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꾸나 이상, 황소 그림 중섭, 역사는 흐른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 마지막 구절이다. 유치원생부터 즐겨 부르는 이 ‘국민 송(song)’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화가가 바로 ‘황소 그림’을 그린 ‘중섭’이다. 정확한 뜻도 모른 채 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이들을 보면, 새삼 이중섭(1916~1956)이 ‘국민화가’임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이중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본 유학파 부잣집 도련님
‘이중섭’ 하면, 가난하고 고생 많았던 화가라는 인상을 먼저 갖게 된다. 그런데 이중섭은 원래 대단한 부잣집 막내아들 출신이다. 대대로 내려온 지주 집안으로, 형은 한때 함경남도 원산에서 백화점을 운영했다. 이중섭이 일본에 있을 때, 그의 친척이 도쿄에만 20명쯤 유학하고 있었다고 이중섭의 아내가 회고했을 정도였다.
이중섭은 평북 정주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36년 일본에 미술 공부를 하러 떠났다. 처음 입학한 곳은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대학)였는데 채 1년도 안 되어 그만두고, 문화학원(文化學園)에 재입학했다. 제국미술학교를 그만둔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화가 윤중식의 회고에 의하면 이 학교 조선인 선배들의 ‘군기 잡기’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라고. 신입생을 환영한답시고 극기 훈련을 시켜 죽을 뻔한 일을 겪은 후, 이중섭은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그가 문화학원으로 적을 옮긴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이 학교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닌 진보 사립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건축가였던 니시무라 이사쿠(1884~1963)가 문학, 미술, 음악이 어우러진 수준 높은 교육기관 창설을 목표로 설립한 학교였다. 니시무라 교장은 일곱 살에 지진으로 부모를 잃고, ‘대역사건(1910년)’으로 처형된 삼촌의 영향 아래 자란 진보주의자였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조차 공공연히 반전(反戰)을 주장하며, ‘천황은 심심하겠다’는 둥 애먼 소리를 하다가 급기야 1943년 4월, 학교 입학식 날 만인이 보는 앞에서 감옥에 끌려갔다. 학교는 강제 폐교되고 건물은 군대 막사로 쓰였다.
◇포화 뚫고 한국 온 일본인 아내 마사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100)를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이 학교였다. 아직은 생난리가 나기 전인 1938년경, 마사코는 학교의 공용 세면대에서 붓을 씻으며 이중섭 선배와 처음 대화를 나눈 장면을 또렷이 기억했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이런 평범한 장면이 끝까지 뇌리에 남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 때문일까. 두 사람은 늦어도 1940년 12월에는 본격 연애를 시작했다. 이중섭이 수도 없이 보낸 ‘연애 엽서’가 그 시절을 증명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 ‘연애 엽서’다. 일반 관제엽서 종이 한 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른 면에는 마사코의 집 주소만 커다랗게 쓰여 있다. 그러니까 이 엽서에는 글이 없다. 이중섭은 그림만으로 하고 싶은 모든 ‘표현’을 함축적으로 담은 것이다. 엽서화 중에는 발을 다친 마사코에게 약을 발라주는 이중섭의 실제 일화를 기록한 것도 있고, 마치 신화 속 한 장면처럼 환상적이고 에로틱한 그림도 많다.
진보 교육의 마지막 보루였던 문화학원이 강제 폐교된 후 이중섭은 귀국했다. 1944년 12월, 전쟁이 격화되고 있을 때 마사코는 ‘결혼이 급하다’는 이중섭의 전보를 받고, 홀로 공습을 뚫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1945년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마지막 관부연락선을 탔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만나, 원산에서 전통 혼례를 올렸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한국식 새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이’라는 의미로 ‘남덕(南德)’이라 하였다. 무슨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렇게 잠시 이들의 행복한 신혼 시절이 있었지만, 전쟁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남덕의 회고에 의하면, 연합군이 원산을 점령했을 때 이중섭 가족은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피란민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해군 함정이 정박해준 대로, 부산이든 거제든 제주든 어디에서든 살아남아야 하는 피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가장으로서의 이중섭은 정말 무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누구에게 폐 끼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고, 설혹 폐를 끼쳐도 어떻게든 갚아야만 하는 성격이었다. 조금은 뻔뻔스러워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 통의 생리를 이중섭은 어찌해도 배울 수 없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생존력 제로인 그를 대신하여 이남덕이 거리로 나섰다. 커다란 광장 같은 야외에서 재봉질해서 일당을 받아 연명하기도 했다. 장미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황염수의 아내 남경숙은 그런 이남덕의 모습을 보고, 누구보다 분통 터져 했다. 남경숙은 이중섭이 정말 무능하고 나쁜 남편이었다고, 아내를 그렇게 고생시킬 수는 없었다고 수십 년 전 일을 회고하면서도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
순진무구한 남편을 둔 아내는 살기 어렵기 마련이다. 더구나 예술가의 아내라니. 이남덕은 가족을 위해서는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화가인 남편을 위해서는 작품의 모델이자 영감의 원천이어야 했다. ‘생활인’과 ‘뮤즈’,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직업이다. 실제로 이중섭은 아내를 거의 병적으로 사랑했고, 이중섭이 그린 수많은 그림에 이남덕의 존재가 드리워져 있다. 곱슬곱슬하게 앞머리를 말아 올린 여인의 모습은 모두 이남덕을 모델로 보면 된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담은 은지화, 그림 그리는 화가를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 모습, 간소한 짐을 꾸리고 길 떠나는 가족 등 수많은 작품에 이남덕이 등장한다.
