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긴한 볼일이 있어 부산에 갔다가 일부러 틈을 내서 ‘해운대 블루라인파크’에 들렀다. 해변을 끼고 달리는 관광 열차에서 즐기는 풍광이 꽤 볼만하다는 소문을 들어서다. 상쾌한 기분으로 입구로 향하는 길에 사람 키 높이의 두 배쯤 되는 아치에 ‘정국아 생일 축하해’ ‘Happy JK Day’ 등 꽃으로 장식한 현수막이 가득했다. ‘정국’이 누군지 의아한데, 아내 또한 고개를 갸우뚱했다. 연인끼리 벌이는 무슨 사랑의 이벤트겠거니, 하고 지나쳤다.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표를 끊고 관광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중년의 여자 도우미가 안내를 끝내고 여유가 생겼는지 씩 웃으며 앞쪽을 가리켰다. 잘생긴 청년 얼굴을 커다랗게 새긴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인기 절정의 방탄소년단(BTS) 멤버 ‘전정국’이란다. 생일을 맞아 팬클럽에서 준비했다는데 코로나 팬데믹에도 생일을 맞은 ‘정국’의 현수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러 오는 외국 팬도 많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실물도 아니고 사진을 보려고 2주일의 격리를 무릅쓰고 외국에서 온다고? 이 난리 통에? 세상 참 요지경 속이네.” 아내와 마주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BTS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반세기 전 영국 팝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콘서트 때 겪은 엄청난 문화적 쇼크가 떠올랐다. 당시 공연 중 흥분한 여성 팬들이 괴성을 지르거나 울다가 기절하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속옷을 벗어 무대로 던졌다는 뜬소문까지 떠돌았다. 매스컴에서 대문짝만하게 보도했고 가부장적인 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기차 안팎도 온통 정국의 생일 축하 메시지로 도배를 했다. 차창 너머로 탁 트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졌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BTS 인기에 관한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감정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말라비틀어져 없어진 ‘지공도사’(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나이 든 사람)는 어리둥절한데, 지금은 BTS 노래에 사족을 못 쓰는 손주를 여럿 둔 꼬부랑 할머니가 됐을, 유럽 섬나라 가수의 달콤한 노래에 까무러쳤던 분들은 쉽게 수긍이 갈까.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30주년을 맞아서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유엔을 방문했다. 어수선한 국내 상황 중에 유엔 연설이 꼭 필요한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정작 눈길을 끈 기사는 ‘대통령 특별사절’ BTS에 대한 것이었다. 호사가들 사이에 임기 말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대통령이 그들의 후광에 은근슬쩍 기대려 한다는 소문까지 무성했는데, 진위를 떠나 BTS의 위상을 짐작하게 했다.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던 김정숙 여사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람도 BTS 덕분에 성사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대통령 부인 방문에 시큰둥하던 미술관 측이 BTS가 함께 온다는 귀띔에 선뜻 승낙했다는 비화를 청와대 어느 비서관이 큰 자랑거리 삼아 발설해서 알려진 사실이다.
BTS는 유엔 총회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라는 영상을 찍었다고 들었다. 종교 시설이 연상되는 무거운 분위기의 유엔 본부가 총회장에서 연예 활동을 승낙한 예는 극히 드물다지만, 희미해지는 존재감에 시들한 위상을 고민하던 유엔이 오히려 덕을 봤다는 후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영국 록밴드 ‘콜드 플레이’의 제안으로 함께 제작한 ‘마이 유니버스(My Universe)’가 단숨에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세계 최고 밴드의 유혹을 받는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음악이라면 ‘젬병’인 대머리 영감은 아무리 들어봐도 BTS의 노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많은 젊은이가 왜 그토록 푹 빠지는지도 도대체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계 방방곡곡의 팬들이 열광하는 히트곡을 연달아 내놓고 나아가 국제 무대의 중심지 유엔과 미국까지도 쥐락펴락(?)하고 있다니 마음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 보니 부산 해변 열차에서의 생일 축하 이벤트가 당대 최고 그룹의 정국이라면 응당 받을 만한 대접이라는 생각이 든다.
‘겨울연가’로 비롯된 한류 드라마 열풍, 싸이의 우스꽝스러운 말춤을 곁들인 ‘강남스타일’,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석권, ‘미나리’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BTS를 위시한 K팝의 선풍적 인기에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해 전 세계 드라마 시장을 압도한 ‘오징어 게임’까지 우리나라 대중문화가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유례없는 경제 성장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변방의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이 이제는 대중문화로 세상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고 있다. 중국의 옛 역사책에 동방에는 가무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했다는데 아무래도 우리는 끼와 흥이 넘치는 민족인가 보다.
하지만 우리나라 순수 예술의 기반이나 저변이 아직 미약한 점이 마음에 걸린다. 대중문화는 무시할 수 없는 예술 영역이지만 실용적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 예술 또한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이 탄탄해야 응용과학이 동반 발전하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영역에서도 두 가지 장르가 함께 발전해야 명실공히 문화 선진국으로 우뚝 설 수 있다. 대중 예술의 눈부신 성공 신화를 눈으로 보면서, 순수 예술도 획기적인 성장의 동력을 찾아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