업의 길을 택했던 것이 아니니 다시 주먹을 쥐고 일어날 따름이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란 노랫말 뜻을 애타게 돌아본 지난 2년. 그깟 보상 같은 건 바라지 않으니, 뻥쟁이 정치인과 영혼 없는 관료의 브리핑 같은 것도 믿지 않으니, 그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만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편의점 진열대와 유리창을 닦고 또 닦는다. 다시 떠들썩한 심야 편의점을 기다리며 바닥과 앞마당을 쓸고 닦는다. 야쿠자 두목의 수양딸을 기다린다. H그룹 운전기사님도 여전하시겠지. 구수했던 뻥님들이여, 어서 여기 오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