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33년 전에 와서 처음 뵀는데,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그동안 일을 충분히 다 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영하 20도, 매서운 바람이 불던 2019년 12월. 신용석(63) 전 지리산사무소장은 퇴임식을 마치고 1915m 높이 천왕봉에 올라 비석 앞에서 절을 올렸다. 신 전 소장은 1987년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입사해 33년간 지리산·설악산·북한산 등을 누벼온 우리나라 1기 레인저. 최근엔 지리산의 수많은 능선을 따라가며 곳곳에 숨겨진 역사·문화·생태계를 해설한 책 ‘알고 찾는 지리산’을 출간하기도 했다.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483㎢) 국립공원으로 경남, 전남, 전북 3개 도에 걸쳐 있다. 한반도 생물종의 20%가 살고 있어 ‘생명의 산’으로도 불리며 임진왜란이나 6·25전쟁 등 국란 때마다 갈 곳 없는 이들을 품어준 피란처 역할을 했다. 골짜기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며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 격전지로 역사의 상처를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최근엔 tvN 드라마 ‘지리산’이 방영되며 지리산과 산을 지키는 레인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지리산의 첫인상을 기억하나요.

“1980년대 후반 첫 출장으로 지리산 노고단에 갔어요. 이름처럼 신성하고 장엄한 풍경을 기대했는데, 막상 가보니 훼손이 심각해 황무지뿐이더군요.”

-어느 정도로 훼손이 심했길래.

“노고단은 원래 눈보라와 비바람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초지가 빽빽하게 형성된 곳이었어요. 그런데 일제강점기부터 나무를 땔감으로 쓰기 시작했고, 6·25전쟁 때는 군사 시설을 짓고 전투가 벌어지면서 땅이 망가졌지요. 전후엔 야영객까지 몰려들면서 초지가 파헤쳐지고 맨땅이 드러났죠.”

-그랬던 노고단과 세석평전을 복구했다고요.

“가까운 지역의 토양과 식생을 조사하고, 산 밑의 흙을 퍼올려 거름과 섞은 뒤 씨앗을 뿌리고 싹이 돋기를 기다려요. 사람으로 치면 화상 입은 살 위에 붕대를 감고 새살이 돋기를 기다리는 과정이죠. 평지에선 발아율이 70~80%라면, 이런 고지대는 기후 환경이 혹독해 초반엔 발아율이 2~3%밖에 안 됐어요. 3년을 기다리니 그제야 싹이 조금씩 올라오는데,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리산 노고단에서 본 천왕봉. 왼쪽 뭉툭한 봉우리는 반야봉. /신용석 제공

-반달곰 복원 사업에도 참여했던데요.

“개체 수를 늘리기 위해 우리나라 토종 곰과 유전자가 같은 곰들을 찾아 나섰죠. 러시아에서 어미 잃은 새끼 곰들을 데려와 곰 야생 적응장에서 훈련을 시키고 방사했어요.”

-지금은 몇 마리가 살고 있나요?

“70여 마리로 늘어났어요. 그중 대부분은 위치를 알려주는 발신기를 채워놨는데 움직임이 없으면 알람이 울려요. 알람을 따라 추적해보면 덫에 걸려 있을 때가 많아요. 그럼 사람처럼 수의사가 소독하고 붕대도 감아주고, 상처가 심한 애들은 마취시켜서 담요로 싸서 업고 내려오기도 해요.”

-야생 곰을 마주친 적은 없었나요?

“곰은 사람 냄새를 알아서 피하기 때문에 괜찮은데요. 한번은 정말 아찔한 순간이 있었어요. 탈출한 곰을 찾다가 좁은 바위굴 하나에 머리를 들이밀었는데, 야생동물의 시큼한 냄새가 확 끼치는 거예요. 굴 저쪽 안에서 시퍼런 불빛이 다가오더라고요. 짐승의 눈이 내뿜는 빛이었어요. 반사적으로 머리를 빼려고 했는데 도무지 빠지질 않는 거예요.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죽을 힘을 다해 머리를 빼냈는데 바위에 얼굴이 다 긁혔죠. 삵이나 오소리였을 텐데, 그때 머리를 빼지 못했다면 얼굴이 다 뜯겼을 거예요.”

현역 레인저 시절, 마취된 반달가슴곰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신용석 전 지리산사무소장.

신 전 소장은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명산 순례를 다니며 산과 가까워졌다. 졸업 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설립되자마자 공채에 응시해 1기 레인저가 됐다. 그는 레인저라는 직업에 대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근무한다는 낭만이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이 젖도록 땀을 흘려야 하는 육체노동”이라고 했다.

-육체적으로 제일 힘들 땐 언젠가요.

“구조할 땐 사람을 업고 뛰어내려 가기도 하거든요. 1~2초가 생사를 가르는 위급한 상황도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무릎 관절, 팔목, 발목 성한 곳이 없죠.”

-수많은 길을 어떻게 다 찾아다닙니까.

