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정말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한다. 열정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연연하지도 마라. 명심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모든 것이 썩었어. 이해하겠니? 봐라. 난 지금도 네가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기를 바란다. 걱정이 되는구나.”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 학교> 중에서.
설거지를 하지 않아 싱크대에서 라면 국물이 썩어가게 해보라. 술에 취해 네 발로 기면서 “나는 사족 보행이 편하다, 히히”라고 해보라. 누군가 참다못해 외칠 것이다. “인간이 좀 되어라!” 이 말에는 인간이 원래는 꽤 괜찮은 존재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인간은 설거지를 제때 하고, 술에 취해도 개짓하지 않는 존재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왜 그렇게 사는 거니? 인간이 좀 되어라!” 이런 말에는 내가 지금 한심한 존재라는 사실과 아울러, 내게 이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뜻이 담겼다.
내가 그토록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닌가. 내가 한심한 존재가 아니라 꽤 괜찮은 존재라니. 이런 생각은 사람을 고무한다. 나는 구제 불능 쓰레기가 아니구나! 재활용이 가능하구나! 사람 꼴을 하고 살 수 있구나! 그러나 이게 축복이기만 할까. 나도 멀쩡한 인간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제 인간 같지 않은 현 상태에 안주할 수 없다. 현재의 한심한 상태를 벗어나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성정이 게으른 사람에게 이건 저주일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하루하루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일 것이기 때문에.
이 생각을 극단까지 몰고 간 사상이 바로 조선 시대를 풍미했다는 성리학이다. 성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구제 불능 쓰레기가 아니다. 재활용이 가능한 정도의 쓰레기도 아니다. 인간은 실로 위대해질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은 심지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한 생각의 기원을 더듬어 보면, 고대 중국의 사상가 맹자(孟子)에게 가 닿게 된다. 맹자는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이른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맹자는 공중화장실에 가보지 않았나, 술 마시고 주정하는 사람을 보지도 못했나,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복지 시설에 반대하는 이들을 보지도 못했나, 어떻게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러나 맹자는 전쟁이 창궐한 시대를 산 사람. 그가 인간의 비참함과 비열함과 사악함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성선설을 통해 맹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눈앞의 인간이 선하다는 게 아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당신이 아무리 망가졌어도 당신이라는 존재 어딘가에는 선한 본성이 씨앗처럼 박혀 있다는 뜻이다.
그 씨앗 같은 선함도 결국은 후천적 교육과 수양의 결과라는 것이, 이른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荀子)의 입장이다. 실로, <순자> 텍스트에서 가장 놀라운 문장은 이것이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원래 소인이다(人之生, 固小人也).” 소인배로서 인간. 쩨쩨한 인간.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는 인간. 욕망을 다스릴 줄 모르는 인간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순자는 비관적인 사람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은 아니다. 순자가 보기에,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순간의 쾌감에 탐닉하고 목전의 고통을 피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목전의 고통을 인내해가며 장기적 행복을 도모할 지적인 능력이 있다.
SF 소설 <듄>에 나오는 가이우스 헬렌 모히암 대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짐승들이 덫에서 도망치려고 제 다리를 물어뜯는다는 얘기를 들어보았겠지? 그건 동물다운 요령이다. 인간이라면 덫 안에 그대로 남아 고통을 견디면서 죽은 척할 거야. 그러면 덫을 놓은 사람을 죽여 동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없앨 수도 있을 테니까.”
순자나 맹자나 성리학자들에 따르면, 도덕성이나 인내나 지력을 갈고 닦아 인간은 마침내 한심한 소인에서 벗어나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주인공들은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성인이라고? “어떤 경우에도 나 자신이 주변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느끼고 싶지 않다.” 인간에게는 성인이 될 능력이 있다고 강변하면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희망은 관찰을 흐리게 만든다.” 누군가 성인군자처럼 굴어대면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살아가는 시대와 마찬가지로 평범해요.”
벤야멘타 하인 학교 학생들은 담담하게 인간이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은 그들에게 낯설다. 그렇다고 그들이 게으른 족속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규율을 사랑한다. 왜? “본인은 삶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 본인은 엄히 다스려지기를 희망한다. 정신을 차리고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하기 위해서다.” 규율이 없다면 너무 인생이 지루할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벤야멘타 하인 학교 학생들이 보기에, 세상은 지루한 악인들로 가득 차 있다. 벤야멘타 하인 학교 학생들은 그런 악인들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너무 뻔하기 때문에. “정말로 흥미로운,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착한 사람들이다.” 인류가 해 온 잘난 척의 비밀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혹은 인간의 “자기 모에화(자의식 과잉으로 자신을 미화해 보기 좋게 함)”에 지쳐서일까. <벤야멘타 하인 학교>를 읽다 보면, 독자는 비애와 더불어 어떤 역설적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대단한 존재인가, 아니면 한심한 존재인가? 정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살다가 보면 아주 드물게 진정 착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착함을 소비하거나, 착해 보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착한 사람들. 악인과 소인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용기가 새삼 감탄스럽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고 싶지는 않다. 혹시나 또 무엇을 보게 될지 두렵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