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무운’을 모를 수 있지? ‘태극 전사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빕니다’라는 표현 못 들어봤어?” “모를 수도 있지! 굳이 어려운 말을 써야 해?” 김정훈(43)·이영미(35)씨 부부는 얼마 전 뉴스를 보다가 말다툼을 했다. 때아닌 ‘무운 싸움’이 벌어졌다.
발단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에게 던진 “무운을 빈다”는 말이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무운(武運)’은 ‘전쟁 따위에서 이기고 지는 운수’를 뜻한다. 하지만 한 방송 기자가 무운을 ‘無運’으로 이해하고 “운이 없기를 빈다고 짧게 약간 신경전을 펼쳤다”고 말해 촌극이 벌어졌다. 이후 네티즌 사이에선 과거 ‘명징 논란’까지 소환하며 어려운 한자어 논쟁이 달아올랐다. ‘명징 논란’이란 2019년 영화 평론가 이동진씨가 ‘기생충’ 한 줄 평에 쓴 “명징하게 직조해낸”이란 표현을 둘러싸고 일었던 갑론을박을 말한다.
한국인의 세대별 한자 체감도는 어떻게 다를까. ‘아무튼, 주말’이 SM C&C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를 통해 20~60대 1026명(세대별 200여 명)에게 ‘한자 문맹’에 대해 물었다. 설문 결과, 2040과 5060 사이엔 두꺼운 ‘한자 장벽’이 놓여 있었다.
“자신이 한자 문맹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이 가장 많은 세대는 40대(53.8%). 다음이 30대(52.7%), 20대(43.1%) 순이었다. 2040에선 열에 너덧 명꼴로 자신을 한자 문맹이라고 여긴다는 얘기다. 반면 60대와 50대는 ‘아니다’란 대답이 각각 68.3%, 64.6%였다.
한자를 몰라 이역만리(異域萬里)를 ‘이억만리’, 야반도주(夜半逃走)를 ‘야밤도주’ 식으로 잘못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자어나 고사성어를 잘못 써서 망신당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20대 71.8%가 ‘있다’고 답했다. 30대(66.5%), 40대(65.6%)가 그 뒤를 이었다. 50대와 60대는 각각 46.6%, 51.5%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직장인 신모(27)씨는 “중학교 때 한자를 배웠지만 실생활에서 쓸 기회가 없다. 우리 세대가 한자를 모르는 것이 흉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씨는 그래도 ‘무운’ 뜻은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아이돌 그룹 ‘FT 아일랜드’ 팬이었는데,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노래 가사에 ‘각자의 무운과 안녕을 빌면서’란 구절이 있었다. 그때 ‘무운’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한자 뜻을 알았다”고 했다.
20대 열 명 중 아홉 명 정도(87.6%)는 “한자를 몰라 불편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전 연령대 중 가장 어려움을 많이 겪는 세대였다. 다음이 30대(82.8%)였다. 그중 “불편한 적이 ‘자주’ 있다”는 비율이 20대에선 22.3%로, 60대(5%)와 50대(6.8%)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한자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는가”란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20대(36.1%)가 가장 낮았다. 다음이 30대(43.3%), 40대(52.8%), 60대(59.9%), 50대(65.0%) 순이었다. 한자를 몰라 불편한 젊은 세대는 굳이 배울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한자를 많이 아는 기성세대는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 세대로 갈수록 ‘한자 강박’이 강한 것으로 풀이된다.
직장인 이영민(31)씨는 “피처폰, 인쇄 매체 등 과거 소통 방식에선 축약할 수 있는 한자어가 빛을 발했지만, 카카오톡·인스타그램 등 지금의 온라인 소통 도구엔 글자 수 제한이 없다. 쓰고 싶은 만큼 다 쓸 수 있다. 쉬운 말로 길게 풀어 써도 되니 굳이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부모님이나 자식 등 가족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도 세대 차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20~40대 절반 정도(20대 45.5%, 30대 54.7%, 40대 44.3%)가 ‘쓸 수 없다’고 답했다. 반면, 50~60대는 70% 이상 ‘쓸 수 있다’고 답했다. 직장인 정모(30)씨는 “어릴 때 한자 자격증 3급을 땄지만 부모님 성함을 한자로 못 쓴다. 또래 대부분이 그렇다”고 했다. 회사원 김모(39)씨는 “한자로 아내 이름을 쓸 수 있는데 아내는 내 이름을 한자로 못 쓰더라. 아이 이름이 순우리말이라 다행”이라며 웃었다.
한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도 있다. 업무상 글 쓰는 일이 잦은 정지연(31·가명)씨는 “글을 정확하게 쓰고 어휘를 다채롭게 사용하려면 한자 공부가 필수더라”고 했다.
전광진 성균관대 명예교수(중문과)는 “한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어 한국 사회의 ‘형식적 문맹률’은 매우 낮지만, 한자를 몰라 문해력이 떨어지는 ‘실질적 문맹률’은 높다고 본다”며 “한글 전용 사회라 하더라도 어문 생활을 풍부하게 하려면 한자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HQ(Hint Quotient·한자어 속뜻 인지 지수)’란 개념을 만든 전 교수는 “한자는 한 글자 한 글자가 ‘형태소(뜻을 가진 가장 작은 말의 단위)’이기 때문에 낱말이 암시하는 뜻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예컨대 수학 개념 ‘산포도’를 한글만 봐선 ‘산에서 나는 포도’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자 ‘散布度’를 알면 ‘흩을 산(散), 펼 포(布), 정도 도(度)’로 ‘흩어진 정도를 보여주는 값’이란 걸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디지털 시대의 한자 교육이 쉽지만은 않다. 조규익 숭실대 국문과 교수는 “인터넷으로 검색만 하면 한자 뜻을 알 수 있는 시대이지만, 그런 용이함 때문에 역설적으로 한자를 제대로 익히기 어려워졌다. 웹에서 보니 유사한 한자를 구별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모 국립대 국문과 교수는 “디지털 사회가 되면서 한자 사용 빈도가 점점 줄고 있지만, 서양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식으로 우리도 교양으로 한자를 가르쳤으면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