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지난 2014년 예술원 신입 회원 추천 투표에서 탈락했다. 국내 인사들의 텃세에 밀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조선일보 DB

소설가 박경리(1926~2008), ‘물방울 화가’ 김창열(1929~2021), 단색화 거장 박서보(90), 피아니스트 백건우(75)···.

이들의 공통점은? 각기 문학과 미술, 음악 분야에서 굵직한 획을 그은 거장이라는 것 외에 하나가 더 있다. 모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에 속한 적이 없다는 것. 예술원은 ‘대한민국 예술가들의 대표 기관’을 자임하는 곳이다. 어느 예술원 회원이 생전 박경리 선생을 찾아뵙고 회원이 되실 것을 권유하자 단칼에 거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딴 곳 안 간다.”

백건우와 김창열은 지난 2014년 예술원 신입 회원 추천 투표에서 탈락했다. 예술원 회원은 해당 분과 회원들의 투표로 정해진다. 국제적으로 이름난 피아니스트와 화가가 예술원 진입에 실패하면서, 국내 인사들의 텃세에 밀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지난 10월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박서보 화백도 예술원 회원이 아니다. 단색화 열풍을 이끌어 온 주역인 그는 본지 통화에서 “바보들끼리 모여있는 곳에 내가 왜 갑니까”라고 되물었다. “특정 학교 출신들이 독식한 곳, 누가 나보고 ‘당신이 와서 예술원을 개혁해달라’고 하기에 내가 그랬어요. 왜 쓰레기통에 오라고 하십니까.”

단색화 거장 박서보도 예술원 회원이 아니다. 지난 10월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그는 본지 통화에서 "바보들끼리 모여있는 곳에 내가 왜 가냐"고 되물었다. /이태경 기자

예술원의 폐쇄성과 정액 수당 지급 등 운영 방식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시작은 소설가 이기호(49·광주대 교수)의 문제 제기였다. 이씨는 지난 7월 “예술원 회원들에게 매달 지급하는 국고 지원금을 후배 예술가를 위해 써야 한다”며 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을 제기했고, 문예지 ‘악스트’에 실린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도래할 위협에 대한 선제적 대응방안’이라는 보고서 형식을 빌린 소설에서 예술원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진짜 너무들 하는 거 같아요. 거기 계신 어른들 대부분 대학교수 출신이잖아요? (···) 대학교수로 정년퇴직해서 매달 300만원, 400만원 사학연금 받으시는 분들이 예술원 회원이 돼서 거기에 또 매달 180만원씩 더 받아가시는 거예요.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을···.”(소설가 A, 남, 49세)

대한민국 예술원은 ‘예술 창작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예술가를 우대·지원하고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을 행함으로써 예술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1954년 설립됐다. 문학, 미술, 음악, 연극·영화·무용의 4개 분과에서 ‘경력 30년 이상, 예술 발전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사람을 회원으로 선출한다. 정원 100명에 현재 회원 89명. 종신 임기로 매월 수당 180만원을 받는다. 이씨는 “올해 예술원 1년 예산은 32억6500만원인데 대부분이 회원 개개인의 수당으로 지급됐다”며 “반면 아르코청년예술가 지원사업은 총 예산이 9억6000만원뿐이고, 올해는 예산 부족으로 신청 2172건 중 108건만 선정됐다. 상위 1%에게 한 나라의 문화 예술 예산이 집중된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예술원 논란이 처음은 아니다. 우선 선출 방식. 철저하게 기존 예술원 회원들의 심사와 인준으로 이뤄진다. 아무리 뛰어난 공적이 있는 예술가라고 해도 기존 회원들이 반대하면 회원이 될 수 없다. 서양화가 김흥수(1919~2014) 화백은 1991년 예술원상을 받고 20년 후인 2010년 91세에 예술원 신입 회원이 됐다. 기존 미술 분과 회원 몇몇이 그를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대로 ‘이분이 왜 예술원 회원이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들도 있다. 기존 회원들과의 ‘친교’만으로 됐다거나, 특정 학교 출신들이 독식했다는 뒷말이 나오는 이유다. 연극배우 백성희(1925~2016)는 수차례 낙선 끝에 예술원 회원이 됐다. 그는 생전 “세상을 모르고 살아온 백로가 까마귀들에게 이리저리 밀렸던 그때의 아픔이 가슴속의 얼룩으로 남았다”고 회고했다.

정액수당 존폐 논란도 뜨겁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대한민국 예술원 발전전략 수립을 위한 기초연구’(2016)에 따르면, 해외 유사기관의 경우 회원 예우 방식은 회원이 되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있으며 일종의 명예직이라고 인식된다. 독일·프랑스·미국은 국가가 예술원 회원에게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미국은 오히려 회원들이 연회비를 납부한다. 일본만 연 300만엔(약 3100만원)의 회원 수당을 지급한다.

대한민국 예술원이 회원인 원로 예술인에 대한 예우를 최대 과제로 삼는 반면, 유럽과 미국 예술원은 신진 예술가 발굴·지원, 공쿠르상을 비롯한 각종 상의 심사, 장학 프로그램 등 젊은 예술인을 지원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수십년째 고정된 분과 구성이 시대 변화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중음악이나 디자인, 사진, 디지털 예술 등은 아예 진입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문학 분과 내에서도 시·소설·평론에 집중돼 있고, 아동문학은 회원이 없다. 반면 프랑스 아카데미 보자르는 9개 분과, 일본 예술원은 16분과로 우리보다 폭넓은 분야의 예술가가 속해 있다.

문단에서 시작된 예술원 개혁 요구는 음악·미술·연극 등 다른 분야로 확산 중이다. 문인 744명과 다른 분야 예술인 329명이 예술원 제도의 개정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상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일 “특권층 1%만을 위한 예술원은 개편해야 한다”며 대한민국예술원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예술원 회원을 선출하는 경우 외부위원으로 구성된 회원추천위원회의 심사를 받도록 하고, 현 종신제를 4년 연임제(1회)로 변경하며, 수당 지급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을 담았다.

예술원 내부에선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지난달 예술원 신임 회장에 선출된 화가 유희영(81)씨는 “아직 취임식도 열리지 않은 시점이라 매우 조심스럽다”면서 “각계에서 지적한 문제를 내부에서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