“처음 석 달은 지형 숙지 훈련을 해요. 길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법적으로 다닐 수 있는 길, 주민만 다니는 길, 동물이 다니는 길까지 파악해야 하죠. 안개나 눈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 땐 동물이 다니는 길로 가야 할 때도 있거든요.”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나요.

“10여 년 전 설악산에 근무할 때, 폭설이 내린 날 순찰을 나섰어요. 계단 난간까지 눈에 묻혀서 길이 아예 사라져 버린 거예요. 몇 번을 발을 잘못 디뎌서 구덩이 아래로 빠졌다가 다시 기어올라오면서, 평소엔 2시간 걸리던 길을 7시간에 걸려 돌아왔어요. 레인저에게도 산은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인데 제가 산을 얕봤던 거죠.”

-민폐 등산객도 많을 것 같은데요.

“단속하다가 욕을 듣거나 멱살 잡히는 건 예삿일이고, 술에 취해 과도로 위협하는 사람도 있죠.”

-예전엔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도 많았다고요.

“여름 성수기가 지나면 산과 계곡이 쓰레기 범벅이었어요. 저희가 마대에 수거해서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데, 쓰레기에서 나온 물이 등에 줄줄 흐르고 냄새가 배요. 집에 가면 아이들이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코를 쥐고요. 초반엔 등산객 질서 잡느라 고생했죠.”

-드라마 ‘지리산’을 보면 산에서 굿도 하더군요.

“드라마에선 굉장히 점잖은 편이던데요?(웃음) 단속하려고 바위 위로 올라가면, 못 올라오도록 대나무 꼬챙이 같은 걸로 찍어누르는 사람도 있었죠. 바위에 표식을 새긴다며 낙서하는 사람도 많았고요.”

-지리산은 유독 영험한 느낌이 있습니다.

“지리산에는 ‘백무동’이란 곳도 있잖아요. 천왕봉 여신을 받드는 무속 신앙의 근원지로 100명의 무당이 기도를 했다는 곳이죠. 풍수지리에선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신령한 기운이 고여 있는 곳이라고 하고요.”

천왕봉에 모인 지리산 레인저들. /신용석 제공

신 전 소장은 지리산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으로 노고단과 세석평전을 꼽았다. 30만평 평지가 펼쳐진 세석평전은 1500m 고지인데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징집을 피해 도망친 이들, 6·25 때 피란민, 야전병원 차릴 곳을 찾던 빨치산, 산속 동물들도 물을 찾아 이곳까지 올라왔다.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이라고들 해요. ‘어머니 산에 들어가면 다들 살 수 있다’고 했거든요. 시대와 이념에 쫓겨온 사람들을 어머니처럼 품어준 곳이 세석평전이었어요.”

-슬픈 역사가 서린 곳이 많더군요.

“많죠. 피아골의 경우엔 계곡이 아주 깊어서 입구만 막으면 안에 있는 사람이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피란처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몰살당할 수도 있는 곳이죠. 임진왜란 때부터 의병이나 우리 관군이 많이 죽었어요. 이후엔 빨치산 전투로 많은 목숨이 희생됐고요. 40~50년 지나서 대피소를 지으려고 땅을 팠더니 인골이 한 트럭이나 나왔대요. 그래서인지 피아골에만 가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요.”

-최근 50년간 가장 안타까운 사고로는 1998년 지리산 수해를 언급했더라고요.

“당시엔 지리산에 근무하진 않았지만, 그날 기습 폭우로 103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어요. 산에서 집중호우는 파괴력이 어마어마해요. 삽시간에 계곡물이 불어나면 ‘물이 서서 내려온다’고 표현할 만큼 무섭습니다.”

-직접 수해를 겪은 적도 있나요.

“1990년 8월 소백산에서 폭우로 산사태가 났어요. 흙, 바위, 나무가 뒤엉켜 쏟아지면서 야영장이랑 도로를 전부 쓸고 내려갔죠. 야영객을 대피시키다가 레인저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무소에 갇혀버렸어요. 급류에 떠내려오는 바위들이 부딪혀 건물이 흔들리는 지경이었죠. 사무소와 계곡 건너편 사이에 걸쳐진 통나무 위로 기어서 탈출했어요. 직원 두 명이 균형을 잃어 물에 빠졌다가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산신령이 도운 것 아닌가 싶어요.”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신 전 소장은 “수백 번 다녀서 눈 감고도 길이 훤하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매일 가는 길이라도 자연의 변화에 따라, 기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게 산”이라고 했다. 그는 산에 오르는 일을 책 읽기에 비유했다. “지리산은 수천 권의 책이 모인 커다란 도서관 같아요. 한 번 오를 때마다 수천 권 중 불과 한 권을 읽을 수 있을 뿐이죠.” 산전수전을 겪고 베테랑 레인저로 퇴임했지만, 아직 못다 한 일이 남았다. “기후변화가 가장 먼저 닥치는 곳이 산이에요. 소나무나 구상나무 같은 침엽수는 온도가 높아지면 말라 죽기 시작하죠. 방파제가 파도를 막아주듯, 국립공원을 잘 보존해 산과 나무가 기후변화를 막아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