이중섭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스스로 표현한 대로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畫工)’이었다. ‘정직하다’는 것은 솔직하고 진솔하게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늘 자신과 자신의 주변,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서 소재를 찾는다. 자신이 ‘생활’ 속에서 몸소 겪은 희망과 절망, 갈등과 분노, 욕망과 좌절, 그 모든 것이 이중섭 작품에는 처절할 정도로 정직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그런 그림을 ‘한국이 낳은’ 화공으로서 열심히 그렸다. 한국인의 상징인 ‘소’를 자신의 자화상으로 삼았고, 닭이나 물고기, 도원(桃源)과 동자(童子) 등 대부분의 소재를 한국의 전통에서 취했다. 그런 소재들을 자신의 경험과 너무나도 밀착시켜, 이것들이 고루한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독창적으로 변형했다.
이중섭은 기법적으로도 ‘한국의 것’을 찾고 싶어 했다. 캔버스가 아닌 질긴 ‘장지’를 즐겨 쓴다든지, 은입사 기법을 연상시키는 은지화를 그린다든지, 소를 그려도 마치 묵화(墨畵)를 치듯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붓질을 구사하는 식이었다. 그는 서양인과는 다른 ‘한국인의 유화’를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이 그를 ‘국민화가’라고 불러도 좋은, 진정한 이유다.
◇생이별한 가족 향한 그리움, 예술로 승화
1952년 이남덕은 부친의 부음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에 갔다. 가족 간의 생이별 속에서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화폭에 담았다. 전쟁이 끝나자, 이중섭은 열심히 그림을 그려 돈을 번 후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리라는 부푼 희망으로 가득 찼다. 1954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유명한 작품이 다 그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5년 1월 열리는 개인전에 이 작품들을 내놓기만 하면, 이중섭은 떼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 정말로 믿었다.
그러나 지나친 낙관이 어쩌면 이미 절망의 신호였을까. 1955년 개인전이 경제적 실패로 끝나자 이중섭은 곧바로 극단적인 절망에 빠져버렸다. 잘 알려진 대로, 이후 이중섭은 정신적으로 미쳐갔다. 남경숙이 수박을 사 들고 가 먹으라고 했더니, 이중섭은 “고개를 숙였을 때 셔츠의 두 번째 단추가 보이면, 뭘 먹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거식증이 심했던 때다.
1955년 12월경, 이중섭은 아내에게 그렇게도 자주 보내던 편지를 아예 끊었다. 심지어 아내에게서 온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았다. 이남덕과의 단절은 곧 이중섭의 죽음을 예고했다. 실제로 이중섭은 편지에서 아내를 “나의 생명”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1956년 9월, 이중섭은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마흔 살의 생을 마감했다.
이남덕은 한일 간 국교가 정상화된 후에야 다시 서울을 방문했다. 이중섭의 수많은 기록과 작품이 그나마 이 정도 남아있는 것은 그녀의 공헌이 크다. 이남덕은 홀로 두 아들을 기르며, 그림에 재능이 많은 손자가 자라는 것도 지켜보며 지금껏 도쿄에 살고 있다. 이중섭이 1941년 무수히 연애 엽서를 보냈던 주소지, 바로 그곳에서. 2012년에는 그녀가 소장한 마지막 유품, 유학 시절 이중섭이 일본에서 받은 태양상의 부상 ‘팔레트’를 제주도 이중섭미술관에 기증했다. 고작 7년을 이중섭과 함께 살고, 그의 사후(死後) 65년을 홀로 지냈지만, 이남덕은 이중섭을 회상할 때마다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남이었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