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레이스가 ‘방명록’ 때문에 시끄럽다. 발단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10일 광주광역시 5·18 민주묘지를 방문해 남긴 방명록 문구에서 시작됐다. 윤 후보가 “민주와 인권의 오월 정신 반듯이 세우겠습니다”라고 적었는데, 민주당과 이재명 대선 후보가 두 가지를 문제 삼았다. 하나는 윤 후보가 쓴 ‘반듯이’는 ‘반드시’의 맞춤법이 틀린 게 아니냐는 것, 다른 하나는 ‘윤 후보가 지금의 오월 정신이 비뚤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반듯하게 세워보겠다고 나선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4월 홍영표 민주당 의원 역시 5·18 민주묘지 방명록에 “5월의 빛나는 정신과 역사를 받들어 개혁을 완성하고, 민주주의를 반듯이 지키겠습니다”고 쓴 사실이 알려졌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민주당 주장대로라면 홍 의원도 민주주의가 비뚤어졌다고 보고 방명록을 쓴 꼴”이라고 주장했다.

1990년대 이전만 해도 방명록이 큰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대신 주요 정치인이 쓰는 붓글씨와 서체가 화제의 대상이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도무문(大道無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동초(忍冬草)’ 등의 문구를 큰 붓으로 써서 대중에 공개했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교수는 “거물급 정치인들은 직접 쓴 서체를 출입 기자 등에게 선물해 자신의 능력이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7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 남포시를 방문해 쓴 방명록(왼쪽)과 같은 해 6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쓴 방명록.

2000년대 들어 상황이 변했다. 서예 문구보다는 정치인이 찾는 장소에서 적는 방명록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고 인터넷 매체가 많아지자, 주요 정치인이 방명록에 쓴 내용과 한글 맞춤법이 그대로 기사에 등장했다. 한 전직 국회의원은 “서당(書堂)식 교육을 받았던 세대가 정치판에서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현대 정치에서 정치인이 내는 메시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방명록이 갈수록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가진 전략과 시대정신을 잘 담는 글이 방명록에 좋은 글”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치인들도 방명록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7년 대선 후보 시절 쓴 방명록이다. 이 전 대통령은 현충일을 맞아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했는데, 방명록에 “당신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읍니다. 번영된 조국, 평화통일을 이루는 데 모든 것을 받치겠읍니다”라고 썼다. 1998년에 바뀐 맞춤법에 따르면 ‘-읍니다’는 ‘-습니다’로 써야 맞는다. 또 ‘받치겠다’는 ‘바치겠다’가 올바른 표현이어서 논란이 됐다. 이 방명록은 순식간에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졌고,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로부터 넉 달 뒤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쓴 방명록 글이 논란이 됐다. 2007년 10월 2일, 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방명록에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고 적었다. 이틀 뒤 북한 남포시 서해갑문에서는 “인민은 위대하다”고 썼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국가원수가 북한식 표현인 ‘인민’이라고 쓴 것이 옳으냐는 의견이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거기 가서 ‘국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국민은 위대하다’고 쓰려고 했지만 어색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2017년 전남 진도 팽목항을 방문해 방명록에 ‘고맙다’는 문구를 남겼다. 그러자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학생들에게 쓸 수 있는 표현이냐”는 비판이 일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지난해 현충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코로나19′를 ‘코로나20′으로 썼다가 방명록을 다시 작성하기도 했다.

대선 후보나 당대표급 인사들은 방명록을 쓸 때, 대체로 메시지를 담당하는 참모의 의견이나 건의를 참고해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언론 분야를 담당했던 한 관계자는 “방명록이 고도의 정치 행위였기에, 노 대통령은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본인이 처음 생각한 것을 알려준 뒤, 참모들과 회의를 하고, 다시 다듬고 상의하는 등 정말 많은 단계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에 나선 여야 대선 후보들도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통해 방명록을 쓴다고 한다. 이재명 후보 측 관계자는 “방명록을 써야 하는 상황이 오면 메시지 팀에서 몇 개의 문구 안을 만들어 후보에게 보고하고, 이를 참고로 이 후보가 사전에 직접 문안을 만든다”고 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관계자는 “후보가 먼저 큰 틀에서 방향이나 지침을 준다. 그러면 메시지 팀에서 몇 개의 안을 만들어 올리는 방식으로 문구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손 글씨에 익숙하지 않은 정치인에게는 방명록이 부담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6월 당대표로 선출된 후 국립서울현충원 방명록에 글을 썼는데, 일부 네티즌들이 ‘초딩 글씨 같다’고 비판했다. 이를 의식한 듯, 그는 이후 방명록에는 정성 들여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였다. 오랜 기간 컴퓨터로 작업했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역시 비슷한 고충을 털어놓은 바 있다. 무소속으로 대선에 나섰던 2012년, 그는 “가는 곳마다 써야 하는 방명록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근데 제가 글씨를 정말 못 씁니다. 글씨를 못 써서 컴퓨터를 배웠습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